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강 교회론
1) 목회자의 교회론은 목회 방향을 설정한다
목회자는 날마다 교회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의 목회방향이 결정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교회를 예배당이라는 장소개념으로만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항상 예배를 인도하는 일에 비중을 가장 크게 두느 ㄴ목회자가 될 거싱다. 교회는 상처 입은 자들이 모여 친교하는 곳이다 이런식으로 교회를 생각한다면 그의 목회가 어떠한 면을 강조하게 될지는 물으나마나 한 일이다.
평신도를 제자화하는 일은 어떤 일시적인 신학 사조나 방법이 아니라 성경 말씀이 보여주는 교회의 본질과 그 소명에 일치하는 근본적인 과제로 이해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그러므로 교회가 무엇이며 왜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어떠한 해답을 얻느냐에 따라 위의 목회철학이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 목회철학은 목회방법을 결정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목회철학이란 다음 아닌 목회자 자신의 교회론에서 나온 목회신념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목회중심이라고 확신하는 것을 붙들고 다녀야 한다. 좋은 것이 여기 있으면 여기 오고, 저기 있으면 저기가면 안된다. 목회중심의 주제를 정하고, 확신하고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움직이라 한 우물만 파야 한다. 시대적인 흐름에 따른 여러 세미나에만 들어가는 목회자는 실패한다. 확신이 목회철학이다.
모든 교회는 무엇인가에 의해 움직인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인도하는 힘과 조절하는 과정과 이끌어가는 확신이 작용한다. 어쩌면 이것들은 이야기되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것들인 지도 모른다. 이것들이 공식적으로 투표된 적은 아마 한번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분명히 존재하며 교회 생활의 모든 면에 영향을 끼친다. 이것이 교회를 움직이는 추진력이다. 이것이 목회철학이다. - 릭워렌
목회는 부름받고, 특권만 가르치는 것은 반쪽 목회이다. 이것을 근거로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 곧 소명을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목회이다. 성도를 세울 때 그것이 교회이다. 예배만 드리고 돌아가는 성도들을 보고 안심할 수 없다. 은혜받기만 하고 돌아가는 성도들을 보고 안심할 수 없다. 그들은 흩어질 때 예수님의 제자로 흩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흩어질 때 소명자로 흩어지지 않는다. 전도, 사회책임, 봉사들을 가르쳐야 한다.
지상에 교회를 남겨 놓으신 이유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 믿은 우리를 통해서 남은 하나님의 뜻을 이땅에 펴시기 위해서였다. 예배를 보면서, 성도들을 보면서 생각하는 목표가 틀리다.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성도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어떻게 만드느냐에 모든 초점이 담겨 있다.
내가 왜 이 목회를 하고 있느냐 물음에 답할 수 있는 목회철학이 있어야 한다. 뿌리가 있어야 한다. 우리 한국 목회자들은 고등학교 때만 공부하고 대학 4년동안 놀다오는 그런 자세가 우리 목회자들에게 스며들어 있다. 연구를 하지 않는다. 내 영혼에 뿌리가 될 만한 공부를 하지 않는다. 영혼이 약하다. 질이 약하다.
“대전 반석위에 세운 교회” 김진수목사 기장측이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에서 대표회장을 옥목사가 하고 있다. 기장과 합동과 모두 들어와 있다. 서로 친하다. 고신, 기장 모두 들어와 있다. 수련회에 김진수목사가 참석해서 간증을 했다. 목회가 안되어서 교회를 키울수가 없어서 평신도를 깨운다를 5번을 연속으로 읽었다. 그리고 나서 무엇인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세미나는 안갔지만 제자훈련을 시작했다. 지금 제자훈련을 통해서 교회당 지으고 10년동안 씨름하고 교회가 달라졌다.
나의 목회철학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나서 방법론이란 집을 지어야 한다.
2)목회철학에서 전략과 방법이 나온다.
