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토크8/ 성령은 무슨 일을 하시는가? 주말수양회(2)
서 론 /
사람이 육체적으로 태어나게 되면 그는 한 가족에 속하게 된다. 영적으로도 다시 태어나게 되면 그리스도인의 가족에 속하게 된다. 성령이 하시는 일들 중에 많은 부분은 가족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확신을 주시며, 그 관계를 키워나가도록 도우신다. 그는 우리를 가족처럼 서로 닮게 하신다. 우리를 형제와 자매로 묶으시며 가족의 각 구성원에게 서로 다른 재능과 능력을 주신다. 또한 가족의 크기가 자라게 하신다.
오늘 이 시간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이 하시는 일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겠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될 때까지 성령이 주로 하시는 일은 우리에게 자신의 죄와 우리가 예수님을 필요로 함을 깨닫게 하시고, 진리를 확신하게 하셔서 그분을 믿도록 하는 것이다 (요16:7-15).
A.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
1. 완전한 용서 (롬8:1, 미7:19) - 지나간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심
그리스도 앞에 나오는 순간 우리는 완전한 용서를 받는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던 장벽은 사라진다. 바울은 롬8:1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 과거, 현재, 미래까지 모두 가지고 가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가져다가 저 바다 밑 깊은 곳으로 던지시며(미7:19), 거기에 “낚시 금지”라는 푯말을 세워 놓으신다.
2.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모든 남녀가 다 하나님의 자녀는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그를 영접하는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요1:12). 신약에서 말하는 아들의 신분은 영적인 것이다. 우리는 육신적 출생을 넘어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것이다.
로마서는 신약성경의 히말라야 산맥으로 불리운다. 8장은 에베레스트 산이고, 14-17절은 에베레스트의 정상으로 설명될 수 있다.
14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노예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 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16 바로 그 때에 그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 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
1) 가장 위대한 특권/ 하나님의 양자됨(롬8:14)
--로마의 법에는 성인이 상속자를 원하면 자기가 낳은 아들 중에서 고르거나 아니면 입양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낳으신 아들은 예수님 뿐이다. 그러나 많은 자녀들을 입양하셨다.
옛날에 군주가 부랑아와 방랑자를 입양하여 왕자로 삼았다는 말이 있다.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가족에 입양되었다. 그보다 더한 영광은 없다.
(예화) 빌리 브레이/ 술주정뱅이에다 방탕한 생활을 한 광부. 그가 29세에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변화된 삶을 살기 시작. 광부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를 통해 치유의 역사도 일어났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찬양했고, 자신에게는 기뻐해야 할 이유가 너무 많다고 했다. 그는 자신을 “왕의 아들이다”고 표현.
*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놀라운 사실을 참으로 알게 된다면, 이 특권과 비교될 수 있는 신분은 이 세 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2) 가장 가까운 친교(친밀함)/ 아바 아버지(롬8:15)
자녀로서 우리는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친밀함을 소유한다. 바울은 우리가 성령으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고 했다. 구약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곳은 어디에도 없다. 하나님을 칭하는 말로 ‘아바’를 쓴 것은 예수님 뿐이었다. 아람어인 ‘아바’를 굳이 번역하자면, ‘사랑하는 아버지, 아빠’일 것이다.
예수님 시대에는 아버지는 권위적인 존재였다. 또 ‘아바’라는 말은 대단히 친밀한 사이를 의미하기는 하지만 아이들이 쓰는 말이 아니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한 칭호였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의 영을 받을 때에 예수님만이 사용하셨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이 친밀한 칭호를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하셨다.
* 영국의 찰스 황태자에게는 많은 호칭이 있다. 왕위 계승자, 전하, 해군 총사령관, 체스터 백작, 아일랜드 영주 등등. 우리는 그를 ‘전하’라고 부르지만, 그의 아들들인 윌리엄과 해리는 ‘아빠’라고 부른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늘의 왕과 친밀한 사이가 된다.
영국을 변화시켰던 요한 웨슬레는 개종하기 전부터 매우 종교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온전히 회개하고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종의 믿음과 아들의 믿음을 맞바꾸었다.”
3) 가장 깊은 체험(롬8:16)
-- 성령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체험을 우리에게 주신다. 롬8:16에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신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알기 원하신다.
4) 가장 확실한 소망/후사/상속 (롬8:17)
--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는 것은 가장 마음이 든든하고 수지 맞는 일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자녀이면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이기 때문이다 (롬8:17).
로마 법에는 수양 아들이 그 아버지의 이름을 갖고 그의 땅을 물려 받을 수 있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는 상속자다. 다른 점 한 가지는 이 세상에서 상속은 아버지가 죽으면 그 아들이 상속을 받지만 우리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는 우리가 죽을 때 상속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롬8:17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이라고 덧붙인다.
B. 하나님과의 관계 발전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것은 인생 성장의 마지막이 아니다. 출생은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다. 부모님과 우리의 관계는 오랜 시간을 거쳐 더욱 깊어지고 성숙해진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일어나는 일이지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그분과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더욱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해지고 깊어진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도록 도와주신다.
1. 그는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이끄신다.
1) 장벽이 제거되고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됨 (엡2:18)/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통해, 성령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장벽을 없애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기도할 때 그것에 대해 감사하지 않는 일이 종종 있다.
2. 그는 우리를 도와 기도하게 하신다 (롬8:26)/
우리가 어디에서 기도하느냐, 어떤 자세로 기도하느냐, 기도의 형식을 만들었느냐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기도하느냐 아니냐이다. 모든 기도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만 한다. 그분의 도움이 없으면 기도는 생명이 없고 단조로운 것이 되기 쉽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사로 잡히게 되며 기도는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활동이 된다.
3.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도록 도우신다
1) 지혜와 계시의 영 (엡1:17-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아버지를 알게 하시고,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기를 빕니다.”
하나님의 영은 지혜와 계시의 영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눈을 밝혀주셔서 예를 들면,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도록 하신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의 최고 해설자이시다. 궁극적으로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밝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기독교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성령을 믿고 받을 때만이 하나님의 계시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도록 도우시며 그 관계를 유지할 능력을 주신다. 사람들은 자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지탱해 갈 수 없다고 걱정한다.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지탱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우리를 지탱시켜 주신다.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이끄시는 것은 성령이며 그 관계를 지속시키시는 것도 성령이다. 우리는 그분께 완전히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C. 가족같이 닮아감
자녀들은 부모 양쪽을 동시에 닮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심지어 남편과 아내도 세월이 지남에 따라 서로를 닮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다보면,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모습을 바꾸신다. 바울은 고후3:18에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닮은 모습으로 변화된다.
1. 성령의 열매가 자라게 된다 (갈5:22,23)
우리가 즉시 완벽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1) 성령의 열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있다. 성경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이다. 그의 바램은 우리가 그분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그 사랑에 응답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 성령이 활동하신다는 증거는 점점 커져가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타인을 향한 사랑이다. 이 사랑이 없다면 다른 모든 것은 의미가 없다.
2) 두 번째 열매는 기쁨이다.
예수를 믿은 후 나타나는 현상 중에 가장 특징적이고 고무적인 것은 용솟음치는 기쁨이다.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우리 몸을 가득 채우고, 두려움을 사라지게 하며, 우리의 소망들이 하늘을 향해 가도록 한다. 이 기쁨은 우리의 외부 환경에 달려있지 않다. 그것은 우리 안의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 리쳐드 범브랜드 목사 이야기/ 그는 신앙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루마니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잦은 고문을 당하였는데, 이 기쁨에 대해 이렇게 썼다. “아무도 없는 감방 안에서 춥고 배고프고 누더기를 걸친 채, 나는 매일 밤 기뻐서 춤을 추웠다... 때로는 기쁨이 너무나 넘쳐 흘러 그것을 표현하지 않으면 폭발해 버릴 것 같았다.” * cf. 나 어느 곳에 있든지
3) 세 번째 열매는 평화다.
* 내 맘 속에 이 평화 넘쳐남은
그리스도와 함께가 아니라면 마음 속의 평화는 실체는 별로 없다. 이 세상 사람들이 평화를 원하지만 진정한 평화는 예수 안에서 성령님이 주신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를 닮아가고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풍기게 하는 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인 것이다.
D. 가족 안에서 일치
우리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는 커다란 가족의 일부가 된다. 하나님은 보통 부모들이 그렇듯이 그분의 가족들도 하나가 되기를 원하신다.
1.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이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다 (요17장)
2.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권면했다. (엡4:3)
3.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한 성령을 모시고 있다 (엡4:4-6).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우리가 하나가 되는 일이다. 그런데 교회가 분리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일이다. 피부색이나 민족이나 우리 모두는 한 가족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느 교단에 속해 있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성령이 있느냐, 없느냐인 것이다. 성령이 그 안에 살아계신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고 우리의 형제고 자매다. 이 커다란 하나님이 가족의 일원이라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다.
cf. 정주영 일가만 되어도 그 특권이 보통 아니다. 현직 대통령의 일가도 그 권세가 대단하다. 지난 16대 선거에서 현 대통령의 아들이 출마한 목포에서는 그의 지지율이 거의 100%에 가까웠다.
E. 모든 자녀에게 주시는 선물(은사)
가족 간에 서로 닮고, 또 하나가 되는 것과 함께 가족 안에는 다양함도 함께 있다. 두 아이가 똑같지 않다. 심지어는 쌍둥이라고 해도 다르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르다. 각자가 헌신해야 할 바가 다르며, 재능도 다르다. 신약성경에 성령이 주시는 몇 가지 선물(은사)들의 목록이 있다.
1. 각 자녀들은 각기 다른 은사를 받는다 (고전12:7-11)
1)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9가지 선물을 열거했다. 고전12:7-11을 보라.
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 (1) 은사는 거저 주신다.
(2) 모든 사람에게 다 주신다.
(3) 은사는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위해 주신다.
2) 그밖의 다른 은사들
* (고전12:28-30) -- 사도, 교사, 남을 도와주는 사람, 관리하는 사람
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29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 (에베소서 4) -- 복음 전도자, 목사
* (로마서 12:7) -- 섬기는 일, 권면하는 일, 나누어 주는 사람, 지도하는 사람, 자선을 베푸는 사람
* (벧전4장) -- 봉사하는 사람, 말을 하는 사람
위의 목록들은 우리를 피곤하고 지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모든 선한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타고난 재능이 성령으로 변화되면 카리스마적인 힘을 가질 수 있게 된다.
-1급, 2급 그리스도인은 없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받았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선물을 갖고 있다.
2. 각자가 받은 은사는 반드시 사용되어져야 한다.
교회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그들의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난 IMF로 인해 실직자가 많이 늘어나서 실업률이 높아졌다. 그러나 사실 교회 내에 널리 펴진 실업률(은사를 따라 사역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결과적으로 소수의 남은 자들이 남아서 모든 것을 처리하고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리는 반면, 나머지 사람들은 전혀 사용되어지지 않고 있다. 교회는 축구경기를 닮아가고 있다. 절대적으로 운동이 필요한 수많은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휴식이 필요한 22명을 바라보고만 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이 자신의 몫을 담당하지 않는 한, 교회는 최고의 효율성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없다. 교회는 각 성도들이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은사를 따라 사역을 할 때에 그 교회가 최고의 효율성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F. 가족의 성장
1. 성령은 우리에게 능력을 덧입혀 그리스도를 위하여 증거하게 하신다. (행1:8)
가족이 늘어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나님의 가족이 늘어나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것 역시 성령의 일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1:8)
2. 성령은 우리에게 증거하고 싶은 욕망과 의지를 주신다 (빌2:13)
하나님의 영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고 싶은 욕구와 그럴 수 있는 능력을 둘 다 주신다. 하나님의 영을 경험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그리스도인 가족은 성장이 정지되어서는 안된다. 끊임없이 자라고 새로운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바로 그들 자신이 성령의 권능을 받고 밖으로 나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에 대해 말해야 한다.
결 론
1.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모시고 있다(롬8:9)
우리는 계속해서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는 성령이 살고 계심을 강조했다. 바울은 말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8:9).
2.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충만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엡5:18).
3. 그래서 성령의 은사를 받으라 (계22:17)
구약 성경 창세기 1장에 창조사역시에 성령님이 함께 하셨다. 성경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 마지막 부분인 22:17에도 하나님의 영에 대해서 언급한다.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그의 영으로 채우기를 원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애타게 기다린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그것을 원하는지 뚜렷한 확신이 없다. 그런 사람들은 정말로 목이 마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성령으로 충만해지기를 바라는 목마름이 없다면, 그런 목마름을 달라고 기도해 보지 않겠는가? 우리가 목말라 하면 하나님은 “생명의 물을 선물로 거저” 주실 것이다.
* 오 나의 자비로운 주여.....
*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알파토크9/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는가? 주말(3)
사도행전은 성령을 체험하는 여러 사람들의 예가 있다. 이상적으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순간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언제나 그렇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일들이 일어난다.
A. 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해 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사도 행전에 나오는 성령의 부으심에 대해 살펴보자.
1. 오순절날 성령이 약속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자들 위에 임했다. (행2:2-4)
2. 사마리아에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행8:14-17)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의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자 성령이 그들 위에 임했다.
3. 바울의 개종 사건 (행9:1,2,17-20)
시대를 통틀어 가장 멋진 개종 사건이다.
