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목회의 현주소
목회자는 평신도들이 성서적인 비전을 가지고 에클레시아(ecclesia-모이는 것) 사명과 디아스포라(diaspora-흩어지는 것)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다. 초대 교회들을 보면 끊임없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성도들에게 이런 비전을 심어주려면 오늘날의 교회가 초대교회들에게 주었던 비전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멀어져 있는지를 먼저 이해 할 필요가 있다. 신약 성서에서 평신도(라이코이)를 지칭하는 단수단어는 크리스챤을 서술하는 데에는 결코사용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그 대신에 복수를 나타내는 헬라어 라오스를 (laos: 원래 대중, 무리를 뜻함) 써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또 상당한 위엄(고귀함)을 부여받은 것을 나타내었다(베드로전서 2:9-10). 이는 하나의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현대 교회에서는 목회자와 '성도들'을 구분하여 쓰지만, 신약성서속에서 우리는 그들 사이에서 지도자들인 사람(라오스)을 발견하게 된다. 안수를 받은 목사라고 해서 평신도의 한 멤버가 되는 것보다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거나 품격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대신 헬라어로 성직자를 지칭하는 클레로스(kleros)는 모든 평신도들이 하나님 안에서 누릴 기업과 부르심을 나타내기 위해 쓰였다(골로새서1:12, 에베소서 1:11, 갈라디아서 3:29). 그러므로, 아이러니칼 하게도, 신약성서속에 서술된 교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성직자였고(성서적인 의미에서 용어를 볼 때), 그리고 평신도는 아무도 없었다(그 용어의 보통의미에서). 300여년이 지나서야 현재 우리가 쓰는 평신도(layperson)란 용어가 생겨났고, 그 의미는 전문 목회자보다 신학적으로 낮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사명감도 확고하지 못하며 덜 준비된 사람들을 가리키게 되었다(Alexandre Faivre, The Emergency of the Laity in the early church, 1990). 그전까지는 목회자와 평신도간의 구별이 없었다.
3세기 이후로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제도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하여 성도들이 감당해야 할 사역과 선교에도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알렉산더 파이브르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 후로 평신도들의 기능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물질의 염려 없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물질을 조달 해주는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목회자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만민 구속 역사를 위해 자신을 헌신할 수 있게 된다(The Emergency, p.69). 그 결과 4세기에서 6세기까지 평신도들의 위치는 성직자 서열 중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였다. 성직자들은 의복부터 다르게 입기 시작하였고, 신학교에서 정식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목회 안수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되었으며 마치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는 행위와 같이 간주되었다. 이를 종합해서 말하면 목회자는 사역을 감당하는 입장이고 평신도는 목회자의 목회를 받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러한 기존의 문화에 도전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윌리암 텐데일 이라는 사람은 "접시를 닦는 하찮은 일이든지 사도가 되어 말씀을 전하는 일이든지 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성직자들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화형을 당하기도 했다(William Tyndale, A Parable of th wicked Mammon, 1527). 이것은 현대에서 갑자기 발생한 문제가 아니라 대대로 내려오는 문제이다. 오스카 프퓨크트(Oscar Feucht)가 말한대로 만인제사장설은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사라지게 되었다(Everyone a Minister, 1974). 이 결과 평신도들이 사명(사역과 선교)을 감당해야 하는 분명한 소신도 잃게 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왜 평신도 분야에서는 온전한 개혁을 가져오지 못했는가 하는 문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만민제사장설을 내세우는 교단이 여기 저기서 일어나게 되었다. 예를 들어 퀘이커교에서는 목회자가 없었고, 모라비안교에서는 모두가 자비량선교사로 해외 선교에 파송되었다. 청교도, 침례교, 감리교도 평신도에 많은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이들은 처음 가졌던 비전(the original vision)을 잃게 되었다. 만민제사장설을 믿고 실천한 정통 개신교 교단들은 이제 교권주의의 노예가 되었다(Ann Rowthorn, The Liberation of the Laity, 1986).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래와 같이 목회자들이 깊이 연구해야 할 방향이 있는데 모든 문제가 역사적으로 물려내려오는 것임을 볼 수 있다: 1) 우선 제사장의 역할이 설교자로 대신 바뀌게 된다.