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성령&부흥

[스크랩] 1907년 한국의 부흥운동 (1)

가디우스 2009. 11. 2. 15:02

1907년 한국의 부흥운동 (1)
들어가는 말
풀러신학교 교수 | 박 기 호 박사

한국교회는 설립된 후 100여 년 동안 성령의 능력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하였다. 세계의 11개 대교회들 가운데 10개가 남한의 한 도시 서울에 있다는 사실(see Patrick J. Johnstone and Jason Mandryk, eds. Operation World [Waynesboro, Ga.: Paternoster USA, 2001]387), 한국 신학교의 학생 수가 아시아 전체 신학생 수보다 많다는 사실, 남한의 장로교인 수가 한국의 선교사들을 파송한 미국, 캐나다, 그리고 호주를 포함하여 전 세계의 장로교인 수보다 더 많다는 사실은 한국교회가 폭발적 성장의 증거이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교회의 발전과정에서 경험한 부흥운동에 기인한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은 전도운동과 선교의 원동력이 되었다. 부흥 없이는 교회성장도 선교운동도 있을 수 없다. 건강하고, 역동적이며, 선교적인 교회가 되기 위하여 한국교회는 지속적으로 부흥과 갱신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교회가 놀라운 성장을 경험하였고 오늘날 선교교회가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에, 특히 1990년대 이래 한국교회는 성장이 정체되고 오늘날에 와서는 심지어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한국교회가 과거에는 어려운 역사 속에서 고난을 당하면서도 성령의 능력으로 전도운동과 선교운동을 전개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전도운동과 선교운동은 국가의 경제발전에 힘입은 풍요 속에서 성령의 능력보도 돈의 능력을 의지하는 전도와 선교로 발전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금년은 1907년 평양 부흥의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교회는 요즈음 "다시 부흥을!" (Revival Again!) 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교회의 새로운 부흥을 염원하며 1907년 부흥 10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GEDA와 미주 한인교회가 평양 대부흥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며 지속적인 교회성장과 순수한 전도운동과 선교운동을 기대하며 함께 부흥과 고난 가운데 있는 형제 자매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시기적절한 일이다.

 

우리는 1907년 부흥운동을 회고해 보므로 한국교회의 새로운 부흥을 위한 교훈을 받을 필요가 있다. 먼저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에 대한 약술을 하고, 대부흥운동의 영향, 특징, 그리고 받아야 할 교훈 대하여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I. 1907년 대부흥운동

한국교회의 큰 성장, 특히 평안남북도와 황해도를 포함한 서북지방에서의 성장은 부흥운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은 1903년의 원산에서 선교사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작은 부흥운동들이 1904년, 1905년, 그리고 1906년에 다른 구역 이곳저곳에서 일어났다(Roy E. Shearer, Wildfire: Church Growth in Korea, Grand Rapids, Mich.; Eerdmans, 1966, p.129).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은 그 이후 한국교회의 성장과 뒤이어 일어난 전도운동과 선교운동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남자 사경회 여덟째 날이었던 1907년 1월 14일 월요일에 성령께서 능력으로 나타나셨는데 이에 대한 기록은 윌리엄 뉴튼 블레어(William Newton Blair)가 쓴 '한국의 금'(Gold in Korea, Shearer, Wildfire, p. 130)과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가 '선교지 한국'(The Korea Mission Field, See Graham Lee, "How The Spirit Came To Pyeng Yang," The Korea Mission Field 3, no. 3, 1907). 이란 저널에 쓴 글과 같은 몇 개의 출판물에 소개되었다.

 

1907년 1월 16일 수요일 저녁 평양 주중 기도회에서 성령의 부으심이 있었다. 이 거대한 오순절의 외적인 표적들은 한국인과 미국인 신자들 가운데 죄에 대한 깊은 가책으로 임하였다. 이길함 선교사는 그 경험 후 목요일에 쓴 부흥에 대한 편지에서 한 예를 들고 있다:

 

"나는 주 장로가 강단 내 곁에 서서 고백할 기회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와 같은 것을 결코 본 일이 없고 내가 바로 곧 다시 보기를 원하지 않는 일이 시작되었다. 그는 머리부터 발까지 떨고 있었으며 그가 범한 죄에 대하여 말할 때 번민 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나는 죽어가면서도 그런 마음의 번민 속에 있는 사람을 결코 본 일이 없다. 그는 간음죄와 재정 오용의 죄를 고백하고 마침내 마루에 주저앉아 풀이 죽어 번민 속에 몸을 뒤틀고 있었다.(Pyongyang, Korea: January 17, 1907; quoted from Shearer, Wildfire, 130. Pyongyang, Korea: January 17, 1907; quoted from Shearer, Wildfire, 130.)

 

이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흥의 고통으로 정신병이 생기게 되었다는 증거는 없었다. 실로, 그것은 영적인 운동이었으며 그 결과들은 중대한 것이었다. 1907년 성령의 불이 평양에 운집한 수많은 사람들 위에 임했을 때 전국이 전에 일어난 부흥이 미치지 못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출처 : 남미선교문화원 "선교사의 집"
글쓴이 : Paul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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