최초로 기독교 순교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했을 때, 그것을 당연히 여기면서 그 옆에 있었던 사울이 스데반이 순교하자 교회를 박해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이 집 저 집 닥치는 대로 들어가 남자와 여자를 끌어내어 감옥에 보냈다(3절).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이 불과 며칠 사이에 공회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한다(20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그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길 래 그가 그토록 바뀐 것일까? 먼저,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두 번째로, 그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 17절을 보라.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 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그 순간 ‘사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시력을 회복하였다’(18절).
요즘도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거나 혹은 기독교를 심하게 반대하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될 때, 그들의 삶이 완전히 바뀌는 일이 종종 있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강력한 지지자가 된다.
4. 에베소 (행19:1-7)
에베소에서 바울은 믿는 무리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성령에 대해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자들이었다. 그가 그들 위에 손을 얹자, 성령이 내려오고 그들은 방언을 말하고 예언을 했다. (행19:1-7).
- 오늘날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비슷한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있다. 그들은 얼마 동안을 혹은 평생을 믿어 왔을 수 있다. 세례도 받았고, 가끔 혹은 매주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갔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에 대해서는 거의 혹은 아무 것도 모를 수도 있다.
5. 고넬료 가정 (행10:44-46) / 이방인들이 처음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건
하나님은 고넬료라는 사람에게 환상을 보이는 것으로 특별한 일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은 그와 동시에 베드로에게도 환상을 보여주시고 이 고넬료라는 사람의 집에 가서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하셨다.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고 있는 가운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말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리셨다. 신자가 된 유대인으로서 베드로와 함께 왔던 사람들은 성령의 선물을 이방 사람들에게까지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들은 이방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과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행10:44-46).
지금부터는 그때 일어난 일을 3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B. 고넬료와 그의 집안은 성령이 그들 위에 임할 때 무엇을 체험하였는가?
행10장은 고넬료라는 로마 군인과 그의 가족, 친구들이 성령으로 충만했을 때 체험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1.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였다.
베드로는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자기가 말하던 것을 멈추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그 경험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느끼지 못하게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순절날 성령이 임할 때 그 현상에 대해 누가는
* 강한 열대의 폭풍을 연상시키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 넘쳐 흐르는 성령의 힘을 묘사하는 그림이었다. 물리적인 현상도 있었다. 그들은 강풍의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2절). 그것은 실제의 강풍은 아니었지만, 그것과 비슷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보이지 않는 강한 힘이었다.
그래서 성령이 충만할 때 어떤 이는 바람 속의 나뭇잎처럼 몸을 떨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몸으로 성령을 들어마시듯 깊은 호흡을 하기도 한다.
* 불같은 것도 보았다(3절). 성령의 충만함은 그래서 때로 육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열과 함께 오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 열을 손이나 몸의 다른 부분에서 느낀다.
*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성령의 체험은 하나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경험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바울은 그래서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 “모든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을 수 있게” 되기를 기도했다 (엡3:18).
그리스도의 사랑은 온 세상의 사람들에게 닿을 만큼 넓고, 모든 대륙을 뛰어 넘어 모든 인종, 피부색, 종족, 배경의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다. 그 사랑은 우리의 평생동안 계속되고 영원까지 이를 수 있을 만큼 길다. 우리가 얼마를 굴러 떨어져 내려가든지 우리에게 닿을 수 있을 만큼 깊다. 우리를 하늘나라로 들어 올릴 만큼 그분의 사랑은 높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우리를 위해 기꺼이 죽으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우리가 이 사랑의 크기를 깨닫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기도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충만해지기를”를 바랬다. (19절).
2. 그들은 찬송하게 되었다. (행10:46)
성령의 충만함을 받자 이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솟아나오는 찬양은 하나님을 경험하게 도어 감격하고 감동한 사람들의 언어다. 때때로 교회에서 감정을 표헌하는 것에 너무 자제하는 것을 본다.
* 자발적인 찬송/ 자신의 의식이 아닌 하나님의 의식으로 부름
우리 대부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지고 있는 위험은 감상주의가 아니라 감정이 모자란 것이다. 느낌이 없는 것이다. 사랑하는 모든 관계에는 필연적으로 감정이 들어간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무 감정도 표현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인격 전체가 관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하고, 예배드리도록 부름받았다.
* 전인격적으로 예배를 드림/
-- 타임지에 기고한 한 독자의 투고 내용
코메디 영화가 웃음을 유발하면 그 영화는 성공적이라고 인정하고, 슬픈 연극이 관객들을 울게 하면 그 작품은 감동적이라고 인정받고, 축구 경기가 관중들을 열광하게 하면 그 경기는 흥미진진했다고 평가되면서, 왜 교회의 성도들이 예배 중에 하나님의 영광에 감동되면, 그 사람들은 감상주의라고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생각과 마음, 의지와 감정 등 우리의 모든 인격이 포함되어야 한다.
3. 그들은 새로운 언어를 받았다. (행10:46)
오순절이나 에베소의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성령에 충만해진 이방인들은 방언의 선물을 받았다. ‘방언’이란 말은 ‘언어’라는 말과 같은 단어로서 배우지 않은 언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그것은 알아 들을 수 없는 천사의 언어일 수도 있고(고전13:1),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언어일 수도 있다(오순절처럼).
방언의 은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축복을 가져다 준다. 그것은 이미 보았듯이, 성령의 은사 중의 하나다. 유일한 은사도, 가장 중요한 은사도 아니다. 모든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필수적인 증거도 아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도 방언을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약에서나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에 있어서 모두, 방언은 성령의 체험을 동반하며, 최초로 성령의 초자연적인 활동을 보다 분명하게 경험하게 해 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에 대해 궁금해 한다. 따라서 이제부터 그 주제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바울은 고전14장에서 여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1) 방언의 은사란 무엇인가?
방언은 기도의 한 형태다.
*고전14:2 --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다.
*고전14:4 -- 방언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덕을 세우는 기도 형태다.
*고전14:14-- 방언의 이점은 인간의 언어 한계를 뛰어넘는 기도의 형태다. 영국의 경우, 보통 사람은 평균적 으로 5천 단어를 알고 있다. 윈스턴 처질 경은 15,000 단어를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종종 자 기의 느낌들을 다 표현하지 못할 수 있다. 그 언어의 한계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영이 하나님에 대해 느끼는 것을 우리 언어로 다 표현하지 못한다. 그럴 때에 이 방언은 아주 유용하다. 우리의 영이 느끼는 것을 말로 옮기는 과정 없이 하나님께 바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방언이 어떤 경우에 도움이 되는가?
(1) 찬양과 예배드릴 때에 도움이 된다.
우리가 우리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기도를 할 때에 한계를 느낀다. 언어의 제약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배, 찬양을 너무나 표현하고 싶어진다. 방언의 은사는 인간의언어의 한계에 부딪히지 않고 이 일을 할 수 있게 해준다.
(2) 무거운 마음으로 억눌러 있어 기도할 때 도움을 준다.
살다보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고통과 근심, 슬픔으로 어깨가 무겁기 때문일 수 있다.
(3)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할 때 도움이 된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오랫동안 그 사람을 알지도 못했고, 소식을 듣지도 못했다면 더욱 그러하다. 겨우 한다믄 기도가 그저 “하나님 그 사람을 축복하소서.”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기도들일 것이다. 그런 경우에 방언기도가 도움이 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상대방을 위해기도할 말을 주신다.
방언기도가 비록 기도하는 사람의 덕을 세운다고 할지라도(고전14:4), 간접적으로 매우 큰 영향을 다른 사람들에게 미칠 수가 있다.
홍콩에서 사역하는 재키 풀링거는 방언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사역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가를 설명했다.
“나는 하루에 15분씩 성령의 언어로 기도했지만, 성령께서 그가 닿고자 하는 사람들과 나를 연결해 달라는 나의 간구에 대해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한지 6주가 지나자, 나는 애쓰지 않고도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폭력배들이 길거리에서 울음을 터뜨리며 무릎을 꿇었고, 여인들이 치료를 받았으며, 마약 중독자가 기적적으로 자유를 맛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것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또한 그녀가 다른 성령의 선물을 받는 통로였다.
내 친구들과 함께 나는 성령의 다른 은사에 대해서도 배우기 시작했고, 우리의 사역은 몇 년 간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수십 명의 폭력배들과 부유한 사람들, 학생들과 신자들이 예수님을 믿었고 모두 개인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와 함께 모였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다른 은사들을 받았다. 우리는 마약 중독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집을 몇 개 열었는데, 성령의 능력으로 모두가 고통없이 약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다.
3) 신약성경은 방언 말하는 것을 허용하는가? ( 바울은 방언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는가? )
고전14장은 문맥상 교회에서 방언의 선물을 공적으로 과도하게 쓰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방언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금지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39절).
고전14: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그는 이 방언의 선물을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격려하고 있다. 그는 나는 여러분이 모두가 방언으로 말하기를 원한다고 했다(5절).
바울 자신도 자기가 “여러분 모두보다 더 많이 방언으로 말하므로 나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18절)라고 했다. 방언으로 말하지 않으면 2급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방언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를 덜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방언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선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4) 어떻게 방언의 선물(은사)을 받을 수 있는가?
방언은 성령이 주시는 여러 가지 선물 중의 하나이지 유일한 것이 아니다. 다른 은사처럼 이 은사도 믿음으로 받아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나는 여러분 모두가 방언으로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함으로써 그것이 특정한 그리스도인의 집단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그 선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열려져 있다. 이 선물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
(1) 사모하라.
(2) 하나님께 구하라.
(3) 성령과 협력하라. 하나님의 다른 은사들 처럼 성령과 협력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은사를 강제로 떠맡기지 않으신다. 방언을 달라고 기도하고서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으면 그 방언의 은사는 임할 수가 없다. 내가 성령과 협력하여 입을 열고 우리 나라 말이나 내가 아는 다른 말이 아닌 언어로 하나님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5) 성령의 충만함을 방해하는 것들 3가지
(1) 의심하는 마음 (눅11:9,10절)
가장 흔한 의심 중의 하나는 ‘구한다고 해서 주실까?’하는 생각이다. ‘구하면 받게 될까?’하는 마음이다. 에수님은 간단하게 말한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주님은 다른 말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자주 반복해서 말씀하셨을까? 우리 인간의 심성을 잘 아셨기 때문이다.
(2) 두려워하는 마음 (11-13절)
의심의 문을 통과해도 또 어떤 사람에게는 이 두려움의 장애물에 걸릴 수도 있다. 즉, 이 성령의 은사, 방언이 좋은 것일까? 하는 두려움의 마음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버지를 예로 드신다. 아이가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 아버지가 없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좋으신 아버지께서 우리 구하는 좋은 것 즉,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3) 부적합함 (13절)
우리 삶에 다른 죄들이 있고, 잘못이라고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등을 돌려야 한다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렇게 된 후에라도 가끔 자신이 가치가 없다거나 부적합하다는 느낌을 희미하게 느낄 때가 종종 있다. 하나님은 매우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은사를 주시겠지만, 나와 같이 게으르고 부족하고 성경도 잘 읽지 않고 기도도 제대로 하지 않는 나에게는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매우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결 론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것은 어느 한 번의 체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행2장부터 4장 사이에 세 번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행2:4, 4:8, 31)
바울도 성령의 충만을 계속해서 받으라고 말했다. 여기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은 현재 진행형의 시제다.
고로 우리 가운데 이미 성령체험 하신 분도 이 시간에 또 한번의 성령 체험을 사모할 수 있기 바란다.
알파토크10/ 어떻게 악에 대항할 수 있는가?
서 론/
선한 힘 뒤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악한 욕망과 세상의 유혹 뒤에는 직접, 간접적으로 악의 화신인 악마가 있다. 세상에는 악한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보다 악마를 믿는 것이 더 쉬어보인다. 성경적인 세계관에 의하면 세상의 악 뒤에는 악마가 존재한다. 악마를 뜻하는 그리스어(헬라어) 디아볼로(diabolo)는 히브리어의 사탄(satan)을 번역한 것이다.
1. 영적 전쟁의 실제/
1) 성경은 사탄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악마는 타락한 천사였을 것이라는 힌트 정도 가 있을 뿐이다.(사14:12-23).
2) 사탄은 구역성경의 몇몇 사건 속에 등장한다 (욥1장, 역대상 21:1).
3) 사탄은 단순한 어떤 힘이 아니라, 인격체다.
4) 신약성경에는 그의 활동이 더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5) 마귀(사탄)는 인격적인 영적 존재로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끊임없이 반항하고 있으며, 자신과 같은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는 악한 영들과 그 부하 귀신들을 거느리고 있다.
2. 마귀에 대한 실제적인 이해
바울의 말에 따르면 마귀(악마,사단)와 그의 천사(귀신)들을 과소 평가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1) 교활하다.
엡6:11에 ‘마귀의 궤계’라 했으니 곧 악령들은 간교하다.
2) 권세와 능력이 있다.
또한 그들에게는 힘이 있다. 6:12에 ‘정사, 권세,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라 했다.
3) 악하다.
또한 그들은 악하다. 6:12에 ‘악의 영들’이라고 했다.
따라서 우리는 적들의 강력한 공격 아래 있을 때에도 놀라서는 안된다.
1. 왜 악마의 존재를 믿어야 하는가?
요즘 사람 가운데는 ‘요즘 세상에 악마가 있기는 어디 있어!“하고 그 존재를 믿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가존재한다는 것을 믿어야 할 이유가 있다.