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미사가 예배로 대치되게 되었고 이 결과로 미사 집례 신부에 해당하는 설교가가 등장하게 되었다. 설교가들이 말씀을 맡아서 증거하는 동안 평신도들은 성경에 소홀하게 되었고 셩경 연구는 귄위 있는 학자만이 하는 것으로 오인되게 되었다. 2)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은 재발견된 구원론에 맞는 교회론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었던 형편이었다.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개혁을 보인 교단조차도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분을 제거하지 못하였다. 그중 주된 원인은 교회나 선교 단체에서 평신도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결국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학교 제도를 받아 드렸다. 몇가지 예외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신학교는 목회자를 양성하는 정식 기관이 되었고 신학교를 졸업하면 그 교단에서 가르치는 교리를 다 배워서 목회자가 될 수 있었다. 4) 평신도 양성에 관한 저서들이 출간되지 않았다. 신학과 사역 자체에 관련된 저서들이 대부분 목회자들의 손으로 집필되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크래머(H. Karemer)가 쓴 '평신도 신학'이나 이브 콩가Yves Congar)와 바티칸 2세의 작품을 토대로 카톨릭 입장에서 쓴 윌리암 라데마처(William Rademacher)의 저서를 필두로 평신도 사역에 관한 저서들이 조금씩 선을 보이고 있다. 윌리암 디엘(William Diehl)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월요일입니다.("Thanks God, It's Monday)"는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가 썼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5)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교회 활동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에클레시아 사명을 더 중요시 여기게 되면서 교회의 사명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보다 교회 활동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이 교회를 성장에 가리워진 것이다.
6) 전임 사역자가 되려면 안수를 받아야 한다. 반면에 평신도 사역자에 대해서는 인식이 부족하다. 현재 대부분의 교단에서는 목회자가 되는 자격으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인격을 보기 보다 안수를 우선 순위에 놓는다. 평신도들이 사회에서 일하면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안수 제도를 도입한 교단은 지금까지 한 군데도 없다. 7) 칼빈이 주장한 "특별한 부르심"은 사역의 양분화를 뿌리내리게 했다. 이것은 소수의 선택된 하나님의 종들만 특별한 부르심을 받고 성도들은 일반적인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을 은연중에 표현한다. 진보적인 교회에서도 목사 안수시에 목사로 부르신 특별한 부르심을 간증으로 발표하게 한다. 이것은 은연중에 목회자의 부르심은 평신도로 부르신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함축한다. 8) 평신도의 영성에 대해 깊이 있게 가르치거나 홍보를 한 적이 없다. 종교개혁은 영적으로 양분화 시키는 것을 지양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개신 교회들은 일반 성도들이 그들의 삶을 통해 얻는 영적 비밀들은 무시하고 훌륭한 지도자의 깊은 영성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져왔다. 서구 교회는 그리스 이원론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여 아직도 육신을 천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9) 성경에 나오는 개념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 구약에 나오는 제사장을 신약의 목회자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장은 예수님의 모형이다. 카타지 주교 시프리안은 Cyprian, Carthage/ 249 A.D.)성직자와 평신도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레위인들을 예로 들면서 크리스챤은 세상에 너무 관여해서는 안되며 특히 성직자들은 성소의 일만 신경 써야 한다고 말했다. 시프리안 시대 이후로 목회자와 평신도의 역할에 대한 변화가 없어 왔다. 10) 16세기 이후로 문화적인 요인이나 사회적인 요인에 변화가 없다. 세상의 경영 체제, 목회자와 평신도의 이분법, 강력한 중앙 정부는 변함이 없다. 만민제사장설은 한 세대만에 자취를 감추었다. 평신도들이 자립적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마치 비행기가 계속 돌아가야만 하는 것과 같다. 엔진이 멈추면 중력의 영향을 받아 땅으로 떨어지게 된다.
평신도목회의 문제는 단지 이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대대로 내려오는 역사적인 문제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초대 교회로 돌아가 그들의 믿음과 가치관을 받아들여야 한다. 신학 교육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이미 해결한 제3세계 교회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이제 사명은 목회자들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이 일상생활에서 감당하는 것으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평신도들을 위하여 말씀 묵상이나 구체적 실천을 위한 영성 개발이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까지 가려져 있었던 평신도들의 역할을 재조명하는 것이 21세기 교회의 희망이라고 본다.
