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제자훈련

평신도에 대한 신학

가디우스 2007. 9. 6. 17:39
평신도에 대한 신학

"나는 신학자가 아닌데"라고 평신도는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측면에서 모든 믿는자들은 신학자들이다. "신학(theology)"이라는 말은 두 희랍어에서 왔다: 하나님을 의미하는 데오스(theos); 그리고 공부한다는 의미의 로기아(logia). 신학은 단순히 하나님을 공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더 알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신학자들이다. 물론 모든 면에서 아마추어 신학자들이지만- 그러나 아직 일종의 신학자들인 것이다. "예수님은 주님이다"와 같이 아주 단순한 고백도 신학적인 선언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주 실제적인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신학으로서 알려져 있는 과정 속에 포함되어있는 것이다

신학은 어떤 관심의 주제에 대해 넓은 범위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기독론(Christology)이란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연구이다. 구원론(Soteriology)은 구원에 대한 연구이다. 타락론(Hamartiology)은 죄의 교리를 담고 있다. 종말론(Escatalogy)은 마지막 때의 교회에 대한 교리이다. 교회론(Ecclesiology)은 교회에 대한 연구이다. 평신도목회는 마지막인 교회론에 포함되어있다.

우리가 하고있는 것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믿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 예를들어 우리가 키를 꼽고 돌리면 차에 시동이 걸린다는 것을 믿는다. 만약 페달을 밟으면 앞으로 가기 시작한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만약 우리가 이런 것들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평신도목회에서도 그런 것이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우리의 생각에 심는다면, 우리는 뭔가를 하기 원할 것이다.

이렇게 예를 들어보자: 만약 목사님이 사역이고 평신도는 사역자가 아니라고 우리가 믿는다면 평신도는 목회에 포함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반면에 만약 우리가 우리자신을 우리의 목사님과 함께 사역자로 인식한다면 우리는 사역에 포함될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에 대해 어떤 방법으로 응답할 것인지에 대한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평신도목회의 신학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만약 우리가 평신도 목회에 대한 분명한 신학을 가지고있다면, 우리는 평신도사역자들이 해야하는 것과 같은 것에서 응답하도록 해야할 것이다.

우리는 평신도를 위한(for) 신학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의(of) 신학 또는 평신도에 대한(about) 신학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평신도를 위한 신학이란 그것이 어떻든지 간에 단순히 어떤 종류의 신학적인 얘기에 불과하고 그것을 평신도 용어로 해석하는 역할만을 한다. 그것이 우리의 관심은 아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들이 나와있다. 우리의 관심은 단순히 평신도를 위해 입맛에 맞는 신학을 정립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관심은 다르다. 우리모두는 마음속에 평신도의 중요한 위치를 포함하는 신학을 가질 것을 확실히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단지 평신도를 위한 신학이 아니라 평신도의 또는 평신도에 대한 신학을 의미하는 것이다. 과거에 "신학"이라는 용어는 진부하게 들린다. 그것은 지루한 용어이기도하다. 우리는 이제 긍정적인 면에서 아주 흥분되는 평신도의 신학을 말하고자하는 것이다.

평신도목회의 신학이 포함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렇게 복잡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세가지 측면에서 접근해볼수있다. 물론 더 넓게 확대할수도 있겠지만 세가지를 한정지어 생각해보려는 것이다: 교회, 목회, 그리고 평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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