1) 그것은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 구약성경에는 자주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 예수님은 사탄이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믿으셨으며, 그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자주 악령들을 내 어 쫓아 사람들을 악한 세력으로부터,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셨으며, 예수님 자신과 똑같�이 할 수 있는 권능을 그의 제자들에게 주셨다.
* 신약의 나머지 부분에서도 악마가 하는 많은 일들을 언급하고 있다 (베드로전서5:8-11; 에베소서6:1-12)
2) 교회 역사 속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체험
* 초대 교부들이나 종교개혁자들, 웨슬레나 휫필드와 같은 위대한 복음전도자들,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 대다수가 실제적인 영적인 악한 세력이 주위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악령들은 우리가 주님을 섬기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의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래서 악마는 우리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하던가, 주님의 일을 하지 못하게 방해를 놓는다.
3) 상식(이성)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악마의 존재는 분명하다. 인격적인 악마의 존재를 부정하는 모든 신학적 논리는 오히려 설명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악한 관습들, 제도적인 고문과 폭력, 집단 살인, 짐승과 같은 강간, 대규모의 마약 거래, 진악한 테러 행위, 어린아이들을 성적으로 육체적으로 학대하는 것, 밀교의 활동과 사탄숭배의 의식들, 이 모든 것 뒤에 누가 있겠는가?
4) 악마에 대한 잘못된 두 가지 견해/ c.s. 루이스
a) 악마의 존재를 부인함
b) 악마의 세력을 너무 두려워 하거나 너무 악마에게 사로잡혀 사는 것
- 손금보기, 강신술, 영혼과의 접신(죽은 사람의 조언을 듣는 것), 점성술, 별점, 마술, 밀교의 힘.
성경은 이런 것들에 참여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
* 신18:9-12/
9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10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11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12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 내시느니라
* 레19:20
26 너희는 무엇이든지 피채 먹지 말며 복술을 하지 말며 술수를 행치 말며 (개역한글판 레 19장)
26 ....너희는 점을 치거나, 마법을 쓰지 못한다. (표준새번역 레 19장)
* 갈5:19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개역한글판 갈 5장)
* 계21:8
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 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 계22:15
15 개들과 술객들(마술하는 자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
만약에 우리들이 이들 중 하나에 휘말린 적이 있다 하더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 우선 회개하고, 그 활동과 관련된 것은 어떤 것이라도, 즉 책이나 부적, 비디오, 잡지 같은 것을 �애야 한다(행19:12).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것들에 건강하지 못한 관심을 가질 수 있다.
2. 악마의 전술은 무엇인가?
1) 사탄의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인간들을 파괴시키고 멸망시키는 것이다. (요10:10).
2)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여 멸망으로 잘못된 길로 가게 한다. 그 일환으로 할수만 있으면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을 막으려고 애쓴다.
* 고후4:4에 사도 바울은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했다.
영적으로 눈이 멀어있고 사단의 길을 걷고 있는 이상 그들은 자기들이 사탄의 술책에 속아살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수가 없다. 무지한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일단 그들이 생명으로 이르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자기들이 사탄의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3) 사탄의 최상의 공격은 우리를 의심으로 몰아 넣는 것이다. 창3:1이하를 보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1절). 사탄은 하와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을 불러 일으킴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 예수님에게 시험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마4:3, 6에 “만약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사탄은 예나 지금이나 그의 술책은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우리 마음 속에 의심을 불러 일으키게 하고 그 다음에 시험을 시작한다.
“하나님이 정말 이러 이러한 행동이 나쁘다고 하셨니?” 혹은 “네가 만일에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렇게 해서 l그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그분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흔들어 놓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에덴 동산의 하와에게 접근한 것이나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 먼저 가해진 공격은 의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훨씬 많은 것들을 주셨고, 단지 한 두 가지 조항만을 하지 말라고 하셨으나 사탄은 하나님의 사랑과 풍성하심보다는 한 두가지 조항에 초점을 두게 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았았다.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으면 얼마나 놀랍고 풍성한 것에 대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게 한다.
사탄은 더 나아가 형벌을 부인한다. “너희는 절대 죽지 않아.”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도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감언이설로 속이는 것이다. 그것을 확신하게 만든다.
즉, 사단과 그의 부하들은 우리에게 유혹할 때에
(1) 하나님이 주신 엄청난 복과 좋은 것들을 보지 못하게 한다.
(2) 대신에 하나님이 조건으로 내 거신 금지한 것에 초첨을 맞추어서 하나님을 잘못 왜곡시킨다.
하나님은 엄하신 분이시고, 우리의 좋은 것을 빼앗아가는 분이시고,....
(3) 불순종할 때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형벌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렇지 않아.”
(4) 결국에 사람들로 하여금 사탄과 그의 졸개들의 유혹에 떨어진다.
그 불순종의 결과,
(1) 사람들은 부끄러움과 수치를 느끼고 당황하게 된다. 아담 부부는 자기들이 벌거벗었음을 느끼고 몸을 가 리기 시작했다(7절).
(2) 하나님과의 깊은 우정이 깨어지게 된다. 하나님께서 오시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 그들은 숨었다(8절).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숨어 버린다. 그리고 아담처럼 두려워한다.
(3)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우리를 찾아오신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9절).
(4)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지자, 아담과 하와 사이에도 관계가 깨어지기 시작했다. 아담은 아내 하와의 잘못을 탓 하고,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오늘날도 하나님과 등을 등지게 되면 사람들끼리도 서로 등을 돌리고 싸우게 된다. 깨어진 결혼, 깨어진 가 정, 직장에서의 깨어진 관계, 국내외의 국가간의 분쟁과 갈등 등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떠나있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습들이다.
(5) 하나님으로부터의 형벌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
사탄은 속이는 자고, 멸망시키는 자이며, 시험하는 자고,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자다. 또한 고소하는 자다. 히브리어로 사탄은 ‘고소하는 자’, ‘중상하는 자’란 뜻이다.
사탄은 지금도 끊임없이 두 방면 모두를 향해 고소의 화살을 쏘고 있다.
1) 사람을 향해서 하나님을 고소하고 있다. 하나님에게 모든 잘못을 돌리게 한다.
“하나님은 믿을 수 없는 존재야”
2) 하나님을 향해 사람들을 고소하고 있다. 우리를 비난하고 우리로 죄책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한다. 예수님 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신 그 능력을 믿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반대로 우리로 하여금 죄에 주의를 돌리게 하실 때에는 죄책감으로 계속 시달리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회개하게 하며 동시에 죄로부터 우리가 돌이킬 수 있게 하신다.
* 시험을 받는 것과 죄는 어떻게 다른가?
악마는 우리 마음 속에 잘못임을 알고 있는 생각을 집어넣는다. 그 순간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죄로 향하는 길 위에 있는 것이다. 거부한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범하지 않으셨다 (히4:15).
사탄이 가룟 유다의 마음 속에 악한 생각을 집어넣었을 때에 유다는 그것을 거부하지 못하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우리 주님도 사탄이 주님의 마음 속에 악한 생각을 집어넣으셨을 때에 우리 주님은 그것을 거부하셨다.
*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게 하여 범죄에 빠지게 하여 우리로 고소하고 비난한다. 그것이 그의 전술임.우리가 속으로 “그래 난 역시 안돼. 나는 실패자야. 나는 글렀어.” 이런 생각은 마귀가 주는 생각이며 우리가 이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는 마귀의 시험에 이미 빠지게 된 것이며,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이런 생각들이 들려고 할 때에 예수님처럼 마귀가 주는 생각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를 빨리 결정해야 한다.
사탄은 우리가 자주 실패에 빠지게 함으로 우리를 완전히 지배하려 한다. 마치 한번의 마약 주사는 우리를 지배할 수 없으나, 그 마약 주사를 매일, 여러 달 동안, 여러 해 동안 계속 주사한다면 그 마약은 지배력을 갖게 될 것이며, 마침내 중독자가 되고 말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잘못을 알고서도 계속 같은 죄를 반복한다면 그 죄와 그 죄의 배후에서 조종하는 마귀의 세력에 붙들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원치 않는 길로 마귀가 우리를 끌고 다닐 것이다.
3. 우리의 위치는 어디인가?
1) 그리스도인들은 어두움에서 빛으로 옮겨졌다 (골1:13)
2) 사탄은 십자가에서 패배하였다 (골2:15)
(표준새번역) 골2:15 그리고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셔서, 그들을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포로로 내세우심으로써,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
(개역성경) 골2:15 정사와 권세를 1)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귀신들을 제어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 사탄은 정복된 적이다. (눅10:17-20)
4) 사탄과의 그의 심복들은 십자가에서 패배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사탄과 그의 악령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그토록 두려워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패배한 것을 알고 있다. (행16:18)
어두움의 왕국(지배) 빛의 왕국
사 탄 --------------------------- 예 수 님 죄 --------------------------- 용 서 죄의 노예 ---------------------------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 안의 자유) 죽 음 --------------------------- 생 명 파 괴 --------------------------- 구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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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 행16: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와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 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표준새번역) 행16:18 그 여자가 여러 날을 두고 이렇게 하므로, 바울이 귀찮게 생각하고, 돌아서서 그 귀신에 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니, 이 여자에게서 나오라" 하고 말하니, 바로 그 순간에 귀신이 나왔다.
우리는 이제 남은 잔당들을 소탕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적이 아직 완전히 멸망하지 않았고, 여전히 해를 입힐 수 있는 능력이 있기는 하지만, 그는 무장해제 당했으며, 패배했으며, 사기가 �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위치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승리로 인한 우리의 위치가 가지는 힘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4. 어떻게 우리 자신을 방어할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엡6:11-18).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악한 영들의 간계와 맞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장비로 완전무장을 하라(엡6:11)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에 바울은 우리가 영적 싸움에 참가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장비(무기) 6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이 6가지 무기는 꼭 필요하다.
1) 진리의 허리띠(14절)
이것은 기독교 교리와 근본을 의미한다.
# 복된 교회의 최온유 목사의 강사훈련/ 이 강사 훈련이 바로 이 무기를 갖게 하는 것이다. 5가지 기독교 신앙의 기본핵심 교리를 40시간이란 엄청난 시간을 내어서 우리 몸에 익숙하도록 훈련시킨다.
*구원의 확신, 기도응답의 확신, 사탄, 성령, 부활 -- 핵심 1주 훈련의 핵심 교리제목들.
이것은 기독교 교리 전체를 우리의 사고 체계에 적용시키는 것을 말한다. 성경을 읽고, 설교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인의 경건서적을 읽고 테이프를 들음으로써 그 일을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사탄의 거짓말인지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된다. 사탄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요8:44)
2) 의의 흉배(14절)
* 우리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의(빌3:9).
빌3:9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정 받으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에서 오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를 가지려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일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정의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머무르며 의로운 삶을 살 능력을 준다.
요일1:9에서와 같이 우리가 지은 죄가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 앞에 나와서 죄를 고백하게 될 때에 죄책감과 정죄감에서 보호를 받게 된다.
3) 평안의 복음의 신 (15절)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것.
우리가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선한 사람이 되기란 쉽지 않다. 끊임없이 복음을 전할 기회를 찾는다면, 적의 공격에 대해 효과적인 방어를 하는 것이다. 일단 가정과 직장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말하고 나면 방어수단을 강화한 것이다. 우리의 정체를 다른 믿지 않는 자들에게 나타낼 때에 우리는 그만큼 우리자신에게 큰 자극이 된다.
4) 믿음의 방패 (16절)
* 이것을 가지고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막아낼 수 있다.
* 믿음은 많은 삶을 황폐시키는 모든 냉소주의와 회의주의를 일소시킬 수 있다.
* 이 믿음이란 말 속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감히 말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 사단은 우리를 흔들어 놓기 위해 의심의 화살을 마구 쏘아댄다.
5) 구원의 투구 (17절)
* 구원의 3 가지 시제/
(1) 과거의 죄로부터 구원받음: 이미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받았다.
(2) 현재의 죄로부터 구원을 받고 있음: 우리는 지금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되고 있는 중이다.
(3) 미래의 죄로부터 구원을 받게 될 것임: 우리는 장차 죄의 존재로부터 구원될 것이다.
* 의심과 비난으로부터 마음을 보호함-- 사탄은 우리에게 의심을 주어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게 한다. 우리 신앙에서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머리가 손상되면 육체에 치명적이듯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구원에 대해서 의심이 생기면 우리 신앙의 근본이 흔들리는 것이다.
6) 성령의 검 (17절)
* 말씀의 검 --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사탄이 공격해올 때에 성경을 사용하셨다. 매번 예수님은 사단이 공격해올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셨다. 결국 사탄은 떠날 수 밖에 없었다.
* 이 말씀은 전신갑주에서 유일한 공격무기다.
* 성경암송의 중요성
5. 우리가 어떻게 공격할까?
이미 보았듯이 사단과 그의 부하들은 십자가 위에서 패배하였고,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 그 남은 잔당을 소탕하는 작업에 참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사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인의 활동을 두려워하여 오히려 떨고 있고 피하는 것이 우리가 아니라 사탄과 그의 부하들이다.
1) 기도함으로 사탄을 공격할 수 있다.
우리는 기도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영적인 전쟁에 참가하고 있다. 그리고 “싸움에서 쓰는 우리의 무기는 육체의 무기가 아니고 견고한 요새라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강한 무기다.”(고후10:4).
