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름과 보냄
부름을 받았다는(being called)것과 보냄을 받는(being sent)다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챨스레이크(Charles Lake)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에 의해 보냄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의 두 가지 다른 작용이다. 성서 속에 시종 일관적으로 사용된 “부름”이라는 단어는 “소환한 그 사람을 향해 부름 받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 희랍어로부터 왔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3중적인 측면에서 사용되었다: 구원으로 부름, 제자로 부름, 그리고 봉사에로 부름. “보냄”이라는 단어는 “어떤 사람으로서 파송되는 것인데 자격을 주어, 보내는 사람의 대표로서 행동하도록 하는 위임을 받고, 특정한 사명을 수행하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성서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부름은 어디론가 가는 것이 아니라(not to go somewhere), 그의 은혜에 의해서 어떤 사람이 되는 것(to be someone)이다. 우리의 방향이 지질학적인 위치로서 알려져 있는 그의 파송 안에 있는 것이다...........그는 우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기위해 그 자신에게로 불렀다. 그것이 바로 성서적인 원리이다.
우리는 믿는 자들로서 하나님이 제시하는 것과 같은 세상을 재 주장 하려고 세상속으로 보내졌다. 크리스챤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보내진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 라오스(laos)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이다. 헨리 크레머(Henry Kraemer)는 이렇게 말했다: “평신도신학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하나님이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해야한다.” 그 어느 누구도 한스웨비(Hans-Ruedi Weber)만큼 얘기한 사람이 없을 텐데, 그는 모든 크리스챤은 두가지 대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첫째,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그리스도에까지 대화가 필요하다. 둘째로 그리스도로부터 세상까지 대화가 필요하다. 개심이후에 우리는 교회의 세계속에 너무 몰입되어 세상의 세계속에 대해 잊어버리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아마도 오늘날 기독교교회에 가장 위협을 주는 것은 내적으로 성장(ingrown)하여, 그 자체와 그것의 필요에 너무 초점을 맞추어, 그것의 존재 속에 요청된 [목적]을 기억하기에 실패한다는 것이다.
평신도로서 당신은 우리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것을 넘어서 독특한 혜택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그것을 결코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기독교 평신도는 대부분의 목사들을 거부하는 세상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다른 말로 목사들이 할 수 없는 그런 방법에서 세상에 접촉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당신에게 분명하다. 당신은 괴로워하고 있을 때 동료로서 당신의 친구들에 의해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우리 목사들은 종종 반성도들(semi saints)처럼 보여지거나, 또는 적어도 우리는 받침(꽃병의)이나 축받이로 간주되기도 한다. 우리는 올라있는 것 같지만 사실 소외된 그룹으로서 간주된다. 평신도 사역자들로서 당신은 그런 장애물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평신도 목회는 단지 개인이 그 목회에 동참되는 것 보다 뭔가 더 큰 것의 부분으로서 보여질 때 더 효과적이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잘 설명하였다: 우리는 모두 몸의 부분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몸 안에서 세포들처럼 기능한다. 교회의 성서적 관점에 근거하고 있는 평신도 목회(Lay Ministry)는 그 자체를 몸의 한 부분으로서 본다. 평신도목회는 지원그룹이 각 평신도 사역자 주위에 세워질 때에 성공할 것이다. 파송그룹의 목적은 단지 보낼 뿐만 이아니라 평신도사역자를 격려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 그룹을 형상하느냐, 어떻게 기능하느냐는 그것이 존재하느냐 그리고 그것이 기능하느냐보다는 덜 중요하다.
확실히 지원그룹은 많은 방법에서 구성될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한 가지는 10-12명의 그룹을 만드는 것인데 모두 다 같은 영적은사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이 종종 만날 때 마다 그들은 그런 특별한 은사의 활용을 토론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은 다른 사역들을 가지고 있을테지만, 그들은 확실히 공동된 목표를 가질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한 일의 최상을 위해 그들의 은사의 활용을 극대화하는 것. 지원그룹을 구성하는 또 다른 방법은 동일한 사역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일학교교사는 교회 안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주일학교교사가 단지 이런 사역에서 기능을 하는 한사람으로서 자신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 교사가 몇몇의 다른 교사들과 좀더 자주 나누는 시간을 갖고, 믿음 안에서 서로 격려한다면 그 주일학교 교사는 얼마나 더 효율적이겠는가.
우리들교회안에 있는 평신도 사역자들은 그들의 사역들을 평가하기위해 적어도 한달에 한번은 모일 필요가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있는 어떤 어려움도 토론할 수 있다. 그들은 염려를 나눌수도있다. 그들은 그달에 사역을 하면서 즐겁고 신났던일들로 함께 웃을수가있다. 그들은 특정한 사역의 염려들에 대해 기도하며 함께 울수도 있다. 함께 모이는것의 목적은 평신도 사역자들로 하여금 그들은 그룹의 한부분이라는 것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그들은 신나는 팀에서 봉사한다. 목사들로서 우리는 종종 그룹으로 모여서 우리의 공동된 관심/염려들을 나눈다. 그런것들은 항상 우리들에게 있어서 상당히 격려가 되는 시간들이다. 왜 우리는 우리의 평신도사역자들에 대해 덜 기대해야 하는가?
