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양육/신앙안에서 자녀교육

자녀교육은 모델링입니다.

가디우스 2007. 9. 12. 13:40

2007년 5월 6일 주일설교

본문: 엡6:4

제목: 자녀교육은 모델링입니다.


  2007년 어린이 주일을 맞이해서 여러분의 가정에 소망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집안에 노인이 있다는 것은 가정에 뿌리가 있기 때문에 감사한 일입니다. 집안에 어린이가 있다는 것은 가정에 희망이 있기 때문에 감사한 일입니다. 뿌리가 있으면 가정이 든든합니다. 희망이 있으면 가정에 새로운 기쁨과 가능성으로 가득 채움을 받습니다. 부모가 되신 교우 여러분, 앞으로 부모가 될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훌륭한 부모가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그런데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시골 어느 농부의 집에서 암소가 송아지 쌍둥이를 낳았어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여보!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요. 그러니 이 중 한 마리는 하나님께 바칩시다!”라고 약속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송아지도 무럭무럭 자랐어요. 그러던 어느 날 새끼 송아지 두 마리 중에 한 마리가 갑자기 죽었어요. 그 농부는 근심에 잠긴 채 아내에게 말했어요.

  “여보, 송아지 두 마리 가운데 한 마리가 죽었소! 그런데 그만 하나님의 소가 죽고 말았구려!” 자기에게 손해가 생겼다고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약속했던 것까지 변심한 이 농부가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하고 생각해 봅니다. 믿음이 좋은 농부였다면 죽은 송아지는 내 송아지고 살아있는 송아지는 하나님의 송아지였을 거예요.


  신앙인의 자녀교육은 무엇인가요? 쌍둥이 송아지가 태어나서 기뻐했고요. 그 한 마리 송아지를 기쁨으로 하나님께 드렸어요. 그런데 갑자기 송아지 한 마리가 죽었다면 그 살아있는 송아지를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을 부모가 자녀에게 보인다면 그것이 올바른 자녀교육입니다.

  어려움이 닥쳐왔을 때 부모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 기도한다면 그 모습을 자녀들이 지켜본다면 이것이 자녀교육입니다. 힘든 시간이 지나갈 때에 불평하지 않고 진정으로 감사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것이 바람직한 자녀교육입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고 힘든 일이 계속되지만 낙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기도하면서 최선을 애씀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을 부모가 자녀에게 보여준다면 이것이 훌륭한 자녀교육입니다.

  훌륭한 자녀교육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위해서 먼저 부모들이 꿈을 꾸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꿈이 있는 민족은 망하지 않아요. 꿈이 있는 가정은 망하지 않아요. 부모가 꿈을 꾸면 자녀들이 꿈을 꿉니다. 바울사도는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꿈이었어요. 여러분의 꿈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내 자녀를 훌륭한 믿음의 자녀로 키우겠어요. 이것이 우리의 꿈입니다. 아멘.

  오늘은 어린이 주일을 맞이해서 올바른 자녀교육에 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첫째로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이 자녀교육의 원칙입니다. 원칙을 떠나면 반칙을 하게 됩니다. 반칙을 자주 반복하면 경기장에서 퇴장합니다. 자녀에게 함부로 화를 내는 부모는 부모의 자격을 상실합니다. 이 말은 함부로 자녀들 앞에 화를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함부로 화를 내는 사람을 종종 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화의 효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약자에게 화를 함부로 내는 사람은 이것이 습관화되면 누구에게나 화를 냅니다. 이런 사람이 강자를 만나면 화를 내지 못합니다. 이 때 화는 원망과 불평으로 나타납니다. 계속되는 화냄은 그 사람의 인격을 망가뜨리고 대인관계에 파열음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한 인생의 불행의 시작입니다. 본인뿐만 아니라 자녀들의 인격도 망가뜨립니다.

  너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이것은 자녀교육의 핵심입니다. 부모가 함부로 화를 내면 자녀를 노엽게 합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루었던 것처럼   부모도 사랑으로 자녀를 다루어야 합니다. 꿈나무인 어린이들은 사랑을 먹고 자라야 합니다. 화를 먹고 자랄 수는 없어요. 골로새서 3;21절을 함께 읽습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찌니 낙심할까 함이라 자녀를 분노하게 하면 자녀를 낙심시킵니다. 삼상 20장을 보면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 하기 때문에 다윗이 도망하도록 도와주었는데 사울왕은 요나단을 죽이려고 단창을 던집니다. 아버지의 분노로 아들이 낙심하게 되었어요. 가끔 부모가 자녀들을 차별 대우 할 때가 있어요. 그러면 차별대우를 받는 자녀가 낙심케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권면할 때가 있어요. 그러나 노엽게 해서는 안 됩니다.  