예수님에게 기도가 최우선이었듯이 우리에게도 기도가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 사탄은 가장 연약한 기도에 무서워 벌벌 떤다는 말을 기억하라.
2) 행동함으로 사탄을 공격할 수 있다.
* 예수님의 생애에서 기도와 행동은 함께 수반되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했으며, 병자들을 고치고 악한 영들을 내어쫓으셨다.
- 복음을 전파하고, 귀신을 내어 쫓고, 병든 자를 고치라.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게도 그와 같이 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하셨다.
결 론
* 하나님의 위대함을 묵상하라. 상대적으로 사단은 하나님에 비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다.
사단과 하나님이 서로 반대되는 같은 분량의 힘을 가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사탄은 그의 창조한 피조물의 일부일 뿐이다. 게다가 그는 패배한 적이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완전히 제거될 것이다 (계12:12).
이건 뭘까여???
E world who see the you love sun!
이 세상 누구 보다 더 널 사랑 해
다음은 또 뭘까여???
!25=i=you
느낌 이 오 는 아이 는 너
사: 사오정이구나
오: 오정이구나
정: 정말이구나.
호: 호빵이 먹고 싶다.
빵: 빵도 먹고 싶다.
맨: 맨날 먹고싶다.
텔: 텔레비전이 고장났습니다 형님
레: 레디오도 고장났습니다 형님
비: 비디오도 고장났습니다 형님
전: 전 잘못없습니다 형님
푸: 푸우의 정체는?
우: 우~루~사
알파토크11/ 왜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가?
서 론/
왜 우리는 내가 믿는 기독교에 대해 남에게 말해야 하는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어떤 이들은 자기는 열심히 믿으면서도 자기가 믿는 그 신앙을 다른 이들에게 권하지 않는 신자들도 간혹 있다. 우리는 예수를 그렇게 믿어야 하는 걸까? 그러나 성경은 말한다. 예수님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이유가 많다는 것이다.
1) 그것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명령이다. 성경에 “가라”는 말이 무려 1,514회 나오는데 신약에 233번이
마태복음에만 54번이나 나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라’고 말씀하신다.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요한에게 전해라...”
“가서 네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초청해라...”
“가서 제자를 삼고...”
2) 다른 사람들의 필요 때문에. -----> 왕하 7:3이하, 사마리아성의 4명의 문둥이(특히, 8절)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야 할 절박한 필요가 있다.
(예) 우리가 사하라 사막에 있는데 오아시스를 발견했다고 하자. 우리 주위의 목이 마른 사람들에게 목을 축일 수
있는 곳을 말해주지 않는다면 지극히 우리는 이기적인 사람들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목마른 가슴을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3) 복음을 발견하고 그것을 나누어 주고 싶은 주체할 수 없는 소망을 느끼기 때문에 전한다.
좋은 소식을 들으면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예) 우리 집에 애기가 출산했을 때 -- 아는 사람들에게 알린다. 왜냐하면 기쁜 소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좋은 소식은 빨리 퍼지게 되어 있다. 복음이 얼마나 좋은 소식인지를 알 때,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어서 가슴이 터질 것이다.
* 여기서 어떤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가서 이야기를 해야하는가? 정 반대되는 두 가지 위험이 있다.
(1) 둔감함. 분위기 파악하지 못하고 무조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자하는 무대포. 상대방에게 상처주기 쉽다.
(2) 두려움.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조차 두려워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때가 기독교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잘 알고 있을 때인 경우가 많다. 그중에 하나는 신학교 다니는 신학생들이 의외로 전도 하지 않는다.
여기 둔감함과 두려움이라는 위험을 피하려면,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일부인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걸을 때, 하나님의 영과 협력하여 사람들에게 그 관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두려움과 둔감함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
1. 현존/ 동참 전도 (Presence Evangelism)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은 우리와 아주 가까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마5:13-16을 보라. 예수님은 널리 영향을 끼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세상의 소금으로, 빛으로서 말이다. 이렇게 영향을 끼치려면 우리는 세상 속에 있거나 세상으로 들어가야 한다.
1) 우리는 소금으로 부름받았다(13절)
① 사회가 나쁘게 되는 것을 멈추게 하라고 부름받음.
냉장고가 발명되기 수 세기 전에는 고기를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소금을 썼다. 우리는 사회가 썩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리스도인으로 부름받았다. 우리는 먼저 말과 행함을 통해서 이 일을 한다.
a. 말을 함으로/ 윤리적인 기준과 윤리문제를 입을 열어서 소리내어 말하고, 하나님의 기준을 우리 주변의 사회에 알려 우리의 영향력을 행사한다. cf. 골4:6
b. 행동함으로 (요일3:18)/ 시민으로서 본분을 다하며, 더나은 사회창조를 목적으로 삼고, 정의와 자유와 개인의 존엄성을 위해 일하고, 차별을 없애는 일에 협조한다. 또한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사회적인 행동들을 해야 한다. 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지역사회, 사회 혹은 국가의 정치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기도 한다. 테레사 수녀나 홍콩에서 사역하고 있는 재키 풀린저와 같이 “가난한 자들과 함께 사역하며 일생을 보내도록 부름받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이 일에 작게 혹은 크게 동참하도록 부름받았다.
2) 우리는 빛이 되라고 부름받았다 (14절).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빛이 빛나도록 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너희 착한 행실”이라고 칭하신 그것으로 이일을 한다. 한 마디로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면, 그들은 우리의 삶을 주시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실천하는 것은 우리와 아주 가깝게 지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가장 적합한 방법이다. 이것은 가족, 직장 동료들,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그 사람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부담을 주는 셈이다. 이들에게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도리를 이야기한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지도 모른다. 그들은 오히려 순수한 사랑과 관심에 감동을 받을 것이다.
- 직장에서는 우리가 성실하고 정직하고, 진실되고, 열심히 일하며, 신뢰할만하고, 남의 험담을 하지 않으며, 다 른 사람들을 격려하고자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해야한다.
- 집에서는 말보다는 우리의 행동으로 부모, 가족, 함께 사는 자들에게 영향을 미쳐야 한다.
- 남편이나 아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경우 -- 말보다는 선한 행실을 통해서 전하라. (벧전3:1,2)
(예) 케이스 밀러의 간증 -- <새 포도주의 맛>에서 인용, 결혼 초기에 아내와 함께 누가 쓰레기를 내다 버릴 것 인가로 서로 갈등. 나중에는 쓰레기 버리는 사람을 고용하자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서로 그 일을 상대방에게 넘겨버리려고 했음. 먼저 남편인 케이스 밀러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가 아내를 전도하려고 했을 때에 말로 하기 보다 그의 변화된 삶으로 하기 시작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이 쓰레기를 버리는 것인데, 처음에는 정말 자기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으나 주님의 도우심으로 그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몇주 후에 그 부인인 매리 알렌이 예수 앞으로 나아왔다.
그러나, ‘세상의 빛’이란 것이 단지 우리의 삶의 모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입술도 포함된다. 우리 가족, 동거인, 동료들은 결국에는 우리의 신앙에 대해 질문할 것이다. 많은 경우 그들이 물어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다. 그러나 질문을 받으면 언제라도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이 가진 소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하십시오.” (벧전3:15)
그러면, 말할 기회가 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2. 설득 전도 (Persuasion Evangelism)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질문들에 대답을 듣고 싶어한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한다. 바울은 기꺼이 사람들을 설득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그것이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그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고후5:11에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 “우리는 주님이 두려운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사람들을 설득시키려고 합니다.” (표준새번역)
1) 바울의 설득 전도
(1) 데살로니가에서 (행17:4)
그가 데살로니가에 갔을 때, 그는 성경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고난을 당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야 했음을 ‘토론하고, 해석하고, 증명했다’. 그러자 유대인들 중 “몇 사람이 승복”하였다 (행17:4).
(2) 고린도에서 (행18:4)
고린도에서는 주중에는 천막을 제조하는 일을 하면서,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토론을 벌이고,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을 설득하려 하였다’ (행18:4).
기독교 신앙에 대해 대화를 하다보면, 반박하는 의견이 나오기 마련이며 우리는 이 문제들을 다룰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가장 공통적으로 질문하는 내용들이 몇 가지가 있다.
- 왜 사랑이신 하나님이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 다른 종교들을 믿으면 안되는가? (타종교에는 구원이 없는가?)
이런 질문들은 진지한 것이며, 또한 진지한 답변을 요구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이런 질문을 함으로 진짜 핵심을 피하기 위한 연막으로 질문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은 신학적으로 반대 의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고, 도덕적인 문제들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뒤로 미룬다. 다시 말해 기독교로 인해 삶의 방식이 바뀌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자신의 삶을 드리기를 꺼려한다.
# 사영리, 다리 예화 전도법, 고구마 전도법, 전도폭발, 연쇄전도법 등등...
3. 선포 전도 (Proclamation Evangelism)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즉,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알리고, 대화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이 일은 여러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1) 와보라 식의 전도/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요1:39)
*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봉사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초청하는 것이다 (요1:42).
“ (안드레는) 시몬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요1:42).
* 앨버트 맥매킨의 예/ 1934년에 일어난 일. 이 앨버트는 24세의 농부로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부터 그의 마음은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 트럭에 사람들을 가득 태우고 복음을 전하는 모임으로 데리고 갔다. 그가 특별히 데리고 가고 싶어한 잘 생긴 농부의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이 소녀, 저 소녀와 사랑에 빠지느라 바빴고, 기독교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자였다. 마침내 궁리에 궁리를 한 끝에 그 농부의 아들로 트럭을 운전하도록 부탁을 해서 가까스로 그 모임에 데리고 갈 수 있었다. 그후로 그 농부의 아들은 계속해서 그 기독교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고 어느날 저녁에 그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 드렸다. 그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인 빌리 그래함이다. 그 해가 1934년이었다. 그 이후 빌리 그래함은 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 우리 모두가 빌리 그래함 같을 수는 없지만, 앨버트 맥매킨 같을 수는 있다. 친구들을 모두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올 수는 있는 것이다.
* 에드워드 킴볼 선생의 경우/ 무디를 전도한 교사
우리 모두는 부흥사로 부름을 받지 않았으나 증인으로 부름을 받았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 끝까지, 이 세상 끝날 까지 그리스도의 증인들이다.
2) 우리 자신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
때로는 우리 자신이 복음을 설명할 기회가 오기도 한다. 복음을 제시하는 여러 가지 좋은 방법들이 있다. 복음을 설명하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경우, 행26:9-23을 보면, 바울의 증언에서 그 성경적인 모델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3부분으로 나누어진다.
# 간증을 통한 복음제시법/
<1>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어떠했는가? (행26:9-11)
<2>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는... (행26:12-15)
<3>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어떠했는가? (행26:19-23).
# 니키 검블의 방법은 <왜, 예수님이신가?>라는 소책자에 소개되어 있다.
(예) 사업이 어려운 불신자 사업가에게 전도한 택시 기사의 경우/ 공항으로 가는 택시에서 대화 중에 기사가 이렇게 말했다. “손님은 행복하지 않으신 것 같네요.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나중에 그 사업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 기사의 말에는 권위가 있었어요. 권위를 가진 사람은 나라고 생각했었죠. 어쨌거나 저는 돈을 지불했습니다.” 그런데 그 택시 기사는 뒤를 돌아보며 “이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공항에 도착했고, 그들은 함께 기도했으며, 그 기사는 이 사업가에게 기독교 신앙에 대한 소책자를 한권 주었다. 그 기사는 조금 있으면 그 곳에서 사라져버릴 사람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의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4. 능력 전도 (Power Evangelism)
사도 바울은 그의 복음이 말로만 한 것이 아니고, 능력과 성령으로 전했다고 했다,
살전1:5에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신약성경에는 복음이 선포될 때 그와 함께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이 있다.
1) 예수님의 선포 (말하심) / 막1:14,15
2) 나타내 보이심 (행함으로)
(1) 예수님은 악한 영을 쫓아내심 (막1:21-28)
(2) 병든 사람들을 고치심(막1:29-34; 40-45)으로써 계속해서 복음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셨다.
3) 예수님께서 해오신 일들을 그의 제자들에게도 하라고 하심 (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
(1) 병자를 고쳐주며,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는 것을 전하라고 하심
(눅 9:1,2,6 ; 10:1,9,19)
#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그 일을 제자들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2) 사도 바울의 경우 (살전1:5)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우리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말로만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포와 증거는 함께 간다. 때로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끌어내기도 한다.
행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나면서 앉은뱅이에게 놀라운 기적으로 그 병을 고쳐주었다. 그 놀라운 기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 근처에 몰려들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인정되자 베드로는 입을 열어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베드로는 그 군중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잘 전할 수 있었다. “바로 예수님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고 또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을 낫게 하였습니다. (행3:16).
5. 기도 전도 (Prayer Evangelism)
우리는 기도가 예수님의 생애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지에 대해서 이미 살펴보았다. 우리 주님은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동안 그는 계속해서 기도하셨다(막1:35-37).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기도는 필수적이다.
