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의미
켄 메드나(Ken Medena)가 쓴 더 게더링(The gathering) 이라는 노래 제목으로 쓴 음악의 글귀를 보자:
교회가 교회일 때에 그것은 그의(His)사람들을 통한 그리스도의 임재보다도 많지도 적지도,
또는 그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은혜의 의미의 한 부분은 서로 다른 사람을 위해 우리안에 있는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제사장이 되도록 부름 받았다.
만약 우리가 교회라면, 내가 그리스도께 갈 수 있는 것처럼 내가 당신에게 갈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런 것처럼 당신은 나의 눈물, 나의 분노, 나의 죄를 이해할 것을 알고, 뭔가 그리스도는 당신의 눈으로서 볼 것이고, 당신의 손으로서 나를 터치하고, 당신의 사랑으로 나를 치료할
것을 믿는다.
만약 우리가 오늘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보기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그분의(His)대표자들이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이 시작하신 것을 계속하는 사람들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목회를 보기원한다면, 우리는 주위를 둘러보아야한다. 사실, 우리는 거울을 통해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계속되는 이런 목회를 행함에 있어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삶에 닿으려고 다가 갈때에 우리는 우리자신이 첫째 교회안에서 다가가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교제의 한 부분인 그들에게 특별하게 닿는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단지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서의 "제사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에 아주 알맞은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제사장"이고, 그리고 당신이 나에게 "제사장"이다. 우리는 서로가 제사장들로서 기능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목회를 계속하기를 시작할 때에 우리가 닿게되는 두 번째 방향이 있다. 우리는 단지 교회안에서 만 닿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세상속으로 닿게된다. 수년전에 유행가 가사가 이런것이 있었다: "어떤 다른 사람의 손에 닿아서 터치하라; 그리고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이 세상을 더 낫게 만들라." 내가 생각하기로 우리는 그런 말을 약간 바꾸면서 이렇게 할 수 있다고 본다: "어떤 다른 사람의 손에 닿아서 터치하라./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라- 예, 그분은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누가 닿는가? 우리가 한다. 그러나 그 삶에 실제로 누가 터치하는가? 그분이 한다. 그분이 우리를 통해서 터치한다.
영원하신 주님은 우리의 삶 속에 거하시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돌봄을 통하여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 안에 계신다. 그것이 바로 평신도목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삶 속에서 역사한다. 그것이 바로 로저 코페렌드(Roger Copeland)가 "당신의 이웃에게 다가가라"라는 제목의 노래말에서 쓴 것이다.
당신의 이웃에게 다가가서, 당신이 정말로 돌보는 것을 그로 하여금 알게하라.
그가 외로울 때에 다가가서, 누군가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그로 하여금 알게하라.
구름이 그의 앞을 가리울 때에 그의 어두움 안에 다가가라.
그와 함께 걷고, 그와 함께 말하라. 왜냐하면 그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기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는 모델은, 비록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적으로 보여질지라도 언제나 회중이 영향력이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이 약점은 평신도로 하여금 -세상에서든 교회에서든- 그들의 삶이나 교회의 선교에 있어 참여자이기보다는 방관자로 있게 한다. 이것은 교회가 축구경기처럼 되는 것과 같다. 운동장의 22명은 절대적으로 휴식이 필요하고, 스탠드에 있는 7만명은 절대적으로 운동이 필요한 것과 같다.
20세기말과 다음세기의 효과적인 회중을 위해서는 새로운 실질적인 축구경기가 요구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즉 평신도는 필드에서 선수로써 뛰어야겠고 목회자나 교회관계자는 코치로써 경계선(sideline)에 배치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순간, 평신도들은 자신에게 묻는다. 내가 사역팀과 함께 필드에서 뛰는 것이 적당하겠는지, 과연 나를 믿어주는지 그렇지 않은지... 나의 회중이 내가 흩어진 교회의 일원으로써 예수그리스도께 순종할 때 과연 나를 지지하는지를 말이다.
