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가 바라는 것
진지한 평신도에게 가려운 곳이란 바로 불완전하게 고용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만약 평신도가 불완전 고용 때문에 가려워하고 있다면, 목회자는 과잉 고용 때문에 가려워한다. 목회자는 설교자, 목회자, 상담자, 전도자, 행정 책임자 그리고 사무실 사환 등 [1인 교회 악단]이 되어 달라는 기대를 받고 있는 경우가 너무 많다.
구비 사역(equipping ministry)에는 단순히 주변의 일을 좀더 효율적으로 확산시키는 것 이상이 요구된다. 교회의 구조와 환경이 근본적으로 확산시키는 것 이상이 요구된다. 교회의구조와 환경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수세기에 걸친 잘못된 가르침과 반 해방적인 교회 환경으로 말미암아, 평신도들은 자신들의 역할이 목회자의 역할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평신도의 사역은 그것이 절실히 필요한 세상에서 더 중요하다. 한 번 더 말하거니와, 헬라어 '라오스'는 백성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따라서 목회자도 이 세상에서 평신도가 되는 것보다 높은 위치로 올라갈 수는 없다!
사람들은 이제 구비 사역의 관점으로 교회를 바라보기 시작하였으며, 점차 교회를 (분주한 운전 기사 한 명과 졸리운 승객 다수로 구성된) 버스로 보기보다는 (모든 지체가 활동적이며 필수적인) 몸으로 보기 시작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많은 훈련 과정, 비디오 테이프, 프로그램 그리고 지침서가 성도들을 구비시키는 데 사용되고 있다. 그 결과 교회의 성도로 만드는 것은 하나의 기술로 전락했다. 자신들의 신학 훈련을 이리저리 활용하면서 실험하는 목회자들은, 수도원 같은 신학교의 상아탑에서 자신들이 받았던 인식론적, 합리적 기술과 정보를 조금 희석하여 굶주린 성도들에게 먹인다.
그런데 그들은 떡 대신 돌을 주는 경우가 너무 많다. 때로 비전문 사역자(평신도)들은 자신들이 진짜 무슨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런 프로그램을 갈망하고 거기에 참여한다.
대부분의 기술 전수 과정에서, 교회는 훈련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진리가 간과되고 있다. 따라서 좀더 유기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평신도 사역(lay ministry)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목회자 혼자의 힘만으로는 혹은 평신도 혼자의 힘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목회자와 평신도는, 사역에서 서로 상대방의
'너'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상호 존경하는 가운데, 은혜로운 협동 작전을 펼쳐야 한다.
하나님은 전략적으로 평신도를 사회에 심어 두셨다. "평신도는 세상 속으로 매일 반복되어 비치는 하나님의 영상이다. 교회는 절대로 외진 구석에 세워진 건물일 수가 없다"( 핸드릭 크레머). 만약 성도들이 충분하게 양육을 받는다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넘쳐나면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신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뻗어갈 것이라고 가정하는 경우가 많다.
양육은 예수님의 선교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도록 평신도 지도자를 해방시킬 때 이루어진다. 즉 구비되어 사역에 참여할 때 양육은 그 부산물로 주어진다.
목회자와 평신도가 교회의 모든 잠재력을 세상에서 펼칠 최선의 길을 발견하기 위해 사랑으로 협력할 때, 그들은 우리보다 이 협동 작전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철저히 헌신하기 때문이다.
평신도란 성직자와 특별한 구별이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면 그리스도의 몸이다.』 구약에서도 보면 제사장이나 예언자나 일반 백성이나 모두 함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모두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하는 사상이 강한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성직자도 라오스(하나님의 백성), 평신도도 라오스(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 모두는 다같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제1계급, 제2계급으로 구별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사명도 같다. 책임도 같다. 목적도 같아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들만 교회의 목회를 수행하려고 해도 안되며, 평신도들 역시 목회를 목회자 한사람에게 맡겨버려서도 안된다. 물론 성직자는 교회안의 특정한 주요기능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고 이런 기능들 때문에 “안수”를 받은 것이다. 본질적인 구별은 없으나 기능상의 차이는 있다.
『소금의 직분을 하는 크리스쳔들』 이라는 책에서 저자 웨버(Hans-Ruedi Weber)는 “성직자는 다른 전문적인 교회 직원들과 함께 특수한 책임을 지고 있는데 이것은 평신도들을 그들의 목회를 위해 양육하고, 준비시키고, 도와주며, 또 계속 지탱해 나가도록 할 책임을 진다고”했다.
한스 큉의 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목사나 사제가 교회(ecclesia)를 향해 파송된 성직자라면 평신도는 세상을 향해 파송된 성직자이다.』 그렇다. 목회자와 평신도는 사명도 같고, 책임도 같고, 목적도 같다.
