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목회에서 우선권
목사들로서 우리는 평신도들이 어떤 사역들에 파송되기 이전에 우선권을 세우도록 그들을 도와줄 필요가 있다. 크리스챤으로서 우리 모두는 불균형적인 삶을 살아가지만 그것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기 쉽다. 단지 우선권을 수립하고 그런 우선권들의 측면에서 우리의 삶을 평가할 때만이 우리 자신을 알맞은 균형으로 유지하게 할 수 있다. 우리자신의 개인적인 영적 삶을 넘어서서 목회하는 평신도의 첫 번째 우선권은 가족이 되어야한다. 목사들로서 우리들 거의 대부분은 우리의 가족들이 첫 번째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는 있다. 그런데 비극은 그렇게는 말하지만 사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많은 목사들이 그들의 삶을 그들의 성도에게 주어서 그 자신의 가족들은 아주 소홀히 하는 경우를 듣게 된다. 목사들로서 우리 모두는 이점에서 유혹받기 쉽다. 문제는 간단하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사랑하며 우리의 회중을 목회하는 것을 즐긴다. 우리는 그들의 필요를 깊이 느끼고 그런 필요들에 응답하면서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사역의 한 가지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자신의 집에 거주하고 있는 한 회중을 잊게 된다. 그 회중은 우리의 배우자로 시작하여 우리의 자녀까지이다. 그리고 사역에 동참한 평신도들은 그들도 마찬가지로 이런식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떤 평신도 사역자들은 독신이다. 그래서 그들은 가족이 없기에 가족에 대한 헌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보여 진다. 그것은 어떤 부분에서는 사실이다. 확실히 어떤 독신자들은 가족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져서 그들의 사역들에 더 시간을 투자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혼한 우리들은 종종 잊어버리는 것이 있는데, 독신자들은 비록 배우자와 자녀들이 없긴 하지만 사실 그들도 자신의 가족타입(family-type)의 관계성들을 가지고 있다. 이런 관계성들은 마치 그들이 가족인 것처럼 기능한다. 이 사람들은 그들의 가족을 함유한다. 독신자들은 이런 관계성을 양육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독신으로서 자신의 복지안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독신자들을 사역에 동참되도록 격려할 때에 우리는 항상 그들에게 그들의 가족으로서 기능을 하는 사람들과 관계성을 개발시키는데 시간을 할애하라고 부탁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우선권은 직업, 더 정확히 말해서 천직이다. 천직의 정의는 단순히 어떤 이의 직업에서 하나님을 봉사하는 행동이다. 어떤 이의 직업은 단지 그의 머리위에 있는 지붕과 테이블의 음식을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회인 것이다. 만약 그것이 그런 경우라면 그것은 우리의 우선권들 중 상위에 놓아야 할 것이다. 평신도들은 결코 그들의 교회사역이 그들의 천직적인 사명에 대치된다고 느껴서는 결코 안 된다.
다른 우선권은 회복 또는 레크레이션이다. 우리 모두는 레크레이션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은 다양한 형태들이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은 취미나 활동, 운동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다른 것은 독서일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오후에 낮잠일수도. 어떤 경우이든지, 우리 모두는 신체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개인적인 회복을 위한 시간이 요구된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우리의 신체적 감정적 풍요로움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또 다른 우선권은 교회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다. 목사로서 우리는 그 사람의 가정이 정상적이고 천직적인 소명감이 분명하고 그리고 그가 신체적, 감정적 건강을 위한 지침을 귀중히 여길 때 그 사람을 훈련시키는 것이 정말 즐겁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또한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목사로서 우리가 그들의 삶의 다른 측면들에 대해 첫째로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그들이 알 때에 사역을 위한 초청에 더 긍정적으로 응답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그들의 삶의 다른 헌신들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그들을 모집하여 어떤 일을 하도록 그들에게 시도한다]는 것을 그들이 예상한다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 대신에 우리가 교회일 만이 그들 삶에서 단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는 것을 인지하며 그들에게 다가갈 때에 그때 마음을 연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은 그들이 우리를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높은 우선권으로 갈등을 겪는 목회 속으로 그들을 결코 밀어 넣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목사들로서 우리는 왜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사역에 동참되도록 요청할 때 "No" 라고 말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궁색한 이유로 "No"를 표현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과거에 가졌던 경험에서 안 좋은 것이 있었기에 "No"라고 대답한다. 오늘날 많은 평신도들이 목회에 동참되기를 거부하는데 왜냐하면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은사가 요구되는 목회에 임무부여 되는, 즉 잘못 맞춰진 것(mismatched)이다. 그들은 좌절하면서 그만둔다. 그들의 은사가 맞는 목회에 그들이 놓여졌다면 얼마나 성취가 있었을 것인가?
그러나 평신도가 목회에 동참하기 거절하는 주요이유는 과거에 그들이 맞지 않는 사역에 대해 "No"라고 말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그들은 곧 지나친 짐을 지게된 것이다. 엄청난 좌절 후에 종종 그들의 가족들을 소홀히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그래서 그들은 소진된 평신도들의 부류에 속하게 된다. 이런 좌절은 그들의 삶에서 알맞은 우선권을 유지하는 것을 배우기에 방해가 되어왔을 수도 있다.
