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제자훈련

[스크랩] 영적 우정에 관하여 - 영적 멘토링(IVP)

가디우스 2007. 9. 30. 23:10

우정은 이생과 내생에서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또 다른 자아를 가진 것 같이 당신의 실패를고백하며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사람,

당신의 영적 생활 가운데 얼마나 진전이 있었는지를 얼굴 붉히지 않고 알릴 수 있는 사람,

마음의 모든 비밀을 맡길 수 있고 당신의 모든 계획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이요 안전함이여 기쁨인가!

그러므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하나의 정신으로 묶여지고 둘이 하나를 이루어,

자랑하게 될까봐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의심이 생길까봐 걱정할 필요도 없으며,

상대방을 바로잡아 주면서 상처받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상대방이 칭찬을 해도 그것이 아첨이라는 비판이 찾아들지 않는다면

이보다 즐거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현자가 말하기를 "친구는 인생의 묘약이다"라고 했다.

따라서 우정은 번영의 기쁨을 고조시키고, 역경을 나누어 짐으로써 슬픔을 반감시킨다.

이 때문에 인생에서 가장 좋은 약을 친구라 했다.

심지어 철학자들도 이런 생각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우리들이 많은 경우에 사용하는 것은 물도, 태양도, 불도 아니고 바로 친구들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에 담겨 있는 모든 행동 속에 확실성 가운데

의심 속에서 어떤 종류의 사건이나 행운이든지,

개인적으로 또 사람들 앞에서, 모든 생각 가운데,

고향에서든, 외국에서든, 어디에서든,

우정은 감사의 제목이요, 친구는 필요 조건이고, 친구의 섬김은 유용한 것이다.

 

위의 글은 12세기 수사인 앨리드의 <영적 우정>이라는 글의 내용이다.

신뢰와 친밀감을 개발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이 같은 신뢰와 친밀감을 얻기 위해 다음의 네 단계를 거쳐야 한다.

 

선택

사랑은 밖으로 분명히 표현되는 선의, 애정, 그리고 내적인 기쁨으로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안정감은 두려움과 의심 없이 모든 의도와 비밀을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

행복은 기뻤든지 슬펐든지 해로웠든지 유용했든지 상관없이

일어난 모든 사건들과 가르치고 배운 것들을 다정하게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관찰

친구에게서 반드시 검증해야만 하는 네 가지 자질이 있다.

곧 당신 자신을 그에게 안심하고 맡길 수 있도록 만드는 충성, 바른 의도, 신중함 그리고 인내심이다.

바른 의도는 그가 하나님과 우정에서 자연히 얻어지는 유익 외에는

당신과의 우정에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신중함은 그가 친구를 위해서 할 일이 무엇이고,

친구에게서 추구할 것이 무엇이며,

친구를 위해 견딜 고난이 무엇이고,

그가 어떤 선행으로 칭찬받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친구를 바로잡아야 할 때가 있음을 알기에,

이 친구가 해결해야 할 문제점을 반드시 알고 언제, 어떤 방식으로

어떤 장소에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아는 것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인내는 그가 책망받을 때 낙심하거나 책망하는 사람을 무시하지 않으며

친구를 위해 기꺼이 역경을 견뎌내는 것을 뜻한다.

 

수용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모든 애정을 갖고 포용한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우정이라는 비밀스런 관계에 돌입하지는 않는다.

우정에는 특별히 우리의 모든 비밀과 계획들을 드러내는 것이 포함된다.

성 암브로스는

  "그는 우리가 따를 우정을 위한 공식을 제공하였다. 즉 친구의 뜻대로 행하고

   우리 마음에 자리잡은 어떤 비밀이라도 드러내고 그의 신뢰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함께 마음을 벌거벗겨 그에게 드러내고 그 역시 그의 마음을 우리에게 나타내도록 하자.

   왜냐하면 친구들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진실하다면 주 예수님이 그분의 아버지의 신비들을 쏟아 부으셨듯이

   그도 자신의 영혼을 쏟아 부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도 우리의 영혼을 발가벗겨 속 마음을 쏟아내는 것이 경솔한 행동이 될 만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의 나이와 감성과 분별력은 이 같은 드러냄을 감당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조화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친구의 성향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그에게 동화되며 적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친구가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졌을 때 도와야 하듯이

그가 영적인 시험 중에 있을 때에는 더욱 신속히 원군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서로를 위해 슬퍼하며, 서로의 짐들을 지기 위해 서로서로 수고하며,

각자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자신의 뜻보다 상대방의 뜻을 선호하고

자신의 필요보다는 상대방의 필요를 위해 수고하고

역경에 대항하며 자신을 역경에 드러내는 것은 얼마나 유익한 일인가!

그러면서 친구들이 서로 대화하며 서로 자신의 관심사를 드러내며

모든 일을 함께 살피고 모든 것에 뜻을 같이 하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이에 더하여 서로를 위한 기도가 있다.

이 기도는 친구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며 두려운 마음이나 애정에서 우러나오는

혹은 슬픔으로 인해 솟구치는 눈물과 함께

하나님께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려지는 기도이기에 더욱 효과적인 것이다.

 

앨리드는 우정이 영적 인도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는 영적 인도가 친구를 위한 우정어린 사랑 없이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지는 않다. 오늘날 우정이란 단어는 훨씬 더 가볍게 사용되고 있다. 친구란 우리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 혹은 사무실로 가는 길에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는 사람들일 수도있다. 그들은 우리가 복도 건너편이나 식료품점에서만 보는 그저 안면 있는 사람이거나 이웃일 수 있다. 그러나 앨리드에게 친구란 사랑하고 돌볼 사람이며 믿음과 사역 가운데 함께 자라가고 싶은 사람이었다.  

 

저는 우정에 관한 이 이야기들을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15:15)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과의 우정에 적용해 보았습니다.

 

가장 확실한 우정을 보여주신 예수님.

그분은 내가 가장 슬플 때도, 폭풍 한가운데서 두려워 할 때도 내 곁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잘못을 저질렀을 때 책망대신에 "그러지마라"라고 타이르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알아들을 만큼씩 그분의 뜻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분은 나를 강압하지 않으시고 어리석다고 무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자신감이 없어서 위축되어 있을 때 "너는 내가 만들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들, 가족들조차 떠날 때에도 묵묵히 곁에 계셨습니다.

자책감에 빠져서 울고 있을 때에 "내가 너를 용서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정(필레오)이 어떤 것인지 배워왔습니다.

그런데도 그 우정을 사람들에게는 잘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할 때 무시하고,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마음으로 비난하며,

심지어는 조롱하기까지 했습니다.

내게 이익을 줄 때는 곁에 있지만 나를 힘들게 할 때는 멀리 떨어져 있기도 했습니다.

경멸의 눈빛, 쌀쌀 맞은 태도, 비웃음, 그런 것들이 우정을 대신하였습니다.

주님은 내게 그런적이 없으셨는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이런 우정을 갈망합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의 사랑을 맛보아야만 믿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우정어린 친구가 없다고 불평하기 전에 

이런 친구가 되지 못하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되기를 그처럼 원하신 예수님의 기도처럼(요17장)

이제 그사랑의 다른 이름인 우정을 이웃들과 쌓기를 원합니다.   

 

출처 : 빛가운데 행하라
글쓴이 : miji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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