1. 목회철학(뿌리) - 교회론에서 나온다. 나의 확신, 비전이다.
2. 목회전략(나무) - 제자도, 목요일 오전 내내 옥목사와 씨름 할 것이다. 목회를 어떤 표준에 맞추어서 이끌어갈 수 있느냐가 전략이다. 목표를 짜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가르쳐준 제자도에서 나온다.
3. 목회방법(가지) - 이것이 제자훈련이다.
4. 목회현장(열매) - 제자들, 교회를 세우는 제자들이 나온다.
여기에서 몇가지에 자기 소신을 피력할 수 있는가? 없을 것이다.
나의 나름대로의 대답을 할 줄 알아야 한다.
3) 교회론의 핵심 2가지
1. 평신도가 교회의 주체다. -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2. 평신도가 소명자다. - 평신도를 무리체로 놔두면 안된다. 이것은 목회자의 직무유기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목회자의 90%가 평신도를 손님, 심부름꾼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것이 교회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목회자의 90%가 평신도를 똑같은 사역자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 평신도가 소명자란 확신이 없는데 뭘 가르치겠는가? 어떻게 드라이브를 할 것인가? 어떤 요구를 할 것인가?
로이드존스가 말했다. “내가 항상 진지하게 생각하고 반성한 것은 내가 나중에 심판대 앞에 서는 것입니다.” 교회에 침체가 어디있는가? 만약 제자훈련에 목메었으면 침체, 불경기 없다. 아직도 주님은 은혜의 문을 열어두고 계시다. 목사들이 침체하게 만들었지 침체기가 와서 침체된 것이 아니었다.
20세기 전까지 교회론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와서 WCC에서 교회론을 들고 왔다. “20세기는 교회론의 시대가 될 것입니다.” 80년대 후반을 넘어서서 한국에서도 교회론이 많이 등장했다. 교회론이 20세기의 핫 이슈였다.
왜 20세기에서 주목이 되었을까? WCC, 에큐메니컬이 많은 노력을 했다. WCC도 처음에는 너무나 훌륭했다. 존스토트도 헌신적인 활동했지만 그 후에 변질되어서, 해방신학,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고 껍데기만 남았다. 이들 때문에 교회론의 인식이 바뀌었다.
에큐메니컬의 20세기 초반에 에큐메니컬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적인 석학이고, 교단마다의 실세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뻐하시지 않으셨는지 비슷한 시간에 파라처치 운동이 일어났다. 교회 밖의 선교단체들이 일어났다. 빌브라이트가 CCC 할때 사업가였다. 네비게이토의 도슨은 고등학교 졸업장만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일어났다. 그들은 평신도들이었다.
빌헐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 번째 종교 개혁이 성직자의 손에 독점적으로 남아 있던 하나님의 말씀을 교인들의 손에 넘겨 준 것이라면, 두 번째의 개혁은 성직자의 손에 독점적으로 남아 있는 사역을 빼앗아 교인들의 손에 넘겨 주는 것이다. ”
또한 평깨72페이지를 읽으라.
4) 살전 1장 1절에 담겨 있는 교회론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1.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는 교회 - 세상 모임 특히 정치 모임과 다르다. 교회의 공동체는 세상에서 모인공동체와 다르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회를 존재케 하시는 이고, 시작하셨고, 하나님이 교회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2.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 - 이것은 유대인의 회당과 구별된 것을 말한다. 회당에서 야훼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없다. 그래서 회당과 구별된다.
3. 데살로니가 지역 안에 있는 교회이다. 따라서 에클레시아는 통합적 의미는 없다. 교단을 묶어서 교회라고 말하는 것은 없다. 신약성경에 나와 있는 교회는 모두 지역교회이다.