  분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노하기를 더디 해야 합니다. 분한 마음을 오래 품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시킵니다. 분노가 왜 일어납니까? 속임수를 당할 때에 분노가 일어납니다. 에서는 동생 야곱에게 장자권과 축복권을 빼앗기고 분노합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했을 때에 야곱의 형제들은 분노합니다. 민수기 31장을 보면 이스라엘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므로 모세가 분노합니다. 왕하 5장을 보면 아람나라 군대장관 나만을 선지자 엘리사가 환영하지 않았을 때 나만은 분노합니다. 이렇게 보면 분노는 정당할 수도 있고 부당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분명한 것은 분노에 대한 반응을 파괴적으로 하면 큰 갈등을 일으킵니다. 여동생이 강간을 당하니까 야곱의 남자형제들은 분노를 가지고 복수합니다. 남자들을 모두 죽여 버립니다. 큰 갈등이 일어납니다. 나만은 환영하지 않는 엘리사를 보고 화가 났지만 주변 사람들이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도록 권면합니다. 그래서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고 문둥병이 온전하게 치유를 받습니다. 분노의 반대는 온유입니다. 온유한 인격이 될 때에 분노를 이깁니다. 나만은 온유한 사람이 되어 분노를 이깁니다. 아멘.

   예수님의 제자들 12명 중에 수제자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베드로는 과격한 사람입니다. 혈기가 많은 사람입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별명이 우뢰의 아들입니다. 우뢰는 천둥입니다. 비가 올 때에 벼락이 치면서 천둥소리가 들립니다. 그런데 이 세 제자가 놀랍게 변화됩니다. 베드로전서와 후서를 베드로 사도가 기록합니다. 베드로사도는 벧전2:11절에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벧후1:5-7절에 말씀합니다. “너희가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과격한 베드로의 성품이 온유한 성품으로 바뀝니다.

  우뢰의 아들이었던 야고보와 요한도 놀랍게 바뀝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첫 번째 순교자가 됩니다. 요한은 가장 늦게까지 생존한 제자인데 요한복음과 요한일,이, 삼서와 요한 계시록을 기록합니다. 요한일서 4장 7-8절을 함께 읽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과 야고보는 어떤 사람인가요?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툼을 벌였어요. 선교여행을 할 때에 환영하지 않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하늘에서 벌을 내려 죽이자고 했을 정도로 과격했어요. 그런데 사랑의 사도로 바뀌었어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되면 변합니다. 분노하는 마음이 온유한 마음으로 바뀝니다. 분쟁을 일으키는 마음이 평화를 만드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자녀교육의 두 번째는 주의 교양으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녀교육의 내용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합니까? 주님의 교양을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교훈들이 참 많습니다. 마태복음 5-7장까지는 산상수훈인데 예수님의 교양의 핵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어요. 좁은 길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인격의 집을 모래 위에 세우지 말고 반석위에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빌립보서 1장 27절을 보면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했습니다.

  주의 교양으로 양육하는 것은 성경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딤후3:16, 17절을 읽습니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시게 유익합니다. 따라서 주의 교훈으로 양육하는 것은 성경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말씀이 들려져야 합니다. 말씀이 읽혀져야 합니다. 말씀이 묵상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먼저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경의 핵심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구약은 이스라엘백성을 사랑했습니다. 신약에서는 모든 인류를 사랑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나를 사랑하셨고 지금도 나를 사랑하시고 앞으로도 사랑하십니다. 사랑받은 내가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녀교육의 세 번째는 주님의 훈계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자녀교육의 방법입니다. 주님은 어떻게 제자들을 교육하셨는가요? ㅁ델링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기 전에 먼저 기도하는 모범을 보여주셨어요. 제자들에게 사랑하라고 교육하기 전에 먼저 대야에 물을 떠놓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어요. 그러면서 너희들도 나처럼 이렇게 하라고 하셨어요. 빌립보2장을 보면 바울사도는 디모데를 소개하면서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는데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복음을 위하여 수고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사도가 디모데에게 네가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라고 말로 가르쳐준 것은 아닙니다. 바울사도가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어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복음을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영적으로 훈련을 시키려면 부모 자신이 먼저 영적으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부모가 먼저 예수의 사람이 되고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예수의 사람이 되지 않고 성령의 사람이 되지 않고 자녀를 예수님의 제자로 양육할 수 없어요.