목사들로서 우리는 평신도들이 어떤 사역들에 파송되기 이전에 우선권을 세우도록 그들을 도와줄 필요가 있다. 크리스챤으로서 우리 모두는 불균형적인 삶을 살아가지만 그것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기 쉽다. 단지 우선권을 수립하고 그런 우선권들의 측면에서 우리의 삶을 평가할 때만이 우리 자신을 알맞은 균형으로 유지하게 할 수 있다. 우리자신의 개인적인 영적 삶을 넘어서서 목회하는 평신도의 첫 번째 우선권은 가족이 되어야한다. 목사들로서 우리들 거의 대부분은 우리의 가족들이 첫 번째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는 있다. 그런데 비극은 그렇게는 말하지만 사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많은 목사들이 그들의 삶을 그들의 성도에게 주어서 그 자신의 가족들은 아주 소홀히 하는 경우를 듣게 된다. 목사들로서 우리 모두는 이점에서 유혹받기 쉽다. 문제는 간단하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사랑하며 우리의 회중을 목회하는 것을 즐긴다. 우리는 그들의 필요를 깊이 느끼고 그런 필요들에 응답하면서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사역의 한 가지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자신의 집에 거주하고 있는 한 회중을 잊게 된다. 그 회중은 우리의 배우자로 시작하여 우리의 자녀까지이다. 그리고 사역에 동참한 평신도들은 그들도 마찬가지로 이런식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떤 평신도 사역자들은 독신이다. 그래서 그들은 가족이 없기에 가족에 대한 헌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보여 진다. 그것은 어떤 부분에서는 사실이다. 확실히 어떤 독신자들은 가족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져서 그들의 사역들에 더 시간을 투자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혼한 우리들은 종종 잊어버리는 것이 있는데, 독신자들은 비록 배우자와 자녀들이 없긴 하지만 사실 그들도 자신의 가족타입(family-type)의 관계성들을 가지고 있다. 이런 관계성들은 마치 그들이 가족인 것처럼 기능한다. 이 사람들은 그들의 가족을 함유한다. 독신자들은 이런 관계성을 양육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독신으로서 자신의 복지안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독신자들을 사역에 동참되도록 격려할 때에 우리는 항상 그들에게 그들의 가족으로서 기능을 하는 사람들과 관계성을 개발시키는데 시간을 할애하라고 부탁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우선권은 직업, 더 정확히 말해서 천직이다. 천직의 정의는 단순히 어떤 이의 직업에서 하나님을 봉사하는 행동이다. 어떤 이의 직업은 단지 그의 머리위에 있는 지붕과 테이블의 음식을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회인 것이다. 만약 그것이 그런 경우라면 그것은 우리의 우선권들 중 상위에 놓아야 할 것이다. 평신도들은 결코 그들의 교회사역이 그들의 천직적인 사명에 대치된다고 느껴서는 결코 안 된다.
다른 우선권은 회복 또는 레크레이션이다. 우리 모두는 레크레이션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은 다양한 형태들이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은 취미나 활동, 운동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다른 것은 독서일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오후에 낮잠일수도. 어떤 경우이든지, 우리 모두는 신체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개인적인 회복을 위한 시간이 요구된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우리의 신체적 감정적 풍요로움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또 다른 우선권은 교회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다. 목사로서 우리는 그 사람의 가정이 정상적이고 천직적인 소명감이 분명하고 그리고 그가 신체적, 감정적 건강을 위한 지침을 귀중히 여길 때 그 사람을 훈련시키는 것이 정말 즐겁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또한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목사로서 우리가 그들의 삶의 다른 측면들에 대해 첫째로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그들이 알 때에 사역을 위한 초청에 더 긍정적으로 응답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그들의 삶의 다른 헌신들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그들을 모집하여 어떤 일을 하도록 그들에게 시도한다]는 것을 그들이 예상한다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 대신에 우리가 교회일 만이 그들 삶에서 단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는 것을 인지하며 그들에게 다가갈 때에 그때 마음을 연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은 그들이 우리를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높은 우선권으로 갈등을 겪는 목회 속으로 그들을 결코 밀어 넣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목사들로서 우리는 왜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사역에 동참되도록 요청할 때 "No" 라고 말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궁색한 이유로 "No"를 표현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과거에 가졌던 경험에서 안 좋은 것이 있었기에 "No"라고 대답한다. 오늘날 많은 평신도들이 목회에 동참되기를 거부하는데 왜냐하면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은사가 요구되는 목회에 임무부여 되는, 즉 잘못 맞춰진 것(mismatched)이다. 그들은 좌절하면서 그만둔다. 그들의 은사가 맞는 목회에 그들이 놓여졌다면 얼마나 성취가 있었을 것인가?
그러나 평신도가 목회에 동참하기 거절하는 주요이유는 과거에 그들이 맞지 않는 사역에 대해 "No"라고 말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그들은 곧 지나친 짐을 지게된 것이다. 엄청난 좌절 후에 종종 그들의 가족들을 소홀히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그래서 그들은 소진된 평신도들의 부류에 속하게 된다. 이런 좌절은 그들의 삶에서 알맞은 우선권을 유지하는 것을 배우기에 방해가 되어왔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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