부름을 받았다는(being called)것과 보냄을 받는(being sent)다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챨스레이크(Charles Lake)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에 의해 보냄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의 두 가지 다른 작용이다. 성서 속에 시종 일관적으로 사용된 “부름”이라는 단어는 “소환한 그 사람을 향해 부름 받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 희랍어로부터 왔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3중적인 측면에서 사용되었다: 구원으로 부름, 제자로 부름, 그리고 봉사에로 부름. “보냄”이라는 단어는 “어떤 사람으로서 파송되는 것인데 자격을 주어, 보내는 사람의 대표로서 행동하도록 하는 위임을 받고, 특정한 사명을 수행하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성서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부름은 어디론가 가는 것이 아니라(not to go somewhere), 그의 은혜에 의해서 어떤 사람이 되는 것(to be someone)이다. 우리의 방향이 지질학적인 위치로서 알려져 있는 그의 파송 안에 있는 것이다...........그는 우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기위해 그 자신에게로 불렀다. 그것이 바로 성서적인 원리이다.
우리는 믿는 자들로서 하나님이 제시하는 것과 같은 세상을 재 주장 하려고 세상속으로 보내졌다. 크리스챤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보내진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 라오스(laos)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이다. 헨리 크레머(Henry Kraemer)는 이렇게 말했다: “평신도신학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하나님이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해야한다.” 그 어느 누구도 한스웨비(Hans-Ruedi Weber)만큼 얘기한 사람이 없을 텐데, 그는 모든 크리스챤은 두가지 대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첫째,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그리스도에까지 대화가 필요하다. 둘째로 그리스도로부터 세상까지 대화가 필요하다. 개심이후에 우리는 교회의 세계속에 너무 몰입되어 세상의 세계속에 대해 잊어버리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아마도 오늘날 기독교교회에 가장 위협을 주는 것은 내적으로 성장(ingrown)하여, 그 자체와 그것의 필요에 너무 초점을 맞추어, 그것의 존재 속에 요청된 [목적]을 기억하기에 실패한다는 것이다.
평신도로서 당신은 우리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것을 넘어서 독특한 혜택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그것을 결코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기독교 평신도는 대부분의 목사들을 거부하는 세상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다른 말로 목사들이 할 수 없는 그런 방법에서 세상에 접촉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당신에게 분명하다. 당신은 괴로워하고 있을 때 동료로서 당신의 친구들에 의해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우리 목사들은 종종 반성도들(semi saints)처럼 보여지거나, 또는 적어도 우리는 받침(꽃병의)이나 축받이로 간주되기도 한다. 우리는 올라있는 것 같지만 사실 소외된 그룹으로서 간주된다. 평신도 사역자들로서 당신은 그런 장애물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평신도 목회는 단지 개인이 그 목회에 동참되는 것 보다 뭔가 더 큰 것의 부분으로서 보여질 때 더 효과적이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잘 설명하였다: 우리는 모두 몸의 부분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몸 안에서 세포들처럼 기능한다. 교회의 성서적 관점에 근거하고 있는 평신도 목회(Lay Ministry)는 그 자체를 몸의 한 부분으로서 본다. 평신도목회는 지원그룹이 각 평신도 사역자 주위에 세워질 때에 성공할 것이다. 파송그룹의 목적은 단지 보낼 뿐만 이아니라 평신도사역자를 격려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 그룹을 형상하느냐, 어떻게 기능하느냐는 그것이 존재하느냐 그리고 그것이 기능하느냐보다는 덜 중요하다.
확실히 지원그룹은 많은 방법에서 구성될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한 가지는 10-12명의 그룹을 만드는 것인데 모두 다 같은 영적은사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이 종종 만날 때 마다 그들은 그런 특별한 은사의 활용을 토론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은 다른 사역들을 가지고 있을테지만, 그들은 확실히 공동된 목표를 가질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한 일의 최상을 위해 그들의 은사의 활용을 극대화하는 것. 지원그룹을 구성하는 또 다른 방법은 동일한 사역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일학교교사는 교회 안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주일학교교사가 단지 이런 사역에서 기능을 하는 한사람으로서 자신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 교사가 몇몇의 다른 교사들과 좀더 자주 나누는 시간을 갖고, 믿음 안에서 서로 격려한다면 그 주일학교 교사는 얼마나 더 효율적이겠는가.
우리들교회안에 있는 평신도 사역자들은 그들의 사역들을 평가하기위해 적어도 한달에 한번은 모일 필요가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있는 어떤 어려움도 토론할 수 있다. 그들은 염려를 나눌수도있다. 그들은 그달에 사역을 하면서 즐겁고 신났던일들로 함께 웃을수가있다. 그들은 특정한 사역의 염려들에 대해 기도하며 함께 울수도 있다. 함께 모이는것의 목적은 평신도 사역자들로 하여금 그들은 그룹의 한부분이라는 것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그들은 신나는 팀에서 봉사한다. 목사들로서 우리는 종종 그룹으로 모여서 우리의 공동된 관심/염려들을 나눈다. 그런것들은 항상 우리들에게 있어서 상당히 격려가 되는 시간들이다. 왜 우리는 우리의 평신도사역자들에 대해 덜 기대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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