목회자는 평신도들이 성서적인 비전을 가지고 에클레시아(ecclesia-모이는 것) 사명과 디아스포라(diaspora-흩어지는 것)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다. 초대 교회들을 보면 끊임없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성도들에게 이런 비전을 심어주려면 오늘날의 교회가 초대교회들에게 주었던 비전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멀어져 있는지를 먼저 이해 할 필요가 있다. 신약 성서에서 평신도(라이코이)를 지칭하는 단수단어는 크리스챤을 서술하는 데에는 결코사용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그 대신에 복수를 나타내는 헬라어 라오스를 (laos: 원래 대중, 무리를 뜻함) 써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또 상당한 위엄(고귀함)을 부여받은 것을 나타내었다(베드로전서 2:9-10). 이는 하나의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현대 교회에서는 목회자와 '성도들'을 구분하여 쓰지만, 신약성서속에서 우리는 그들 사이에서 지도자들인 사람(라오스)을 발견하게 된다. 안수를 받은 목사라고 해서 평신도의 한 멤버가 되는 것보다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거나 품격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대신 헬라어로 성직자를 지칭하는 클레로스(kleros)는 모든 평신도들이 하나님 안에서 누릴 기업과 부르심을 나타내기 위해 쓰였다(골로새서1:12, 에베소서 1:11, 갈라디아서 3:29). 그러므로, 아이러니칼 하게도, 신약성서속에 서술된 교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성직자였고(성서적인 의미에서 용어를 볼 때), 그리고 평신도는 아무도 없었다(그 용어의 보통의미에서). 300여년이 지나서야 현재 우리가 쓰는 평신도(layperson)란 용어가 생겨났고, 그 의미는 전문 목회자보다 신학적으로 낮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사명감도 확고하지 못하며 덜 준비된 사람들을 가리키게 되었다(Alexandre Faivre, The Emergency of the Laity in the early church, 1990). 그전까지는 목회자와 평신도간의 구별이 없었다.
3세기 이후로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제도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하여 성도들이 감당해야 할 사역과 선교에도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알렉산더 파이브르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 후로 평신도들의 기능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물질의 염려 없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물질을 조달 해주는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목회자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만민 구속 역사를 위해 자신을 헌신할 수 있게 된다(The Emergency, p.69). 그 결과 4세기에서 6세기까지 평신도들의 위치는 성직자 서열 중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였다. 성직자들은 의복부터 다르게 입기 시작하였고, 신학교에서 정식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목회 안수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되었으며 마치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는 행위와 같이 간주되었다. 이를 종합해서 말하면 목회자는 사역을 감당하는 입장이고 평신도는 목회자의 목회를 받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러한 기존의 문화에 도전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윌리암 텐데일 이라는 사람은 "접시를 닦는 하찮은 일이든지 사도가 되어 말씀을 전하는 일이든지 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성직자들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화형을 당하기도 했다(William Tyndale, A Parable of th wicked Mammon, 1527). 이것은 현대에서 갑자기 발생한 문제가 아니라 대대로 내려오는 문제이다. 오스카 프퓨크트(Oscar Feucht)가 말한대로 만인제사장설은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사라지게 되었다(Everyone a Minister, 1974). 이 결과 평신도들이 사명(사역과 선교)을 감당해야 하는 분명한 소신도 잃게 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왜 평신도 분야에서는 온전한 개혁을 가져오지 못했는가 하는 문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만민제사장설을 내세우는 교단이 여기 저기서 일어나게 되었다. 예를 들어 퀘이커교에서는 목회자가 없었고, 모라비안교에서는 모두가 자비량선교사로 해외 선교에 파송되었다. 청교도, 침례교, 감리교도 평신도에 많은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이들은 처음 가졌던 비전(the original vision)을 잃게 되었다. 만민제사장설을 믿고 실천한 정통 개신교 교단들은 이제 교권주의의 노예가 되었다(Ann Rowthorn, The Liberation of the Laity, 1986).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래와 같이 목회자들이 깊이 연구해야 할 방향이 있는데 모든 문제가 역사적으로 물려내려오는 것임을 볼 수 있다: 1) 우선 제사장의 역할이 설교자로 대신 바뀌게 된다.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미사가 예배로 대치되게 되었고 이 결과로 미사 집례 신부에 해당하는 설교가가 등장하게 되었다. 