1) 불신자의 가리워진 눈이 떠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고후4:4)
많은 불신자들이 복음에 대해 눈이 멀어있다(고후4:4). 육체적인 눈은 정상이지만, 영적인 세계에는 눈이 멀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그 감겨진 눈을 뜨게 하셔서 그들이 예수님에 관한 진실을 이해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리스도를 믿게 된 후에,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 사람은 가족 중의 한 사람이거나 친구일수도 있다. 눈이 뜨여지고, 진실을 보게 되는 데에는, 거의 모든 경우 누군가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 허드슨 테일러의 경우/
OMF의 전신인 중국내륙선교회의 창시자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본토 선교의 기초를 세운 사람으로 수백만 명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렸다. 요크셔에서 자라난 그는 반항적인 10대 소년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멀리 떠나 계시고 여동생도 밖에 나가고 없을 때, 그는 기독교 경건 서적을 꺼내 들었다. 이야기만 읽고 윤리적인 부분은 건너뛰려는 생각이었다. 그는 집 뒤에 있는 헛간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다가 그는 “예수님께서 완결하신 업적”이라는 구절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기독교란 지루한 종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재미만 추구하는 삶을 살았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보는 순간, 갑자기 자기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죄의 빚을 이미 모두 갚으셨다는 확신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모셔들었다. 그리고 테일러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히 찬양하는 것 외에 해야 할 일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는 기쁨에 찬 확신이 자기 마음에 찾아오게 되었다.
10일 후에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문으로 달려가 “기뻐하실 소식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꼭 끌어 안으시며 대답했다. “알고 있다. 얘야. 네가 나에게 줄 기쁜 소식 때문에 두주 동안 나는 즐거워 했단다.” 허드슨은 깜짝 놀랐다. 어머니는 80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도, 헛간에서의 그 사건이 바로 그날 허드슨을 위해 기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느끼고 몇 시간을 무릎을 꿇은 채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일어났을 때에는 그녀의 기도가 응답을 받았다는 떨쳐버릴 수 없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결코 기도의 중요성을 잊지 않았다.
2) 우리 자신이 담대함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행4:29-31; 엡6:18; 골4:1,2)
우리는 친구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또한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할 때, 때로 부정적인 반응을 얻기도 한다. 그 순간에는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베드로와 요한이 다리를 못쓰게 된 사람을 고쳐주고 복음을 선포했을 때, 그들은 체포되었고, 그들이 계속할 경우 처참한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기도했다. 자신들을 보호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데 더 큰 용기를 주실 것과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더 많은 기적과 증거들을 보여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였다 (행4:29-30).
우리는 어느 한 가지가 아니라 위의 5가지 즉, 동참(현존), 설득, 선포, 능력, 기도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꾸준히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하면 살아가는 동안 내내 많은 인생들이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결 론
1. 포기하지 말라 (갈6:9).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말할 때 ‘아무 소용없는’ 경우는 결코 없다.
2.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말라(롬1:16). 왜냐하면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예) 전쟁에서 한 병사가 총에 맞아 참호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전우 한 명이 그에게 다가왔다. “내가 너를 위해 해 줄 일이 있겠니?” “없어. 난 죽어가고 있는 걸.” “그러면 내가 너를 대신해서 누구에겐가 전해 줄 말이 있니?” “그래, 이 주소의 사람에게 이 말을 전해줘. 나의 마지막 순간에 어렸을 때 그분이 나에게 가르치셨던 것들이 나의 죽음을 도와주웠다고 그분께 전해줘.”
그 사람은 죽어가는 병사의 옛날 주일학교 교사였다. 그 말이 그 교사에게 전해졌을 때, 그 옛날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 저를 용서해주세요. 아무런 보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몇 년 전에 주일학교 교사를 그만두었습니다.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우리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할 때 ‘아무 소용이 없는 경우’는 결코 없다.
복음은 그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일 뿐이다.
알파토크12/ 하나님은 오늘날도 치유하시는가?
서 론/ -홀리 트리니티 브롬프턴 교회에서 치유된 예들 -
1) 일본 소녀의 치유된 경우/ 몇 년 전 한 일본 소녀가 니키 검블에게 아픈 등이 치유되도록 기도 요청. 니키와 그의 팀들이 손을 얹고 기도했다. 그리고 나서 그녀를 될 수 있는대로 만나지 않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병이 낫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했기 때문. 그런데 어느날 골목에서 피하지 못하고 그 소녀를 만났다. 니키는 예의상 그녀의 상태에 대해 물었다. “등은 어떤가요?” 그랬더니 그 소녀는 기도받은 후에 완전히 나았다고 말했다. 니키는 그 말에 놀랐다. 왜냐하면 그가 생각하기를 “내가 기도한다고 병이 나을까?”하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
2) 존 윔버의 방문/ 윔버와 그의 사역팀이 니키가 사역하던 교회에 초청이 되어 왔다. 주일 하루 동안 치유에 대한 주제로 설교를 하였고, 월요일에는 60-70명이 모인 리더 모임에서 다시 치유에 관해 말했다. 윔버의 사역팀이 그 방 안에 있던 리더와 관련하여 <지식의 말씀>이 12개를 얻었다고 했다. 이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존 윔버가 쓴 <능력전도>나 <능력치유> 특히 대이빗 피치스가 쓴 <능력은사>를 보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목사님들을 위해 참고로 말씀 드리면 , 현재 교회개발원 국제총재로 있는 이윤호 박사의 세미나 중에 <성령의 불꽃 클리닉> 테잎과 그 교재를 구하면 이 부분에 대해서 상세하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제게 연락하면 됨)
처음에 지식의 말씀을 운운하는 것에 대해 니키 검블은 상당히 받기 어려웠으나 그 12개의 지식의 말씀의 은사대로 치유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그의 세계관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는 그전까지 치유에 대해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과 회의가 그날 이후에 성경을 다시 읽어가면서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치유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물론 하나님은 현대 의학과 의사와 간호사와 의학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도 사용하신다고 믿는다.
<첨가> 진 목사 나 자신의 치유에 대한 생각의 변화/
저 역시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성령의 역사와 은사에 대해 개방적이었으나 대학에 들어가서 네비게이토 선교회에 공부하면서 성령의 은사와 치유의 역사 등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게 되었다(참고로, 네비게이토의 신학은 세대주의 입장을 갖고 있음). 그리고 청년시절에는 나를 도와주었던 신앙의 선배로부터 전통적인 성령론을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1985년도에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그곳에 가서 성령론을 배운 것은 과거 청년시절에 배운 것의 복습에 불과했다. 그런데 1988년 초에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치고 인도네시아로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 일시 귀국한 선교사를 방문하게 되었다( 이분은 과거 청년 시절에 내게 성령론을 가르쳐준 분임). 그런데 그가 매주 월요일마다 당시 선교단체 리더들을 중심으로 세미나를 실시했다. 나는 그때에 신학교 공부를 마쳤지만 신학교가 가까운 수원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매주 월요일마다 그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 첫 세미나는 치유사역에 대한 세미나였는데, 몇번 참석하면서 굉장히 갈등을 했다. 내가 과거 신학교에 배운 것과 상충되는 부분이 나타나게 되자 이 선교사님과는 이제 만나지 말아야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 다시 생각한 것은 그가 내게 청년시절에 전통적인 성령론을 가르쳐준 장본인이 아닌가! 그런 그가 이렇게 변한데는 무슨 이유가 있겠다 싶어서 계속 참석하면서 내 생각 특히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면서 다시 성령을 환영하는 사역자로 바뀌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A. 성경에 나타난 치유
1. 구약성경의 경우
1) 하나님의 약속/ 순종하면 건강과 치유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심.
출23:25,26 / 신28장 / 시41:3 /
2) 하나님의 본성/ 치유는 하나님의 본성 중의 하나임.
* 출23:26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3) 하나님이 병을 고치신 실례/ 왕상13:6, 왕하4:8-37, 사38장 등.
* 나아만 장군의 경우/ 왕하5:14
* 히스기야의 경우/ 사38,39장
구약에 나타난 치유와 그 기적에 대해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1) 치유는 한 사람의 생애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2) 초자연적인 치유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거기에는 어떤 대가도 지불되어서는 안됨. 게하시의 실수.
(3) 구약은 하나님 나라의 성령의 부으심의 맛만 보여주었을 뿐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와 성령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선언하신 지금, 신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이런 놀라운 치유와 기적을 행하신다는 것에 대해 더 큰 기대와 확신을 가질 수 있다.
2. 신약성경의 경우
1) 예수님의 가르침
막1:15에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는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이었다. 예수님이 쓰신 ‘나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바실레이아>란 말인데, 이 말의 의미는 정치적이나 지리적인 영토의 의미만 아니라, 지배하고 다스리는 활동의 개념까지도 포함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란 말은 <하나님의 지배와 다스리심>을 의미한다.
- 원칙적으로 실현된 미래 미 래
(1) 하나님 나라의 미래/ 마13:49에 “세상의 끝날” 곧 예수님의 재림이 임할 때에 가서야 하나님 나라의 미래의 모습이 펼쳐지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처음 오셨을 때는 연약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다시 오실 때에는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예 수 님 의
탄 생 |
예 수 우리는 지금 님 여기에 의 살고 있다 재 림
|
앞으로 올 시대 |
현 재 시 대 -------------* |
|
그러므로 이 세상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에 둘러 싸여 오실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고 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모든 사람이 다 알게 될 것이다.
복음을 거절한 사람들에게는 그 날이 멸망의 날이 될 것이고(살후1:8,9),
복음을 수용한 사람들에게는 그 날이 하나님 나라에 있는 그들의 유업을 받는 날이 될 것이다(마25:34).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고(계21:1), 예수님이 바로 그 곳에 계실 것이다. 그 곳에는 더 이상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병도 없을 것이다(계21:4). 모든 이들이 그 날에 완전히 치유를 받을 것이다.
(2)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예수님의 초림과 더불어 시작이 되었음. 그러나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았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재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맛보고 있으나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때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될 것임.
예수님의 말씀에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고 하심(눅17:20-21).
*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인 동시에 ‘아직’이기도 하다 (위의 그림 참조). 우리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살고 있다. 구세대는 계속되고 있지만 지금 이 시대에는 새로운 시대의 힘이 지금 시대 속에 뿜어져 나오고
있다. 미래의 나라가 역사 속에 들어온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 속에 들어와 있음을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악한 영을 쫓아내심으로써 그 증거를 보여주셨다.
* 예수님의 병고치심/
복음서의 1/4 (25%)이 치유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님이 유대에 있는 모든 아픈 사람들을 치유하신 것은 아니지만, 개인이나 사람들 무리를 치유하신 것을 자주 읽을 수 있다. (마4:24; 9:35; 막6:56; 눅4:40; 9:11).
* 예수님의 명령/
(1) 12사도들에게 주신 명령 (마9:35-10:8, 눅9:1,2)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병고치는 권능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병든 자를 고치라고 내어 보내셨다.
(2) 70명에게 주신 명령 (눅10:1-20)
(3) 이후의 모든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 (마28:17-20; 막16:15-20; 요14:9-14)
특히 요14:9-14을 보자.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B. 초대 교회 안의 치유
사도행전에서는 주님의 사명이 실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제자들은 가르치고 전하는 일을 계속했으며, 또한 아픈 자들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귀신을 내쫓았다.
1. 치유와 기적의 많은 예들
1) 행3:1-10
2) 행5:12-16
3) 사도 바울의 경우/ 고전12-14장 바울은 치유와 관련된 능력들이 사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믿었다.
4) 히브리서 기자/ 히2:4에 보면, 하나님이 그의 말씀을 “표적과 기이한 일과 여러 가지 기적을 보이시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령의 선물을 나누어 주심으로써” 증언해 주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어디를 봐도 치유가 역사의 특정한 시기에 국한된 것이라는 구절은 없다. 그와 반대로, 치유는 예수님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표적의 하나이며,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그 나라의 활동의 일부로 기적적인 치유를 계속 행하실 것을 기대해야 한다.
2. 초대 교회의 역사
초기 교회 교부들과 지도자들의 글을 보면, 치유가 초기 교회의 일상적인 활동의 일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이레니우스 (약 130-200년)/ 리옹의 주교이며 초기 교회의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이레니우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진실로 그의(예수의) 제자인 사람들은 그분께 은총을 받아 각자가 그분으로부터 받은 선물(은사)에 따라, 그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했다. 어떤 이들은 악마(귀신/악한 영)를 쫓았는데 그것은 악한 영으로부터 깨끗하게 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 중략......... 또 어떤 이들은 손을 얹어 병든 사람들을 치유했는데, 그들은 모두 건강하게 되었다. 게다가, 내가 이미 말했듯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우리들과 함께 여러 해 동안 살기도 했다.
2) 오리겐 (약185-254년)/ 또 다른 신학자며 성경학자이자 초기교회 지도자였던 오리겐은 그리스도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그리스도인들)은 귀신을 내어쫓고 많은 사람들의 병을 치유하며, 어떤 일들을 미리 내다보며...
예수의 이름으로 병을 없앨 수 있다.“
주후 200년이 지난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직접 고치시리라고 기대했다.
3) 히포의 어거스틴 (354-430년)/ 많은 사람들이 이 어거스틴을 4세기 동안의 가장 훌륭한 신학자로, 심지어는 기독교 역사에서 사도 바울 이후 가장 훌륭한 신학자로 이야기하는데, 그의 책 <하나님의 도성>에서 “지금까 지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이 행해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그가 밀란에 있을 때에 시각 장애인의 눈이 회복된 예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가 함께 살고 있었던 이노센티우스라는 사람의 병이 나은 이야기를 상세 히 적고 있다.
