'교회론'에서 본 평신도의 신학적 위치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바로 교회가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에게 무슨 임무를 맡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교회를 선택하시고 교회에게 특별한 임무를 맡기셨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선택하셨을 때, 하나의 믿음의 백성과 이 백성을 통하여 복을 받게 될 온 인류를 염두에 두셨는데, 이 때에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에게 복을 내릴 임무를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큰 복과 임무를 주셨다.
이 하나님의 백성은 구약성서의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신약성서의 시대와 교회사의 시대를 거치면서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의 열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Laos)'은 이 세상 한복판에서, 이 세상의 백성 한가운데를 지나가면서 '하나님의 도성',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가는 백성, 유랑하고 순례하는 백성이다. 물론 그 나라는, 요한계시록의 환상에서 나타났듯이, 어떤 저 먼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 한가운데로 내려오기 때문에, 바로 이 세상에서 세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저기 있지 않고 바로 '우리 가운데' 있다",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바로 이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를 찾고 구하고 두드리고 있으며,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도 이곳에 오라고 초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안에서는 어떤 신학적 위치를 갖고 있는가?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카톨릭 신학자 한스 큉의 말대로, 직분을 맡은 교역자가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며, 그렇다고 성도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다. 교회에 소속된 모든 자들 즉 남녀노소, 신분과 계급, 직분과 은사의 차이가 없이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 안에는 기능과 역할의 차이는 있지만, 이 차이는 차별이 아니며, 이 구분은 구별이 아니다. 모두가 다 똑같이 하나님의 선택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물려받을 거룩한 나라, 제사장 같은 백성이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백성 안에는 성직자-평신도의 구분이 무의미하다(풀러-그레그옥덴/리젠트-폴스티븐스). 모두가 다 제사장이요, 종교개혁자 마틴루터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다 사제입니다. 이것은 루터가 교황과 감독, 사제를 중심으로 위계적-계급적 질서를 이루고 있는 카톨릭 교회에 대항하며 종교개혁을 할 때 재발견한 '모든 성도의 만인사제직'이라는 진리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신약성서 시대에서는 교회론에 하나의 큰 변화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즉 예수님은 교회를 새롭게 소집하셨다. 그분은 옛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병들고 흩어져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이 백성을 치유하고 갱신하고, 이 백성이 다시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온전히 봉사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새로운 무리를 모으셨다. 그 중에서 12명을 택하신 것은 바로 상실된 이스라엘의 사명을 회복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분은 온 몸을 다하여 제자들을 부르시고 섬기시고, 끝내는 그 몸을 십자가에서 깨뜨려 피와 물을 아낌없이 쏟아 부으시면서까지 인류의 구원과 교회의 소집을 위해 헌신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몸으로 다시 살아나셔서 인류와 교회에 새로운 희망을 주시고, 또 그분이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셔서 교회를 새롭게 소집, 갱신하셨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형성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렀다. 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내어 주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그 구원받은 자들을 모아 자신의 몸으로 삼으시고, 그 몸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교회를 통치하시고, 성령을 통하여 온갖 은사들을 주셔서 교회 안에서 은혜가 충만하게 하시며, 교회를 날로 날로 새롭게 하시고 새롭게 세우시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지체들이 다 똑같은 일을 할 수 없으며(성직자-PTEM/평신도-PACE), 또 한 지체가 모든 일을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교회의 임무를 획일화할 수도 없고, 또 어떤 직분이 독주하거나 일방적으로 통치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카톨릭 교회에서 교황이 교회를 지배하려고 한다든지, 개신교회에서 목사님이나 장로님이 교회를 마음대로 주장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임무를 모든 지체에게 고루고루 나누지 않고 어떤 자가 독점하려고 하든지, 또 교회가 해야 할 다양한 임무를 억압해서 다른 임무와 그 임무를 맡은 자를 억압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모든 직분과 지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협력하고 섬기고 봉사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이 세상과 우주 안에서 충만해지도록 해야 한다. 모든 직분은 섬김의 직분이지 지배의 직분이 아니다. 지배의 정신은 그리스도의 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의 영, 사탄의 영에서 나온 것이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요, 작은 자가 위대한 자이다(Melvin). 모두가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로서 동등히 섬기고 동등히 대하여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분쟁이나 분열이 없도록 해야 한다.
21세기 미래사회의 교회에서는 목회자와 평신도의 동역(James Garlow)이 크게 기대될 것이다. 이전 세기에서는 교회가 거의 목회자의 역량에 크게 의존해 왔지만, 앞으로는 지도적인 목회자보다는 평신도의 활동에 의해 교회의 성장과 발전이 크게 좌우되리라고 예견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평신도의 인적-물적 자원들을 활용하고 평신도의 은사들을 개발하여 이들의 역량을 목회에 최대한도로 적용하는 새로운 목회-교회 구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바로 교회가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에게 무슨 임무를 맡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교회를 선택하시고 교회에게 특별한 임무를 맡기셨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선택하셨을 때, 하나의 믿음의 백성과 이 백성을 통하여 복을 받게 될 온 인류를 염두에 두셨는데, 이 때에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에게 복을 내릴 임무를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큰 복과 임무를 주셨다.