설교가들이 말씀을 맡아서 증거하는 동안 평신도들은 성경에 소홀하게 되었고 셩경 연구는 귄위 있는 학자만이 하는 것으로 오인되게 되었다. 2)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은 재발견된 구원론에 맞는 교회론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었던 형편이었다.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개혁을 보인 교단조차도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분을 제거하지 못하였다. 그중 주된 원인은 교회나 선교 단체에서 평신도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결국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학교 제도를 받아 드렸다. 몇가지 예외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신학교는 목회자를 양성하는 정식 기관이 되었고 신학교를 졸업하면 그 교단에서 가르치는 교리를 다 배워서 목회자가 될 수 있었다. 4) 평신도 양성에 관한 저서들이 출간되지 않았다. 신학과 사역 자체에 관련된 저서들이 대부분 목회자들의 손으로 집필되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크래머(H. Karemer)가 쓴 '평신도 신학'이나 이브 콩가Yves Congar)와 바티칸 2세의 작품을 토대로 카톨릭 입장에서 쓴 윌리암 라데마처(William Rademacher)의 저서를 필두로 평신도 사역에 관한 저서들이 조금씩 선을 보이고 있다. 윌리암 디엘(William Diehl)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월요일입니다.("Thanks God, It's Monday)"는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가 썼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5)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교회 활동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에클레시아 사명을 더 중요시 여기게 되면서 교회의 사명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보다 교회 활동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이 교회를 성장에 가리워진 것이다.
6) 전임 사역자가 되려면 안수를 받아야 한다. 반면에 평신도 사역자에 대해서는 인식이 부족하다. 현재 대부분의 교단에서는 목회자가 되는 자격으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인격을 보기 보다 안수를 우선 순위에 놓는다. 평신도들이 사회에서 일하면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안수 제도를 도입한 교단은 지금까지 한 군데도 없다. 7) 칼빈이 주장한 "특별한 부르심"은 사역의 양분화를 뿌리내리게 했다. 이것은 소수의 선택된 하나님의 종들만 특별한 부르심을 받고 성도들은 일반적인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을 은연중에 표현한다. 진보적인 교회에서도 목사 안수시에 목사로 부르신 특별한 부르심을 간증으로 발표하게 한다. 이것은 은연중에 목회자의 부르심은 평신도로 부르신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함축한다. 8) 평신도의 영성에 대해 깊이 있게 가르치거나 홍보를 한 적이 없다. 종교개혁은 영적으로 양분화 시키는 것을 지양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개신 교회들은 일반 성도들이 그들의 삶을 통해 얻는 영적 비밀들은 무시하고 훌륭한 지도자의 깊은 영성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져왔다. 서구 교회는 그리스 이원론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여 아직도 육신을 천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9) 성경에 나오는 개념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 구약에 나오는 제사장을 신약의 목회자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장은 예수님의 모형이다. 카타지 주교 시프리안은 Cyprian, Carthage/ 249 A.D.)성직자와 평신도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레위인들을 예로 들면서 크리스챤은 세상에 너무 관여해서는 안되며 특히 성직자들은 성소의 일만 신경 써야 한다고 말했다. 시프리안 시대 이후로 목회자와 평신도의 역할에 대한 변화가 없어 왔다. 10) 16세기 이후로 문화적인 요인이나 사회적인 요인에 변화가 없다. 세상의 경영 체제, 목회자와 평신도의 이분법, 강력한 중앙 정부는 변함이 없다. 만민제사장설은 한 세대만에 자취를 감추었다. 평신도들이 자립적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마치 비행기가 계속 돌아가야만 하는 것과 같다. 엔진이 멈추면 중력의 영향을 받아 땅으로 떨어지게 된다.
평신도목회의 문제는 단지 이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대대로 내려오는 역사적인 문제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초대 교회로 돌아가 그들의 믿음과 가치관을 받아들여야 한다. 신학 교육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이미 해결한 제3세계 교회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이제 사명은 목회자들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이 일상생활에서 감당하는 것으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평신도들을 위하여 말씀 묵상이나 구체적 실천을 위한 영성 개발이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까지 가려져 있었던 평신도들의 역할을 재조명하는 것이 21세기 교회의 희망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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