따라서 지역교회 그 자체가 완전하다. 지역공동체가 아무리 작다하더라도 전 공동체를 대표하고 있다. 하나의 조각이 아니다. 구분이 아니다. 비교의식을 할 필요가 없다. 두 세명이 모인 교회가 완전한 교회이다. 전체가 각 지역 교회에서 각각 발견된다. 우리 교회에 오면 하나님의 교회를 모두 볼 수 있다고 하는 자부심을 가져야 제자훈련을 할 수 있다.
칼슈미트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개별적인 회중의 총합이 전 공동체나 교회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지역교회 자체 하나가 하나님의 교회이다. 지역교회가 여러개가 모여서 하나님의 교회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교권적인 생각하지마라. 교세 자랑하지마라. 성경적인 교회는 노회의 교회, 교단의 교회가 없다. 예루살렘이면 예루살렘교회, 에베소 교회면 에베소 교회였다. 가시적, 비가시적만 나눌 뿐이지 교회를 말할 때는 항상 지역교회였다.
목회자의 양심은 한 사람의 생명에 있다. 숫자의 탐을 내지 않는다. 비교의식도 없다. 책임지고 가르친다. 그들을 다시 재생산한다. 다른 교회는 부흥회 할 때 7-8명 놓고 2-3시간 가르쳤다. 바로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
평신도란 말의 의미는 라오스이다. 이것은 백성, 백성의 무리로 이방인과 구별되는 새 이스라엘 교회 내의 특정 그룹이 아니다.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평신도이다. 키프리아누스는 그러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신자와 전문 교역자를 구별하기 위해서 성직자를 썼다. 그래서 평신도와 성직자가 구별이 된 것이다. 그러나 평신도는 구원을 받은 모든 사람들을 말한다.
중요한 일에 소외된 오늘의 평신도 - 평신도가 효율적이고 능동적이고 건설적인 교회의 일원이 되어 주기를 기대하는 바른 이유는 하나님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뜻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존 스토트)
5) 교회란 무엇인가
1. 택자의 모임이다.
2. 그리스도의 몸이다.
3. 그리스도의 전이다.
그러나 이 세가지를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 교회의 주체는 교역자가 아니라 평신도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재산이 아니다. 섬기는데서 나온다. 거기서 권위가 나온다. 평신도를 섬기고 그들에게 권위를 이임한다고 해서 어떤 평신도도 목회자를 업신여기고 존경하지 않는 평신도는 없다.
가) 택자의 모임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 고전1:2 - 택자의 모임..
세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1.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이는 회중
2. 일정한 장소와 시간에 모여 주어진 목적을 위해 신앙의 교제를 나누는 공동체
3. 모든 신자를 다 망라하는 전(Whole)교회적인 공동체
평신도와 교역자를 구별할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는가? 근거가 있는가? 택자의 모임에 계급이 있는가? 없다. 다만 구원받은 성도만 있을 뿐이다. 이 사실을 간과한다. 남녀노소 없고, 교역자 / 평신도 없다. 만약 있다면 그 교회는 로마 카톨릭적인 교회이다.
합동측 총회에서 목사 가운 입는 것에 대한 의견이 나왔다. 가운은 반드시 착용하고, 후드는 쓰지 않는다. 줄을 쳐도 두개이상 치지 않는다. 이렇게 말했다. 총회장이 말하기를 칼빈은 성의를 찢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거기에 오만가지 마귀가 있다고 했다고 가운 입는 것 찬성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가운에는 특권의식이 있다. 구별된 것을 말한다. 옥목사는 가운입은 목사님이 달나라에서 온 사람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교역자는 직분의 권위지 신분의 권위가 아니다.
나) 그리스도의 몸
고전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10:16-17/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팜예함이 아니야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우리는 성만찬할 때 우리는 서로 하나라는 것을 안다. 거기에는 성도의 관계에서 수직이 없다.
여기에 두가지 관계성이 있다.
A) 수직적인 관계,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와 계속적인 연합관계(엡4:15-16)
목사는 그리스도의 교회 지체 중에서 어느 부위인가? 목인가? 아니다. 정답은 그저 “지체중에 하나”이다.