이 하나님의 백성은 구약성서의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신약성서의 시대와 교회사의 시대를 거치면서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의 열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Laos)'은 이 세상 한복판에서, 이 세상의 백성 한가운데를 지나가면서 '하나님의 도성',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가는 백성, 유랑하고 순례하는 백성이다. 물론 그 나라는, 요한계시록의 환상에서 나타났듯이, 어떤 저 먼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 한가운데로 내려오기 때문에, 바로 이 세상에서 세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저기 있지 않고 바로 '우리 가운데' 있다",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바로 이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를 찾고 구하고 두드리고 있으며,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도 이곳에 오라고 초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안에서는 어떤 신학적 위치를 갖고 있는가?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카톨릭 신학자 한스 큉의 말대로, 직분을 맡은 교역자가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며, 그렇다고 성도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다. 교회에 소속된 모든 자들 즉 남녀노소, 신분과 계급, 직분과 은사의 차이가 없이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 안에는 기능과 역할의 차이는 있지만, 이 차이는 차별이 아니며, 이 구분은 구별이 아니다. 모두가 다 똑같이 하나님의 선택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물려받을 거룩한 나라, 제사장 같은 백성이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백성 안에는 성직자-평신도의 구분이 무의미하다(풀러-그레그옥덴/리젠트-폴스티븐스). 모두가 다 제사장이요, 종교개혁자 마틴루터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다 사제입니다. 이것은 루터가 교황과 감독, 사제를 중심으로 위계적-계급적 질서를 이루고 있는 카톨릭 교회에 대항하며 종교개혁을 할 때 재발견한 '모든 성도의 만인사제직'이라는 진리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신약성서 시대에서는 교회론에 하나의 큰 변화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즉 예수님은 교회를 새롭게 소집하셨다. 그분은 옛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병들고 흩어져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이 백성을 치유하고 갱신하고, 이 백성이 다시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온전히 봉사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새로운 무리를 모으셨다. 그 중에서 12명을 택하신 것은 바로 상실된 이스라엘의 사명을 회복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분은 온 몸을 다하여 제자들을 부르시고 섬기시고, 끝내는 그 몸을 십자가에서 깨뜨려 피와 물을 아낌없이 쏟아 부으시면서까지 인류의 구원과 교회의 소집을 위해 헌신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몸으로 다시 살아나셔서 인류와 교회에 새로운 희망을 주시고, 또 그분이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셔서 교회를 새롭게 소집, 갱신하셨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형성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렀다. 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내어 주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그 구원받은 자들을 모아 자신의 몸으로 삼으시고, 그 몸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교회를 통치하시고, 성령을 통하여 온갖 은사들을 주셔서 교회 안에서 은혜가 충만하게 하시며, 교회를 날로 날로 새롭게 하시고 새롭게 세우시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지체들이 다 똑같은 일을 할 수 없으며(성직자-PTEM/평신도-PACE), 또 한 지체가 모든 일을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교회의 임무를 획일화할 수도 없고, 또 어떤 직분이 독주하거나 일방적으로 통치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카톨릭 교회에서 교황이 교회를 지배하려고 한다든지, 개신교회에서 목사님이나 장로님이 교회를 마음대로 주장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임무를 모든 지체에게 고루고루 나누지 않고 어떤 자가 독점하려고 하든지, 또 교회가 해야 할 다양한 임무를 억압해서 다른 임무와 그 임무를 맡은 자를 억압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모든 직분과 지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협력하고 섬기고 봉사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이 세상과 우주 안에서 충만해지도록 해야 한다. 모든 직분은 섬김의 직분이지 지배의 직분이 아니다. 지배의 정신은 그리스도의 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의 영, 사탄의 영에서 나온 것이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요, 작은 자가 위대한 자이다(Melvin). 모두가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로서 동등히 섬기고 동등히 대하여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분쟁이나 분열이 없도록 해야 한다.
21세기 미래사회의 교회에서는 목회자와 평신도의 동역(James Garlow)이 크게 기대될 것이다. 이전 세기에서는 교회가 거의 목회자의 역량에 크게 의존해 왔지만, 앞으로는 지도적인 목회자보다는 평신도의 활동에 의해 교회의 성장과 발전이 크게 좌우되리라고 예견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평신도의 인적-물적 자원들을 활용하고 평신도의 은사들을 개발하여 이들의 역량을 목회에 최대한도로 적용하는 새로운 목회-교회 구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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