또한 그 나라에서 가장 높은 신분의 여성인 이노센티아라는 여성은 유방암을 앓고 있었는데, 의사들이 도저히 치료할 수 없다고 했지만, 깨끗이 나았다. 의사는 그녀가 어떻게 해서 낫게 되었는지 밝혀내고자 했다. 예수님께서 그녀를 치유해주셨다고 하자 의사는 화를 내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재빨리 이렇게 대답했다. “나흘이나 죽어있던 사람을 살리신 예수님이신데, 암을 고치시는게 뭐 대단한 일이겠어요?”
그는 계속해서 “세례를 받는 도중에” 치료를 받은 통풍을 앓던 의사와 , 역시 세례 중에 중풍 뿐 아니라 탈장까지도 치유를 받은 늙은 코메디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자신이 너무도 많은 기적적인 치유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기적들을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다. 심지어 지금도 많은 기적들이 행해지고 있다. 우리가 이제까지 읽은 기적들을 행하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사람들을 사용하여, 그가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기적을 행하고 계시는 것이다.”
# 영국의 합리주의자이며, 역사학자인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은 <로마제국의 흥망 성쇠>의 작가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기독교가 놀랍도록 빠르게 성장한 이유를 5가지로 지적했다. 그 중에 하나는 “초기 교회의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이다. 그는 “기독교 교회는 사도들과 그들의 첫 번 째 제자들 때부터 방언, 환상, 예언과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치료하며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의 은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주장했다.”라고 말한다.
‘기번’은 또한 “희의주의가 보이지 않게 숨어있으며, 심지어는 가장 신실한 사람조차도 무의식적으로 회의주의를 품고있는” 자기 시대의 모순을 지적했다. 초기 교회와는 반대로 ‘기번’ 당시의 교회에서는 “초자연적인 진실을 적극적으로 동의하기보다는 냉정하고 조용히 묵인할 뿐이다. 오랫동안 자연의 다양한 법칙을 관찰하고 존중하는데 익숙해진 나머지 우리의 이성, 아니 적어도 우리의 상상력은 신이 눈으로 볼 수 있는 활동을 한다는 것을 시인할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이런 말과 같은 말을 우리 시대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C. 오늘날의 치유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사람들을 치유하신다. 하나님께서 치유의 역사를 보이신 멋진 이야기들이 너무도 많이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을 예로 들어야 할지 모를 정도다.
1, 치유의 예들
1) 아제이 고힐/ 영국 홀리 트리니티 브럼프턴 교회 교인으로 그 교회 세례식에서 그가 간증한 내용.
그는 케냐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1971년에 이주한 힌두교인. 21세에 그는 만성피부병을 앓게 되었는데, 그의 몸무게가 80Kg에서 53Kg으로 줄었다. 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세계 여러 나라를 돌며 치료를 받았지만 고치질 못했다.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 자기 수입의 80%를 썼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그는 간에 영향을 끼치는 독한 약을 복용했다. 결국 그는 직장도 포기했고 그의 병은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퍼졌다. 그의 모습은 너무 끔찍해져서 수영장에도 갈 수 없었고 티셔츠도 입을 수 없었다. 그의 아내와 아들은 그를 떠나고 말았다. 그는 죽고 싶었다. 1987년 8월 20일. 성 토마스 병원에 입원하여 휠체어에 앉아있었다. 그는 병원에서 다양한 치료를 받으며 7주 이상을 보냈다. 10월 14일. 그는 침대에 누워 죽기만 바라고 있었다. 그는 외쳤다.
“하나님, 만약 보고 계시다면, 저를 죽게 해주십시오. 제가 잘못한 일이 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그가 기도할 때에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는 사물함을 뒤져서 성경책을 찾았고, 그가 찾아 읽은 성경이 바로 시38편이었다. 시38:1-11; 21-22을 읽었다.
모든 구절 하나 하나가 다 자기와 관련된 것 같았다. 그는 하나님께 그를 치유해달라고 기도한 후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날 아침, 그가 깨어났을 때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다. 그는 욕실로 가서 욕조에 몸을 담궜다. 욕조의 물을 보니 그의 피부가 벗겨져서 욕조 안에 떠 있었다. 그는 간호사를 불러 하나님이 자기를 치료하고 계신다고 말했다. 그의 피부는 전부 어린 아이의 것 같았다. 완전히 나아버렸다. 그 이후로 그는 아들과 다시 상봉했다. 그는 육체적인 치유보다 그의 삶에 일어난 내적치유가 더욱 큰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매일을 예수님을 위해 삽니다. 나는 오늘 그의 종입니다.”
그렇다. 우리 하나님은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할렐루야.
“나는 구원한다”라는 의미의 헬라어는 “나는 치유한다”라는 의미도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구원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건강에도 관심을 가지신다.
언젠가 우리는 완벽한 새로운 몸을 갖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시는 그 날에...
# 물론 우리가 기도하는 모든 사람의 병이 낫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우리의 몸은 썩어간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치유를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옳을 수도 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에 민감해야 한다.
# 그렇다고 사람들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는 일에 낙심할 필요는 없다. 더 많이 기도할수록, 더 많이 치유를 받을 것이다. 병이 낫지 않는 사람들도 기도를 받는 것이 축복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들이 사랑으로 기도를 받았다면 말이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받았을 때에 병이 낫지는 않았지만 그의 일생 중에 가장 강력한 성령의 체험을 가졌으며, 그의 삶에 변화가 되는 경우도 있다.
# 어떤 사람들은 치유의 은사를 받기도 한다(고전12:9). 오늘날, 치유의 은사를 받은 자들은 세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맡겨야 되는 것은 아니다. 치유의 사명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 복음을 전파하는 은사를 우리 모두가 다 받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처럼, 우리 모두가 치유의 은사를 가지지는 않았지만, 우리 모두는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부름받은 것이다.
2) 이윤호 목사와 진계중 목사의 예들
2. 치유 기도의 실제 (아픈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치유기도할 것인가?)
우선 우리가 꼭 기억해야하는 것은 치유하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1)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라.
우리에게 어떤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기도하면 된다. 예수님께서 치유하신 동기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다(마1:41, 마9:36).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한다면 병자들을 존중할 것이고,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다. 치유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믿는다면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치유를 일으키는 것은 우리의 기도 소리가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유기도하는데 간단한 형식이 있다.
2) 치유 기도의 방법
(1) 간단한 면접/ 어디가 아픈가? 치유를 위해 어디가 아프며, 무엇을 위해 기도해주기를 원하지는 물으라.
“어디가 아프세요?” “얼마나 오래 고통을 당하셨나요?” “왜 아픈지 당신은 생각해보셨어요?”
(2) 성령님께 물으라/ 왜 이 환자가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라.
대부분의 문제는 겉으로 들어난 것 이상으로 그 문제 이면에 깊은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주님께 물어보라.
(예) 한 여성의 등의 통증이 왼쪽 엉덩이까지 번져 잠을 자거나 움직이고 힐하는데 장애가 되었다. 의사는 관절염 약을 처방해주었다. 어느날 그 여성이 기도를 부탁했다. 그를 위해 기도하던 한 소녀(사역자)가 마음에 ‘용서’라는 단어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갈등 끝에 그는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히던 사람을 용서할 수가 있었고, 부분적으로 낫게 되었다. 친구에게 용서의 편지를 부치는 순간 그녀는 완전히 낫게 되었다.
특히 치유사역할 때에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많은 도움이 된다.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우리 생각에 어떤 그림이나 글자나 환상, 느낌 등으로 온다. 또는 환자의 아픈 부위나 그 아픔이 기도하는 사역자에게 동일하게 전위가 되기도 한다. (동정 고통)
(3)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기도의 형태를 결정하라.
신약성경에는 환자들을 위해 치유기도할 때에 다양한 방법으로 했다.
*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며 기도하기도 하고,
* 환자들에게 기도하면서 기르믈 붓기도 한다 (약5:14).
* 어떤 경우에는 손을 얹고 기도하기도 한다 (눅4:40). --> 특히 환자를 안수할 때는 몇 가지 원칙이 필요하다.
a) 이성에게는 직접 환부에 손을 대지 않는다. 환부에서 약간 거리를 두고 기도한다.
b) 머리에 안수할 때에도 가볍게 손을 대든지 아니면 약간 간격을 두고 기도한다.
c) 이성을 위해 기도할 때는 혼자서 기도하지 않는다.
(4) 기도한 후에 기도를 받은 자에게 물어보라.
기도를 한 후, 기도받은 자에게 어떤 느낌이나 경험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물어보라. 때로는 아무 것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기도받는 도중에 자기의 몸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도 하며, 또 다른 경우에는 훨씬 나아졌다고 느끼지만 온전히 낫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시각장애인에게 하던 방법대로 계속해서 기도할 필요가 있다 (막8:22-25).
우리는 그 병에 대해 기도하기를 그만두라고 하는 생각이 들거나 하나님의 분명한 인도가 있을 때까지는 계속해서 그 병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5) 그 다음에는?
a) 치유를 위해 기도한 후에는 그들의 병이 치유되었든 그렇지 않든 간에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어야 하며, 얼마든지 다시 와서 기도를 받을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b) 병이 치유되지 않는 것에 대해 환자의 믿음이 없거나 부족하다고 그 책임을 환자에게 떠넘기지 말라.
c) 언제나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기도하고 그들의 삶은 교회라는 치유공동체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치유가 일어나는 경우도 많다.
d) 마지막으로 인내를 가지고서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즉각적이고 극적인 결과를 보지 못할 때에는 우리가 낙심하기 쉽다. 우리는 계속해서 기도하고 또한 계속해서 기도를 받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
(예) 브롬톤 병원에 한 여인의 자녀를 위해 기도한 니키의 간증/
그 여인은 30대로 자녀가 3명이고 넷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법적인 남편은 그녀를 떠났다. 그녀는 혼자 살고 있었다. 그녀의 세 번째 아이는 다운 증후군으로 심장에 구멍이 생겨 수술을 받았지만, 성공적이지 못해 기계장치에 의존해서 생명을 부지하고 있었다. 의료진들은 이 아이는 소망이 없다고 하며 기계장치를 제거하자고 했지만 이 엄마는 반대했다. 마지막 방법을 시도해 보고자 했다. 그녀는 누군가 아이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바랬다. 그녀는 아직 예수를 믿지 않았었다. 그러던 차에 니키 검블이 연결이 되었고, 그가 가서 그 아이를 위해 기도했다.
이 아이의 온몸은 튜브로 꽃혀있었고 전신이 멍이 들고 부풀어 올라있었다. 그 엄마는 말하기를 그 아이가 회복된다고 해도 오랜 시간 심장이 멈추어 있었기 때문에 뇌에 손상이 있을 것이라고 의사가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면서도 닉키 검블에게 기도해줄 것을 부탁했다. 니키는 하나님께서 아이를 낫게 해주실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다. 그리고 나서 그 엄마에게 복음을 소개하고 그녀가 예수님께 그의 삶을 드리도록 했다. 그리고 이틀 후에 다시 와 보았다. 니키를 보자마자 그 어머니가 뛰어왔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연락하려고 했어요. 놀라운 일이 벌어졌거든요. 기도해주신 그 날 밤 아이가 완전히 변했죠. 아이는 회복되었어요.” 며칠 후에 그 아이는 회복되어 퇴원했다. 그후에 연락이 끊겼다가 6개월 후에 다른 병원의 엘리베이터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 아이가 더 많이 회복되어 놀랍도록 몰라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직 다운 증후군은 남아있지만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다고 기뻐했다.
그 여인은 그 자녀의 회복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았고 주변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여인은 예수를 영접하고 나서 삶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동거하던 사람과도 결혼하여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녀와 그 주변의 사람들이 그렇게 변화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교회란 무엇인가?
영국의 한 교회 목사님이 어린 소년을 데리고 교회를 구경시키다가 묘지를 보여주게 되었다. “이것들은 교회에서 목회(service)를 하시다가 돌아가신 분들의 이름이란다.” 그러자 그 소년이 묻기를, “이분들은 아침 예배(service) 때 돌아가셨나요, 아니면 저녁예배 때 돌아가셨나요?”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교회라는 말을 목회자들과 연관시킨다.
A. 교회는 다음의 것들이 아니다.
1. 예배가 아니다.
2. 목회자가 아니다.
3. 교단이 아니다.
4. 건물(빌딩)이 아니다.
B. 교회란 무엇인가?
신약성경에는 100개가 넘는 교회에 대한 이미지와 비유가 있다. 우리는 오늘 여기에서 교회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5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하나님의 백성이다. (엡2:19-22)
교회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교회를 뜻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집회’,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의미다.
1) 세례/들어감(가입)의 표시
- 교회에서 받는 세례는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공식적인 상징이다. 즉
(1) 죄를 씻김/
죄로부터 깨끗함을 받는 것(고전6:11)
(2)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함(롬6:3-5; 골2:12)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그와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3) 성령의 인치심을 받음 (고전12:13)
성령께서 우리 삶에 가져다 주시는 생명의 물(고전12:13)을 상징한다.
즉,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한 사람이 된다.
예수님 자신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서 제자를 삼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다 (마28:19)
2) 우주적인 교회 (엡3:10, 21, 5:23, 25) = 세계적인 교회
때로는 신약성경에서 교회라고 할 때 그것은 특정한 지역교회가 아닌 보편적인 교회를 언급하기도 한다. 보편적인 교회는 그 범위가 광범위하다. 브리테니카 사전에 의하면 오늘날 254개 나라에 17억의 인구가 예수를 믿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전 세계 인구의 약 1/3에 해당된다.