우리는 직분의 권위만 있다. 내가 나를 위해서 양떼를 이용하는 것이다. 특별한 소명도 아니다. 성도나, 교역자나 그 소명은 똑같다. 제자훈련을 못하는 이유는 평신도의 중요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B) 지체끼리의 연합관계(고전12:12. 25-26)
결론은...교역자와 평신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다) 성령의 전
1. 고전 3:16
고전 6:19
딤후 1:14
2. 몇가지 특성
@교회는 그 자체를 충만케하는 성령의 도구요 일이요 증거이다.
@교회는 성령이 내주하시는 전으로서 날마다 창조되고 새롭게 만들어진다.
3. 결론: 성령의 사람은 모두 다 평등하다.
권위주의가 한국교회 전체를 멍들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교역자의 권위를 평신도에게 이임하라. 그렇다고 교역자의 권위가 실추되는 것은 아니다.
삼중적인 지상 교회의 존재이유
1. 하나님을 위하여: 예배(엡1:6,12,14)
2. 세상을 위해: 증거
3. 교회를 위해: 훈련 (평깨 104쪽 참조하라)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가? 세계에서 예배할 수 있는 것은 공동체 밖에 없다.
그런데 신약성경에는 명확한 예배의 정의가 보이지 않는다. 예수님은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말씀하셨지만 어떤 패턴을 가지고 예배해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치신 적이 없다.
사도바울도 예배를 정확히 하지 않고, 너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만 추상적으로 말했다. 매우 포괄적으로 말했다. 구체적이지 않다. 스타일이 아니다. 성경이 예배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사역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을 믿은 사람들이었다. 하나님 되신 분을 모시고 다닌 사람이다. 그런데 제자들의 예배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는 것인가?
예배를 너무 좁은 시각으로 봐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은 예배가 아니라고 보는 것도 안된다.
어떤 형태에 고착되지 마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곳에도 예배가 있다. 말씀을 나누는 데에도 예배가 있다. 직장에 나가서 직장에 충성하는 이유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인 것도 예배이다. 그런데 좋은 예배자는 만들어지는 것이지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제자훈련의 강점은 좋은 예배자를 만드는 데 있다. 좋은 예배자를 만들기 위해서 제자훈련해야 한다. 예배가 예배답도록 하기 위해서는 성도를 가르쳐야 한다.
제자훈련을 하는 곳을 탐방하면 예배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배는 목사가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드리는 것이다. 목사는 예배를 위한 봉사자이다.
전도를 교회부흥의 수단으로 여기면 안된다. 부흥은 결과이다. 이것이 수단과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왜 전도하는가? 예수님이 부르셨기 때문이다. 교회가 움직이면 10년만에 30명에서 500명이 되었다. 이것은 소명자로 살도록 가르쳤기 때문이다.
설교에는 가르치는 요소는 있지만 교훈적인 요소는 있지만 설교가 모두 성도를 가르치지는 못한다. 감동을 줄수는 있지만 사람은 변화시키지 못한다. 진짜 인격의 바닥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제자훈련 받으면서 변화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사람을 바꾸어 버린다. 이것이 병행하면서 설교가 살아나야 한다.
평깨104쪽 참조하라.
1. 하나님을 위한 예배,
2. 세상을 위한 증거
3. 교회 자체를 위한 훈련
이 모든 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제자훈련이다.
목회자의 사역의 열매를 이야기 하려면 설교가 아니다 성도들의 삶의 변화이다.
'신앙 > 제자훈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1강 사랑의교회 현장분석 (0) | 2007.09.06 |
---|---|
제 2강 광인론 (0) | 2007.09.06 |
제 4강 교회론 B (0) | 2007.09.06 |
제 5강 교회론 C (0) | 2007.09.06 |
제 6강 소그룹 환경과 성격 (0) | 2007.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