켄 메드나(Ken Medena)가 쓴 더 게더링(The gathering) 이라는 노래 제목으로 쓴 음악의 글귀를 보자:
교회가 교회일 때에 그것은 그의(His)사람들을 통한 그리스도의 임재보다도 많지도 적지도,
또는 그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은혜의 의미의 한 부분은 서로 다른 사람을 위해 우리안에 있는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제사장이 되도록 부름 받았다.
만약 우리가 교회라면, 내가 그리스도께 갈 수 있는 것처럼 내가 당신에게 갈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런 것처럼 당신은 나의 눈물, 나의 분노, 나의 죄를 이해할 것을 알고, 뭔가 그리스도는 당신의 눈으로서 볼 것이고, 당신의 손으로서 나를 터치하고, 당신의 사랑으로 나를 치료할
것을 믿는다.
만약 우리가 오늘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보기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그분의(His)대표자들이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이 시작하신 것을 계속하는 사람들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목회를 보기원한다면, 우리는 주위를 둘러보아야한다. 사실, 우리는 거울을 통해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계속되는 이런 목회를 행함에 있어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삶에 닿으려고 다가 갈때에 우리는 우리자신이 첫째 교회안에서 다가가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교제의 한 부분인 그들에게 특별하게 닿는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단지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서의 "제사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에 아주 알맞은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제사장"이고, 그리고 당신이 나에게 "제사장"이다. 우리는 서로가 제사장들로서 기능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목회를 계속하기를 시작할 때에 우리가 닿게되는 두 번째 방향이 있다. 우리는 단지 교회안에서 만 닿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세상속으로 닿게된다. 수년전에 유행가 가사가 이런것이 있었다: "어떤 다른 사람의 손에 닿아서 터치하라; 그리고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이 세상을 더 낫게 만들라." 내가 생각하기로 우리는 그런 말을 약간 바꾸면서 이렇게 할 수 있다고 본다: "어떤 다른 사람의 손에 닿아서 터치하라./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라- 예, 그분은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누가 닿는가? 우리가 한다. 그러나 그 삶에 실제로 누가 터치하는가? 그분이 한다. 그분이 우리를 통해서 터치한다.
영원하신 주님은 우리의 삶 속에 거하시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돌봄을 통하여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 안에 계신다. 그것이 바로 평신도목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삶 속에서 역사한다. 그것이 바로 로저 코페렌드(Roger Copeland)가 "당신의 이웃에게 다가가라"라는 제목의 노래말에서 쓴 것이다.
당신의 이웃에게 다가가서, 당신이 정말로 돌보는 것을 그로 하여금 알게하라.
그가 외로울 때에 다가가서, 누군가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그로 하여금 알게하라.
구름이 그의 앞을 가리울 때에 그의 어두움 안에 다가가라.
그와 함께 걷고, 그와 함께 말하라. 왜냐하면 그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기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는 모델은, 비록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적으로 보여질지라도 언제나 회중이 영향력이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이 약점은 평신도로 하여금 -세상에서든 교회에서든- 그들의 삶이나 교회의 선교에 있어 참여자이기보다는 방관자로 있게 한다. 이것은 교회가 축구경기처럼 되는 것과 같다. 운동장의 22명은 절대적으로 휴식이 필요하고, 스탠드에 있는 7만명은 절대적으로 운동이 필요한 것과 같다.
20세기말과 다음세기의 효과적인 회중을 위해서는 새로운 실질적인 축구경기가 요구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즉 평신도는 필드에서 선수로써 뛰어야겠고 목회자나 교회관계자는 코치로써 경계선(sideline)에 배치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순간, 평신도들은 자신에게 묻는다. 내가 사역팀과 함께 필드에서 뛰는 것이 적당하겠는지, 과연 나를 믿어주는지 그렇지 않은지... 나의 회중이 내가 흩어진 교회의 일원으로써 예수그리스도께 순종할 때 과연 나를 지지하는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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