세계적인 교회는 크게 3가지로 분류되기도 한다.
(1) 핍박받는 교회/ 공산권, 모슬렘권, 힌두권, 불교권 중에서 극도로 폭압적인 정권이 들어서 있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고 있다.
(2) 제2/3세계 / 가장 빠른 속도로 교회가 성장하고 있다. 케냐같은 나라는 인구의 80%가 그리스도인으로 추 청된다.
(3) 자유세계의 교회/ 일반적으로 교세가 감소 추세에 있다. 영국 교회의 보고에 따르면, 1980년대 초반 5년 동안에만 100만 명의 신도를 잃었다고 한다. 한때 서구는 2/3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어서 서구 지역이 말로 다시 복음이 필요하고 복음화가 이루어져야 할 곳이 되었다. 미국도 영국도 선교사가 필요한 나라가 되었다.
3) 개 교회 (지역 교회)
(1) 갈라디아 교회 (고전16:1)
아시아의 교회들 (고전16:19)
모든 교회들 (롬16:5, 고전16:19)
(2) 3가지 형태의 교회들 (교인 수에 따라)
a. 대규모 예배모임(Celebration): 큰 교회에서 매주 모이는 주일예배나 혹은 여러 작은 교회들이 예배를 위해 함께 연합하여 모이는 모임들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월절, 오순절에 특별한 대규모 모임으로 축제 분위기 속에 한데 모였다. 이 모임에서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약점으로는 서로를 잘 알 수가 없다.
b. 회중 (Congregation): 중간 규모의 모임이다. 12명 이상 80명 정도의 사이즈의 모임이다. 이 사이즈에서는 성령의 은사와 사역이 사랑과 수용의 분위기 속에서 일어날 수 있다.
c. 쎌 (Cell): 소그룹 모임 혹은 쎌, 구역 등이 이에 해당되는 규모의 모임이다. 2명에서 12명 내외로 모인다.함께 모여 성경공부하거나 함께 기도하거나 서로 교제하기 위해 모인다. 서로 간에 비밀이 없이 자신을 개방하며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며, 서로 서로에 대해 책임을 갖게 된다.
2. 하나님의 가족이다 (엡2:14-18)
1) 우리 모두는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다(요1:12)
예수를 마음에 영접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1:12). 교회를 하나로 묶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며, 예수는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성령은 우리의 내주자가 되신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된다. 형제와 자매들이 때때로 서로 틀어지고 오랜 시간 서로 만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형제와 자매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 관계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때로 분열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하나인 것이다.
- 예수님의 경우/우리 주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분은 그의 제자들 이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요17:11)
- 사도 바울의 경우/ 또한 사도 바울도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다 (엡4:3).
2) 서로가 서로에게 형제, 자매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요일4:19-21; 5:1)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다. 보이는 자기의 형제나 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 자매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이 계명을 주님에게서 받았다.
3) 성 삼위 하나님의 연합과 교제 (요일1:3)
4) 우리의 사귐은 하나님과의 사귐이며(요일1:7), 동시에 인종, 피부색, 교육, 배경, 모든 문화의 장벽을
초월한다. 서로 서로 사귀라. (히10:24, 25)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서로 사귀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세상에는 혼자 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혼자서 결혼할 수 없으며, 혼자서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다.
* 조개탄의 비유/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무시하는 경우에 주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과 믿음이 식어버린다.
고로 교제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난로 바깥에 있는 석탄과 같은 것이다.
* 마틴 루터의 일기 내용 -- “집에 혼자 있을 때는 따뜻함도 활기도 없다. 그러나 교회에서 여러 사람들이
한데 모이면, 내 마음 속에는 불이 켜지며 그것은 스스로 환한 빛을 낸다.”
3. 그리스도의 몸 (고전12:1-26)
사울이 기독교를 박해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부활하신 주를 만났다. 그때에 예수께서 사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행9:4). 예수님은 자기 교회를 자기 몸의 연장으로 간주하셨다. 이 만남으로 인해 사울은 교회가 사실상 그리스도의 몸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오래된 찬송가 가사에 이런 말이 있다.
그는 손이 없지만 우리의 손이 있어 오늘도 그의 일을 하시고
그는 발이 없지만 우리의 발이 잇어 사람들을 그의 길로 인도하시고
그는 목소리가 없지만 우리의 목소리가 있어 사람들에게 그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말하고
그는 도움이 없지만 우리의 도움이 있어 그들을 그의 곁으로 인도하신다.
1) 성령의 일치/ 성령으로 하나됨 (고전12:4-6, 12, 13)
2) 지체의 다양성/
*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다른 지체들에 대해 가지는 잘못된 태도 2가지
(1) 열등감을 느끼며 자신들이 다른 지체에게 줄 것이 없다고 생각함 (고전12:14-19)
- 교회를 둘러보면 열등감을 느끼고 따라서 자신을 필요없는 존재로 느끼기가 쉽다. 그 결과로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된다. 사실, 우리 모두가 필요한 존재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자신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 교회는 제 기능을 다히지 못한다.
(2) 우월감에 빠져(21-25절) ‘나는 당신이 필요없소’라고 말하는 자들의 문제
이런 자세도 어릭석은 것이다. 발이 없는 몸은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21절). 눈에 보이지 않는 지체가 눈에 잘 띄는 곳에 있는 지체보다 훨씬 더 중요할 때가 많다.
3) 상호 의존/
우리 모두가 한 몸에 속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한 팀의 일원이며 각자가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26절의 말대로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같이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26절).
** 교회의 문제는 목사나 전임사역자가 주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오순절 교회가 남미에서 그렇게 눈에 띄게 성장한 것은 다름아닌 교회가 평신도 중심의 교회라는 것이다.
4. 성 전
신약이 말하는 유일한 교회 건물은 사람들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서 함께 건물을 이루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거하실 곳이 되어갑니다.’ (엡2:22)라고 했다.
예수님은 가장 중요한 주춧돌이 되신다. 그가 교회를 세우셨으며, 그를 중심으로 교회가 지어졌다.
1) 구약에서는 장막(나중에는 성전)이 이스라엘 예배의 중심
-- 사람들은 이곳에 나와 하나님을 만났다. 그러나 그의 임재에 다가가는 것은 엄격히 제한되었다.
2)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모든 믿는 자들이 아버지께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그의 임재는 더 이상 물리적인 성전 안에 제한되어 있지 않으며, 이제는 성령으로 모든 믿는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 그의 임재는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있을 때 감지된다(마18:20).
하나님의 새로운 성전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거하실 곳’인 교회이다.
우리는 더 이상 죄 때문에 희생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다. 사실 할 수도 없다. 우리는 주님의 성만찬 예배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의 희생을 기억하면서 그 은혜에 동참하는 것이다.
빵과 포도주를 받으면서 우리는 4개의 방향을 바라본다.
(1) 감사함으로 뒤를 돌아본다.
성만찬을 받으면서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사라지게 된 것을 감사하면서 십자 가를 뒤돌아본다 (마26:26-28)
(2) 고대하는 마음으로 앞을 바라본다.
예수님은 그의 죽음을 기억하는 방법으로 식사를 선택하셨다. 식사는 종종 큰 일을 축하하는 방법으로 사용된 다. 언젠가 천국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혼인잔치’를 영원히 축하하게 될 것이다. 빵과 포도주는 이것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눅22:16; 고전11:26)
(3) 주위를 둘러보며 그리스도인 가족을 본다
한 잔으로 마시고 한 덩어리의 빵을 먹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상징한다.
(4) 기대하는 마음으로 위를 바라본다.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힌다. 예수님은 그가 죽으신 후에 그의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마18:20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자리에는 내가 그들과 함께 있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본다. 때로는 이런 때에 결신, 치유, 그리고 예수님의 임재를 강하게 만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5. 그리스도의 신부 (엡5:25-27)
이것은 신약에 나오는 교회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비유 중의 하나다.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해 말하면서 “이 비밀은 큽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엡5:32)라고 했다.
구약이 이스라엘의 남편되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약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남편되심과 모든 인간의 결혼 관계의 모델이 되심을 말하고 있다.
1) 그분의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 (25절) -- 교회를 위해 자기 몸을 드림(희생)
2) 그분의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목적 (27절 ; 계21:2) --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함
3) 우리의 반응 (벧전2:9) -- 그의 업적을 선전하게 함
- 그의 업적을 선포하게 하는 것에는 예배와 전도가 포함됨
*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존경을 우리의 온 존재로-마음과 영혼과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 전도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보답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교회로 데리고 오라고-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게 그의 놀라운 위엄을 선포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다.
결 론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신다. 복음도 변치 않는다. 예배를 드릴 때나 전도를 할 때는 시대에 맞는 영원한 진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단지 흘러가는 유행에 맞추기 위해 교리나 복음의 내용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는 방법이나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현대를 사는 자들에게 울림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요즘 음악과 요즘 언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
만일 교회가 신약성경의 모습에 가까워진다면 교회 예배는 단조롭거나 권태로움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알파토크14/ 어떻게 남은 삶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을까?
서 론
1.)우리의 소원
우리 모두는 단 한 번의 삶을 산다. D.H. 로렌스는 말하기를 “사람이 두 번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첫 번째는 실수를 하고, 두 번째에서는 그것을 통해 득을 볼텐데.”라고 했다. 그러나 삶에는 연습이 없다. 우리는 곧장 무대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2) 우리의 소원을 만족시키시는 하나님
그러나 과거에 실수를 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면 남아있는 삶을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가 있다. 바울은 롬12:1,2에서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
1. 본받지 말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주위의 세상과 달라야 한다. 바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고 썼다. 필립스 역본 성경에는 이 말을 이렇게 번역했다. “주변의 세상이 당신을 그 틀에 끼워 맞추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것은 물론 쉽지 않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되라는 본을 받으라는 유혹과 압력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때때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옷을 벗어버리고 믿지 않는 불신자들의 무리 속에 섞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더 쉬워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에 있든 상황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우리는 구별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1) 그리스도인들은 독특한 존재로 부름을 받았다.
그리스도인은 주위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카말레온이 되기 보다는 번데기가 되어야 한다. 번데기는 나비로 변한다. 카멜레온은 색깔을 바꿀 수 있는 파충류로서 초록, 노랑, 크림색이나 어두운 갈색 빛을 띨 수 있다. 카멜레온이 뒷 배경에 색을 �춰 색깔이 변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와 비슷하게 카멜레온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환경 속에 동화되어,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리스도인임을 행복하게 생각하고, 기독교가 아닌 환경 속에서는 서슴 없이 그들의 기준을 바꾼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뒷배경에 맞추어서는 안된다. 다르다라는 것은 이상하다는 것과는 다르다. 괴상한 옷을 입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종교적인 언어로 말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극히 정상일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갈수록 우리는 더욱 ‘정상’- 더욱 온전한 인간이 되어간다는 의미에서 - 이 되어간다.
2)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깨고 나아와 한다.
예수님을 따를 때에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방향으로 살 수 있다.
(1) 다른 사람을 험담하는 사람이 되기 보다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격려자가
되어야 하고
(2) 투덜대고 불평하기 보다는 감사와 기쁨으로 가득차야 한다.
(3) 비도덕적인 성에 탐닉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살아갈 때에 축복된 삶을 살게 된다.
# 성윤리에 대하여 /
이 성윤리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분명한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성윤리와 결혼에 대해 자주 제기되는 질문은 “결혼이라는 울타리 너머의 성관계는 어떤가요? 그것이 잘못인가요? 성경 어디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까? 왜 그것이 나쁜가요?” 등이다.
하나님의 방식은 다른 세상의 것에 비해 우월하다. 하나님께서 결혼을 발명하셨다. 또한 섹스도 발명하셨다. 섹스를 만드신 하나님은 어떻게 그것을 최대한으로 즐길 수 있는가도 말씀하신다. 성관계의 성경적인 배경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결혼을 통한 평생에 걸친 헌신이다. 창2:24에 나와있고, 예수님께서 막10:7에서 이 말씀을 재 인용하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결혼이란 부모를 떠나는 공식적인 행위와 일생 동안의 헌신을 의미한다. 자신의 배우자와 결합하되-히브리어로 결합하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서로 붙는다라는 뜻임 - 육체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심리적으로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 몸을 이룬다’는 기독교적인 의미다. 결혼에 관한 성경적인 교의는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즐겁고, 가슴 떨리며, 적극적인 결혼관이다.
하나님은 그가 정하신 경계선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하신다. ‘자유분방한 성’ 같은 것은 없다. 모든 섹스 행위는 ‘한 몸’으로 결합되게 한다(고전6:13-20). 이 결합이 깨어질 때 사람들은 상처를 받는다. 카드 두 장을 풀로 붙였다가 디시 떼어낼 때에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각각의 조각들이 다른 쪽에 남는 것을 보게 된다. 이와 비슷하게 한 몸이 되었다가 갈라지게 되면 상처가 남게 된다. 깨어진 관계에는 우리 자신의 깨어진 조각이 남게 된다.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기준을 무시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깨어진 결혼, 깨어진 마음, 상처받은 아이들, 성병, 삶이 뒤죽박죽되어버림.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이 지켜진 가정에서는 성과 결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그 틀에 끼워 맞추지 못하도록 하자. 오히려 세상을 향해서 우리에게 훨씬 더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도록 하자. 빛이 빛날 때에 사람들은 그 빛에 끌리기 마련이다.
