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목회의 신학적 작업
오스카 퓨켓(Oscar Fecucht)은 [모든 사람은 목회자이다] 라는 과감한 제목의 책에서 교회는 조직(organization)이기보다는-살아있고, 변화하고 다이나믹한- 유기체라고 제안한다 이유는 크리스챤은 우리에게 약속한 성령의 능력을 받은 몸으로서 함께 모여, 단지 효과적인 기구가 아니라 우리가 '교회'가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을마다 도시마다 줄지어서있는 교회가 아니라, 사람들의 실제 삶 속에서 좋은 일, 나쁜 일과 함께 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왜 크리스챤이 사역에 포함되어야 하느냐하는 [신학]적인 작업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학'이라는 용어는 고대 수도사들이 촉이 긴 빳빳한 펜으로 그들의 지혜 긁어내거나 먼지 덮인 원고들 위로 어슬렁거리는 이미지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신학은 뭔가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고민하고, 논쟁하고, 그리고 결국 해결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신학에 대하여 다양한 결론들을 일직선으로 세우면서 교단들로 나누어졌다. 그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진짜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렇게 하여 오늘 우리가 도달해 있다. 수도사들은 신학교들에서 교수들로 바꾸어졌고, 글 쓰는 사람들은 볼펜으로 글을 적어놓았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논쟁하고, 염려하고, 그리고 이런 신학적인 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 용어는 아직도 낯설고, 진부하고, 두렵고, 그리고 대부분의 교회 성도들에게 별로 흥미를 못 주고 있다.
나는 제안하기로 이제야말로 우리는 신학을 성스럽다는 홀(Hall)로부터 끄집어내어, 먼지를 털어내고, 그리고 우리의 거실로, 회의실로, 심지어 침실까지 데리고 와야한다. 왜냐하면 신학이란 당신이 단지 공부만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것은 당신이 살아가야하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신학에 대한 어떤 다른 이미지들이 필요하다. 이런 것이 어떤가?:
.우리의 행동을 지탱하는 강철 석쇠(steel girders)
.우리의 신앙을 함께 붙들고있는 뼈대(골격)
.우리를 하나님의 독특한 사람들로서의 삶으로 튕겨보내는 스프링보드
어떤 사람의 신학이란 것은 정지되거나, 비인격이거나, 지루한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살아있고, 항상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각자를 위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모습이다: 신앙에 영향을 주고, 삶에 영향, 행동에 영향을 주면서.
윌리암 스트링펠로우(William Stringfellow)는 그의 책 [공적 그리고 사적 신앙]에서 "신학의 학문화"에 대해 불평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신학이란 신학교 교수들로부터 나왔고 단지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들만의 소유라고 우리는 생각할수도있다....... 그러나 신학의 작업은 목사만이 아니라 평신도, 즉 하나님의 전 사람들(the whole people of God)의 작업인 것이다... 신학이란 다른 학문과는 질적으로 다른데,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추상적인 이론이나 단지 역사적인 훈련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적인 데이터 속에서 입증이 되는 신앙안에서, 세상의 실존의 실제적인 데이타를 검토하는 것인데 그것은 확인되고, 토론되고, 연구되고, 입증되고, 전해지고, 또 즐기는 것이다. 신학은 고백적인 사건이다.
보통교인들이 잘못 인식하고있는 이유들 중의 하나는 신학이란 단지 학자들만을 위한 것이며, 또한 종종 학자들은 서로 서로가 담화하기에 너무 바빠서 그들은 진리를 평상시의 언어와 상황으로의 해석자들이라는, 즉 그들의 중요한 역할을 잊어버렸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이며, 그럼으로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의 진리들을 이해하고 주장할수있는 것이다- 농부들, 어부들, 사업가들, 가정주부들.
어떤 사람이 한 번은 '단순한 것을 깊이 만드는 것이 창조적이 아니고, 깊은 것을 단순히 만드는 것이 창조적인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바로 우리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것이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평신도는 주로 청중이고 소위 우리가 '교회 가정주부(church housekeeping)'라고 부르는 것에 포함되어있다. 불행하게 평신도들 자신도 자신에게 이런 제한된 이미지를 던져주고 있다. 오스카 퓨케트는 [모든 사람은 목회자이다]라는 책에서 때때로 교회는 그들 자신들을 구원하는 노아의 방주, 요새, 하나님의 권속들, 영적인 교제, 성직적인 사회, 하나님이 사시는 성전, 가족클럽, 그리고 많은 다른 방법들로서 생각하고 있다. 이런 반만이 진실(half-true)인 인식은 그들의 환경속에서 크리스챤의 경험으로부터 성장해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이런 개념들은 교회를 '가는 곳(a place to go),' 또는 '소속되는 기관(an organization to belong to)'으로서 이해하는 데에 근거하고 있다.