  엡4:22-24절을 함께 읽습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나는 여전히 옛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자녀들에게 새사람이 되라고 하면 그것은 교육의 방법론이 잘못되었습니다.


  에스겔서 18장 1-3절을 읽습니다. 아비가 신포도를 먹었는데 아들의 이가 십니다. 아버지를 아들이 본을 받습니다. 에스겔 16:44절을 또 읽습니다. 어머니가 어떠하면 딸도 그렇다 하리라 딸이 엄마를 본받습니다. 그래서 종종 이야기합니다. 자녀교육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델링입니다. 그래서 자녀가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은 얼마나 행운인지 모릅니다. 가끔 우리 주변에 보면 좋은 부모를 만나지 못했는데 올곧게 믿음으로 잘 성장한 사람들은 봅니다. 이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부모보다 좋은 영향력을 끼친 선생님이나 인생의 선배들이나 목회자가 있었어요. 예수님을 부모님으로 받들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시편 103편 17절은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라. 이 말씀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부모님의 행동을 인생의 모델로 삼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인자하심, 예수님의 사랑과 돌봄을 인생의 모델로 삼았어요. 주님의 의로움, 예수님의 옳다고 믿는 것을 마음에 품으면 살았어요.

  부모의 잘못된 모델링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는 여러분의 모델링을 예수님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렇다고 잘못된 모델링을 보여준 부모님을 미워하고 증오하면 여러분도 똑같은 사랑이 됩니다. 그 잘못된 모델링을 보여주신 부모님을 이해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 분들의 잘못된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육신의 부모로서 존경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악을 끊을 수 있어요.

  엡4:26, 27절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분을 내면서 죄를 지으면 마귀가 역사합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으면서 풀지 않으면 마귀가 역사합니다. 남아프리카의 넬슨 만델라 27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첫 번째 대통령이 됩니다. 추종자들이 흑인탄압에 앞장 섰던 사람들에게 형벌을 주자고 했지만 만델라는 거절합니다. 이 때 만델라가 그들에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의가 아니라 용서이고 화해입니다. 그들에게 형벌을 주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재판정에서 잘못만을 시인하면 우리는 그들에게 벌을 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남아프리카에 세워진 진실과 화해위원회가 했던 일입니다. 백인 통치자들이 신포도를 먹었지만 그들이 우리의 입안에 미움과 형벌과 차별이라는 신맛을 주었지만 우리는 그 신맛을 통치의 이념으로 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물려주신 신맛대신에 예수님의 단맛을 백성들에게 물려주고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넬슨 만델라는 가장 악랄하게 통치했던 백인대통령을 부통령으로 삼아서 일하도록 했어요. 피의 보복으로 얼룩진 아프리카정가에 사랑과 환대를 심어주었어요. 이것이 올바른 자녀교육의 모델링입니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멘.


  이번에 한화 그룹의 김승연회장의 보복폭행에 대해서 우리 모두가 가슴아파하고 있습니다. 돈의 힘을 믿었던 아버지의 못된 버릇이 술집에서 아들로 하여금 행패를 부리게 했고요. 그것을 본 아버지에게 아들이 피해자라고 생각해서 보복폭행을 했어요. 돈많은 재벌회장일 수는 있지만 짐승같은 짓입니다. 제대로 된 아버지가 같은 자녀를 훈계해야 합니다.

  우리도 한 번 우리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자녀들에게 무엇을 보여주었는가? 내가 돈많은 재벌이라면 김승연회장 같은 짓을 안 한다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내가 예수님의 마음을 갖지 못하면 우리도 잘못된 부모의 사랑을 할 수 있어요.

  고전 11장 23-29을 보면 성만찬을 하는 요령을 설명하고 있어요. 바울사도는 내가 가진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실제로 주님을 만나지는 못했어요.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서 바울사도는 예수님을 보았어요. 이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서로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어요. 옆에 분에게 인사합시다. 성도님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아멘.

  부모가 자녀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눈물이 흘려질 때에 자녀들은 그 눈물을 보면서 훌륭한 신앙과 인격을 가집니다.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닙니다. 의를 위해서 애쓰면서 흘리는 눈물이고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섬김과 사랑을 위해 애쓰면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서 흘렸던 눈물, 우리도 흘립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