진지한 평신도에게 가려운 곳이란 바로 불완전하게 고용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만약 평신도가 불완전 고용 때문에 가려워하고 있다면, 목회자는 과잉 고용 때문에 가려워한다. 목회자는 설교자, 목회자, 상담자, 전도자, 행정 책임자 그리고 사무실 사환 등 [1인 교회 악단]이 되어 달라는 기대를 받고 있는 경우가 너무 많다.
구비 사역(equipping ministry)에는 단순히 주변의 일을 좀더 효율적으로 확산시키는 것 이상이 요구된다. 교회의 구조와 환경이 근본적으로 확산시키는 것 이상이 요구된다. 교회의구조와 환경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수세기에 걸친 잘못된 가르침과 반 해방적인 교회 환경으로 말미암아, 평신도들은 자신들의 역할이 목회자의 역할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평신도의 사역은 그것이 절실히 필요한 세상에서 더 중요하다. 한 번 더 말하거니와, 헬라어 '라오스'는 백성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따라서 목회자도 이 세상에서 평신도가 되는 것보다 높은 위치로 올라갈 수는 없다!
사람들은 이제 구비 사역의 관점으로 교회를 바라보기 시작하였으며, 점차 교회를 (분주한 운전 기사 한 명과 졸리운 승객 다수로 구성된) 버스로 보기보다는 (모든 지체가 활동적이며 필수적인) 몸으로 보기 시작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많은 훈련 과정, 비디오 테이프, 프로그램 그리고 지침서가 성도들을 구비시키는 데 사용되고 있다. 그 결과 교회의 성도로 만드는 것은 하나의 기술로 전락했다. 자신들의 신학 훈련을 이리저리 활용하면서 실험하는 목회자들은, 수도원 같은 신학교의 상아탑에서 자신들이 받았던 인식론적, 합리적 기술과 정보를 조금 희석하여 굶주린 성도들에게 먹인다.
그런데 그들은 떡 대신 돌을 주는 경우가 너무 많다. 때로 비전문 사역자(평신도)들은 자신들이 진짜 무슨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런 프로그램을 갈망하고 거기에 참여한다.
대부분의 기술 전수 과정에서, 교회는 훈련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진리가 간과되고 있다. 따라서 좀더 유기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평신도 사역(lay ministry)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목회자 혼자의 힘만으로는 혹은 평신도 혼자의 힘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목회자와 평신도는, 사역에서 서로 상대방의
'너'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상호 존경하는 가운데, 은혜로운 협동 작전을 펼쳐야 한다.
하나님은 전략적으로 평신도를 사회에 심어 두셨다. "평신도는 세상 속으로 매일 반복되어 비치는 하나님의 영상이다. 교회는 절대로 외진 구석에 세워진 건물일 수가 없다"( 핸드릭 크레머). 만약 성도들이 충분하게 양육을 받는다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넘쳐나면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신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뻗어갈 것이라고 가정하는 경우가 많다.
양육은 예수님의 선교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도록 평신도 지도자를 해방시킬 때 이루어진다. 즉 구비되어 사역에 참여할 때 양육은 그 부산물로 주어진다.
목회자와 평신도가 교회의 모든 잠재력을 세상에서 펼칠 최선의 길을 발견하기 위해 사랑으로 협력할 때, 그들은 우리보다 이 협동 작전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철저히 헌신하기 때문이다.
평신도란 성직자와 특별한 구별이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면 그리스도의 몸이다.』 구약에서도 보면 제사장이나 예언자나 일반 백성이나 모두 함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모두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하는 사상이 강한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성직자도 라오스(하나님의 백성), 평신도도 라오스(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 모두는 다같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제1계급, 제2계급으로 구별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사명도 같다. 책임도 같다. 목적도 같아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들만 교회의 목회를 수행하려고 해도 안되며, 평신도들 역시 목회를 목회자 한사람에게 맡겨버려서도 안된다. 물론 성직자는 교회안의 특정한 주요기능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고 이런 기능들 때문에 “안수”를 받은 것이다. 본질적인 구별은 없으나 기능상의 차이는 있다.
『소금의 직분을 하는 크리스쳔들』 이라는 책에서 저자 웨버(Hans-Ruedi Weber)는 “성직자는 다른 전문적인 교회 직원들과 함께 특수한 책임을 지고 있는데 이것은 평신도들을 그들의 목회를 위해 양육하고, 준비시키고, 도와주며, 또 계속 지탱해 나가도록 할 책임을 진다고”했다.
한스 큉의 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목사나 사제가 교회(ecclesia)를 향해 파송된 성직자라면 평신도는 세상을 향해 파송된 성직자이다.』 그렇다. 목회자와 평신도는 사명도 같고, 책임도 같고, 목적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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