오스카 퓨켓(Oscar Fecucht)은 [모든 사람은 목회자이다] 라는 과감한 제목의 책에서 교회는 조직(organization)이기보다는-살아있고, 변화하고 다이나믹한- 유기체라고 제안한다 이유는 크리스챤은 우리에게 약속한 성령의 능력을 받은 몸으로서 함께 모여, 단지 효과적인 기구가 아니라 우리가 '교회'가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을마다 도시마다 줄지어서있는 교회가 아니라, 사람들의 실제 삶 속에서 좋은 일, 나쁜 일과 함께 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왜 크리스챤이 사역에 포함되어야 하느냐하는 [신학]적인 작업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학'이라는 용어는 고대 수도사들이 촉이 긴 빳빳한 펜으로 그들의 지혜 긁어내거나 먼지 덮인 원고들 위로 어슬렁거리는 이미지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신학은 뭔가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고민하고, 논쟁하고, 그리고 결국 해결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신학에 대하여 다양한 결론들을 일직선으로 세우면서 교단들로 나누어졌다. 그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진짜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렇게 하여 오늘 우리가 도달해 있다. 수도사들은 신학교들에서 교수들로 바꾸어졌고, 글 쓰는 사람들은 볼펜으로 글을 적어놓았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논쟁하고, 염려하고, 그리고 이런 신학적인 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 용어는 아직도 낯설고, 진부하고, 두렵고, 그리고 대부분의 교회 성도들에게 별로 흥미를 못 주고 있다.
나는 제안하기로 이제야말로 우리는 신학을 성스럽다는 홀(Hall)로부터 끄집어내어, 먼지를 털어내고, 그리고 우리의 거실로, 회의실로, 심지어 침실까지 데리고 와야한다. 왜냐하면 신학이란 당신이 단지 공부만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것은 당신이 살아가야하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신학에 대한 어떤 다른 이미지들이 필요하다. 이런 것이 어떤가?:
.우리의 행동을 지탱하는 강철 석쇠(steel girders)
.우리의 신앙을 함께 붙들고있는 뼈대(골격)
.우리를 하나님의 독특한 사람들로서의 삶으로 튕겨보내는 스프링보드
어떤 사람의 신학이란 것은 정지되거나, 비인격이거나, 지루한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살아있고, 항상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각자를 위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모습이다: 신앙에 영향을 주고, 삶에 영향, 행동에 영향을 주면서.
윌리암 스트링펠로우(William Stringfellow)는 그의 책 [공적 그리고 사적 신앙]에서 "신학의 학문화"에 대해 불평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신학이란 신학교 교수들로부터 나왔고 단지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들만의 소유라고 우리는 생각할수도있다....... 그러나 신학의 작업은 목사만이 아니라 평신도, 즉 하나님의 전 사람들(the whole people of God)의 작업인 것이다... 신학이란 다른 학문과는 질적으로 다른데,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추상적인 이론이나 단지 역사적인 훈련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적인 데이터 속에서 입증이 되는 신앙안에서, 세상의 실존의 실제적인 데이타를 검토하는 것인데 그것은 확인되고, 토론되고, 연구되고, 입증되고, 전해지고, 또 즐기는 것이다. 신학은 고백적인 사건이다.
보통교인들이 잘못 인식하고있는 이유들 중의 하나는 신학이란 단지 학자들만을 위한 것이며, 또한 종종 학자들은 서로 서로가 담화하기에 너무 바빠서 그들은 진리를 평상시의 언어와 상황으로의 해석자들이라는, 즉 그들의 중요한 역할을 잊어버렸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이며, 그럼으로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의 진리들을 이해하고 주장할수있는 것이다- 농부들, 어부들, 사업가들, 가정주부들.
어떤 사람이 한 번은 '단순한 것을 깊이 만드는 것이 창조적이 아니고, 깊은 것을 단순히 만드는 것이 창조적인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바로 우리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것이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평신도는 주로 청중이고 소위 우리가 '교회 가정주부(church housekeeping)'라고 부르는 것에 포함되어있다. 불행하게 평신도들 자신도 자신에게 이런 제한된 이미지를 던져주고 있다. 오스카 퓨케트는 [모든 사람은 목회자이다]라는 책에서 때때로 교회는 그들 자신들을 구원하는 노아의 방주, 요새, 하나님의 권속들, 영적인 교제, 성직적인 사회, 하나님이 사시는 성전, 가족클럽, 그리고 많은 다른 방법들로서 생각하고 있다. 이런 반만이 진실(half-true)인 인식은 그들의 환경속에서 크리스챤의 경험으로부터 성장해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이런 개념들은 교회를 '가는 곳(a place to go),' 또는 '소속되는 기관(an organization to belong to)'으로서 이해하는 데에 근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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