2. 변화를 받으라
바울은 우리가 ‘변화를 받아야 한다’(롬12:2)라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아름다운 나비로 변하는 번데기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에 변화가 생기는 것을 두려워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버리라고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쓰레기는 없애버리라고 요구하신다. 쓰레기를 버려야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멋진 것들을 즐길 수 있다.
(예) 어떤 여인은 거리를 배회하면서 구걸하였다.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는 공격적으로 대했다. 그런 거리 여인이 죽어서 니키 검블이 장례식을 치뤄주었다. 놀란 것은 그 거리여인은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았다는 것이다. 호화로운 아파트와 값나가는 값진 그림들 여러 점을 얻었지만 쓰레기를 가득 넣은 자신의 가방을 끌어앉고 걸거리에서 살았었다.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던 방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상속받은 유산을 즐길 수가 없었다.
기억하라.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상의 것들을 기업으로 받았음을 말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모든 풍성함을 상속받은 것이다. 이 보물들을 즐기기 위해서는 삶의 쓰레기들을 버려야만 한다. 바울은 ‘악한 것을 미워하라’(롬12:9)고 말한다. 그런 것들이 바로 우리가 버려야할 것들이다. 그 뒤 구절(롬12:9-21)에서 우리가 즐길 수 있는 보물 중의 몇 가지를 엿볼 수 있다.
- 사랑에는 거짓이 없을 것. 악한 것은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을 것
- 육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고, 존경하기를 먼저 할 것
- 열심을 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길 것
- 소망 가운데 즐거워 할 것
- 환난 가운데 참고, 기도를 꾸준히 할 것
-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쓸 것
- 우리를 못살게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그들을 저주하지 말 것
-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과 함께 울라
-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 말 것
-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보기에 선한 일을 하려고 애쓸 것
- 우리 쪽에서 할수만 있으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라
- 우리 스스로 원수를 갚으려 하지 말고, 그 일을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길 것. 왜냐하면 원수갚는 것은 내게 속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정 원수를 갚고 싶다면 그 사람이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도록 하라.
-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도록 하라.
1) 진실한 사랑(9절)
‘거짓이 없다’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위선이 없다’, ‘연기하지 않는다’ 혹은 ‘가면을 쓰지 않는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종종 세상의 인간 관계는 매우 피상적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겉치레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우리들 대부분이 그러했다. 그래서는 안되겠지만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도 우리들 많은 이들을 계속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우리는 속 사람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인 것 처럼 가장하고 사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개의 ‘겉치레’ 혹은 ‘가면’이 만나고 있는 것이다. 진짜 사람들은 결코 만나지 못한다. 이것은 ‘거짓이 없는 사랑’과 반대되는 것이다. 거짓 없는 사랑은 겉치레를 버리고 자신을 드러내는 위험을 감수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자유롭게 가면을 벗어버릴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인간관계에는 전혀 새로운 깊이가 있다는 의미다.
2) 주님을 위한 열심 (11절).
때로 사람들은 열심인 사람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열심은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 열심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기쁨과 흥분,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이 있다. 최초의 그리스도 경험은 지속되는 것이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열심을 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라’라고 외친다. 그리스도인이 된지 오래 되었을수록 더욱 열심을 내야 한다.
3) 한 마음이 됨 = 조화된 인간관계 (13-21절)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 한 마음이 되며 후한 인심을 베풀고(13절), 대접을 잘하며(13절), 용서하며(14절), 타인의 감정을 공유하고(15절),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라고 간곡히 권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 가족의 영광스러운 그림 속으로 들어오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사랑, 기쁨, 인내, 신뢰, 인정, 환대, 축복, 즐거움, 조화와 겸손의 분위기 속으로, 악이 선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선이 악을 이기는 곳으로 우리를 손짓하여 부르고 계신다. 이것들은 우리가 쓰레기를 버리고 나서야 얻게 되는 창고 속 보물의 일부이다.
3. 내 자신을 드리라 (롬12:1)
이 행위에는 의지가 필요하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일들을 볼 때,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명령한다(롬12:1).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 전부와 우리의 삶 전부를 드리기를 원하신다.
1) 우리의 귀
우리와 다른 사람의 질을 낮추는 소문 들에 귀 기울이는 것을 그만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대신 우리는 성경을 통해, 기도를 통해, 책과 테이프 등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에 맞추어야 한다.
2) 우리의 눈
우리는 그분께 우리가 보는 것을 드려야 한다. 우리가 보는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해를 끼치게 죄를 짓게 할 수 있다. 만나는 사람들을 비판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눈을 통해 그들을 바로보고, ‘내가 어떻게 하면 저 사람에게 축복이 될 수 있을까?’라고 물어야 한다.
3) 우리의 입
사도 야고보는 혀가 얼마나 강력한 도구인가를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있다 (약3:1-12)
사람들은 파괴하고, 속이고, 저주하고, 헐뜯고 혹은 자신에게 주의를 모으기 위해 혀를 사용할 수 있다. 혹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혀를 사용할 수도 있다.
4) 우리의 손
더 나아가 우리는 주님께 우리의 손을 드린다. 우리의 손은 자신을 위해 모으는데 사용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사용할 수도 있다.
5) 우리의 성생활
우리는 주님께 우리의 성(Sex)을 드린다. 우리는 성을 자기 만족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지만, 결혼 상대의 행복과 기쁨을 위해 남겨둘 수도 있다.
6) 우리의 시간
시간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 중 가장 귀중한 것 중의 하나다. 우리는 그분께 우리이 시간 전부를 드려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시간을 기도와 성경공부로 보내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 그분을 가장 우선순위에 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선 순위를 잘못 정하는 일은 흔히 있다. 관계가 중요하다. 관계 중의 가장 으뜸의 우선순위는 하나님과의 관계다. 우리는 그분과 단 둘이 있는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있는 시간도 마련해야 한다. 주일과 주중 모임(쎌모임)에서 서로를 격려할 수 있어야 한다.
7) 우리의 소망(포부) (마6:33)
‘주님, 저의 소망을 주님께 의탁하고 당신께 드립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의 가장 큰 소망으로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시며, 그렇게 하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마6:33). 이것은 꼭 우리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소망들이 없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들은 주님이 우리에게 가지고 계신 소망(포부)에 비교하여 뒤로 밀려나는 것 뿐이다. 직업에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모든 일에서 우리의 동기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고, 우리가 가진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한다면 말이다.
8) 우리의 소유와 돈(마6:19-24)
신약성경에서 사유재산이나 돈을 벌고 모으는 것, 심지어 인생의 좋은 것들을 즐기는 것을 금지하는 구절은 없다. 성경이 금하는 것은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재산 축적과 물질에 대한 건강하지 못한 집착, 돈을 의지하는 것이다. 안전을 약속하는 것이 영원한 위험으로 인도하며 결국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마7:9-20). 후하게 베푸는 것은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과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옳은 반응이다. 또한 이것은 우리의 삶을 얽어매는 물질주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하다.
4. 값을 지불하라
1) 희생하라.
위의 모든 것을 하는데는 대가가 따른다. 그것은 희생을 의미할 수도 있다. 주석가인 윌리엄 바클레이는 “예수님은 삶을 쉽게 만드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시려고 오셨다”고 했다. 고로 우리는 우리의 길이 아닌 하나님의 길을 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잘못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포기하고, 되돌려야 할 것은 바로 잡을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하며, 기독교 신앙에 적대적일 수도 있는 세상 속에 기꺼이 주님의 깃발을 날릴 수 있어야 한다.
(예 1) 수년간 세금 탈세로 고민하다가 그 세금을 내기 위해 자기 집을 처분했다.
(예 2) 니키 검블의 한 친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그 여자 친구와 동침하곤 했다. 그 친구가 기독교 신앙에 눈을 돌렸을 때 이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알고 여러 달 동안 이 문제로 고민하다 결국 그 친구와 여자 친구가 모두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 순간부터 그들은 함께 자는 것을 그만두기로 결심. 2년 반 후에 정식 결혼하여 행복한 결혼생활과 4명의 자녀를 받아누리게 되었다.
2) 고난을 받으라.
세계의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육체적인 박해를 의미한다. 20세기에는 다른 어떤 세기보다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위해 죽었다. 감옥에 갇히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자유 세계에 살고 있기에 그리스도인이 박해당하지 않는 사회에 사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우리가 받는 비판과 조롱은 초기 교회와 오늘날 박햅다는 교회들의 고통에 비하면 언급할 가치가 없다고 조차 말할 수 있다.
5.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깨달으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한 가장 좋은 것을 바라신다. 바울은 롬12:2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악한 마귀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심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히브리어로 ‘사탄’은 ‘모략하는 자’라는 뜻이다. 사탄은 하나님을 모략한다.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 못되며, 즐거움을 훼방하고 우리 인생을 망치고 싶어한다고 말한다.
때로 우리는 이 거짓말을 믿는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우리 인생을 맡기면 그분이 우리 인생의 모든 즐거움을 빼앗아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인간 아버지를 상상해보자. 예를 들어 내 아들이 나에게 와서 “아빠, 아빠가 원하시는대로 쓰시도록 나의 하루를 드릴께요.”라고 말했다고 하자. 내가 “좋다. 그게 바로 내가 기다렸던 것이다. 하루 동안 옷장 안에 갇혀 있도록 해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인간 아버지보다 더 형편 없게 우리를 대하시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다. 그는 어떤 인간 아버지보다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 인생에 가장 좋은 것을 바라신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은 선하다. 하나님은 최선의 것을 바라신다.
그러나 슬프게도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하나님보다 더 잘 할 수 있어. 하나님은 다소 구식이야. 그분은 요즘 세상이나 우리가 즐기는 것들을 따라잡지 못하고 계셔. 내 생각엔 내가 내 인생을 잘 조절하면서 하나님을 제껴놓을 수 있을 것 같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잘 할 수는 없다. 가끔은 엉망을 만들어 놓는 것으로 끝을 낸다.
(예) 니키 검블의 아들이 학교 숙제를 받았다. 내용은 로마시대의 노예시장 광고를 만들어 오는 것이었다. 아들이 그림을 그리고 더 효과를 위해서 즉 그 그림이 오래된 종이인 것 처럼 만들기 위해서 종이가 갈색이 될 때까지 불에 그을리는 것이었다. 그래야 오래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9살난 아들은 아내가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고집을 피우며 자기가 하려다가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은 자기 삶은 자신이 조정하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그들은 도움을 바라지 않으며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많은 경우 눈물로 끝이 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신다. 니키 검블의 아들은 포스터를 한 장 더 그렸고 이번에는 불에 그을리는 섬세한 작업을 그 어머니에게 맡겼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우리 삶을 맡기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다.
6.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얻으라
C. T. 스터드는 19세기의 영국 크리켓 팀단장이었고, 중국 본토에서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 부와 안락을 포기했는데, 그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작은 희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감수하신 희생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는 계속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며, 그분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내가 그분을 위해 하지 못할 일이 없다” C.T.스터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강조한다.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12:1,2).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모든 것을 우리에게선물로 주시지 않으시겠는가?”(롬8:32)라고 썼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삶의 원동력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다. 우리 삶의 모델은 아들이 보여주신 예이다.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는 수단은 성령의 힘이다.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하신가. 또한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걸어가고 그분께 사랑을 받고 평생 동안 그분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 그것은 가장 보람되고 완전하며 만족스러운 최선의 삶의 방법이다. 바로 여기에서 삶의 커다란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되는 것이다.
1)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라
2) 오래 참으라
알파토크15/ 기독교:지루하고 거짓말 같고 나와는 상관이 없다?
서 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 반대하는 3가지 이유와 반대가 있다.
1) 기독교는 지루하고 따분하고 재미가 없다
2) 기독교는 내가 보기에 거짓말같다.
3)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2000년 전에 그것도 한국과는 너무 거기라 먼 중동에서 일어난 일이 20세기와 21세기를 걸쳐 살고 있는 한국에 살고있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들 세 가지 이유는 사실 기독교 신앙에 대해 진심으로 귀를 기울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생긴 이유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세속화된 우리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신가, 그가 어떤 일을 했는가에 대해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기독교는 절대 지루하지도, 거짓말 같지도, 나와 상관이 없지도 않다. 그 반대로 재미있고, 진실되며, 나와 상관이 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 만약 그의 말이 옳다면 우리 삶에서 그에게 응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있을 수 없다.
1. 잃어버린 세계로 가는 길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도록 창조되었다. 그 관계가 없으면 우리는 허기짐과 공허함, 그리고 무언가가 빠져있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칼럼니스트인 버나드 레빈은 <인생은 위대한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그 의미를 발견할 시간이 없다>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그 글에는 그는 자신이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칼럼니스트로 엄청난 성공을 이루었지만 “꿈을 쫓느라 현실을 낭비”했을까 봐 두렵다고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람 속에는 빈 구멍이 있어 또 아무리 많은 음식과 음료수를 그 안에 부어 넣더라도, 아무리 많은 자동차와 텔레비전으로 그 안을 채워 넣더라도, 아무리 많은 잘 자란 아이들과 충실한 친구들이 그 가장 자리를 행진하더라도 .... 그 빈 구멍이 아프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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