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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모 목사의 사상적 배경

가디우스 2008. 9. 22. 19:21

류영모 목사의 사상적 배경

알파코스 셀, G12, 신사도개혁운동 사상적 배경 주목




필자는 문제의 알파코스(셀, G12, 신사도개혁운동 포함)에 대한 그 사상적 배경에 주목을 한다. 존 윔버에 의해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구역발전이 교회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이 하나의 성장사례로 전세계로 알려졌고, 이것이 셀( G12)로 개발되어 신사도 운동과 더불어 역수입 되어 있기 때문이다.

G12 는 본래 김활란 박사와 홍현설 박사에 의해 주도된 1965년도의 전국복음화 운동의 ‘열두 제자 운동’ 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잡탕코스를 병행하고 있는 알파코스를 필두로 한 셀과 G12. 신사도 개혁운동 프로그램의 그 사상적 배경이 초미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필자는 셀 운동가들이 “셀은 구역과 다르다” 고 한다면, 과연 셀의 역사적 기원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살펴본 결과, 셀 사역은 가정교회와 유사한 것이고, 그 가정교회는 퀘이커의 조직(퀘이커 집단-월회-사계회-연회)과 유사한 것중 하나라는 결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이 글에서 알파코스를 주도하는 류영모 목사의 사상적 배경으로 그의 스승 원경선. 윔버의 은사운동. 퀘이커의 유사성, 퀘이커 사상, 그리고 퀘이커 교도인 함석헌과 원경선의 관계를 아래 목차와 같이 살펴 제시해 보고자 한다.


들어가는 말
1. 류영모와 원경선
1) 유영모
2) 원경선
2.윔버와 퀘이커 그리고 알파코스
1) 존 윔버의 사상적 배경
2) 알파코스의 변질
3. 퀘이커란 어떤 집단인가?
1) 퀘이커의 발생
2) 퀘이커 사상
4. 원경선과 함석헌의 관계
1) 원경선과 함석헌의 관계
2) 퀘이커교도 함석헌
나가는 말.


1. 류영모와 원경선.

1) 류영모 :

① 류영모 목사는 거창고등학교를 나와 장신대를 졸업하고, 공군 장교로 군복무를 마쳤고, 리전트 대학교에서 D.Min 과정(학위논문: G12 셀교회 모델 개발)을 마쳤으며, 인터넷신문 《교회와 신앙》의 발행인. 알파코리아 이사장. 일산시 소재 한소망교회 담임목사이다.

그가 현대종교 1992년 8월호에 게재한 글을 보면 “뜨레스 디아스는 좋은 것” 이라는 극찬을 하고 있으나, 한국교게가 경계한 것 이었고, 그가 주창하는바 알파코스 또한 한국교계가 금지한 빈야드 운동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알파코스는 빈야드를 좋아하던 류영모 목사가, 교단의 결정들을 피해 실시하는 T/D의 연장 프로그램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그것이 추구하는 방향은 신사도 운동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다가 최근 인터뷰한 내용 중 “성령은 교회의 영” 이라는 중세기 카톨릭적 발언을 함으로 이 기사를 접하는 알만한 목사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것은 그자신이 소속한 통합측에서도 이미 비판한 카톨릭의 성령론 이었기 때문이다.(예장(통합) 『평신도 교리지침서 』68쪽 참조)

② 그가 여러 저서와 강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병원에서 일찍 돌아가심으로 편모 슬하에서 성장했고, 성장 과정에서 거창고등하교 시절 현재 풀무원 원장인 원경선(당시 성경교사: 현재 동신교회 장로)으로 부터 성경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행복동산 다섯 번째 설교 <왜 그리고 어떻게 기도할까?>(본문 살전5:16-18)에서, “성경에는 구약과 신약이 있는데 구약이 뭐고 신약이 뭔가? 제가 거창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거창고등학교 성경을 가르치던 풀무원의 이사장 원경선 선생님이 저희 거창고등학교 성경 선생님이셨어요. 그분이 성경을 가르칠 때 구약은 할머니가 애기 낳는 이야기이고 신약은 처녀가 애기 낳는 애기다.

그런데 구약의 경도가 끊겨진 할머니가 임신을 하게 생겼어요. 남자를 전혀 모르는 신약의 한 처녀가 애기를 낳게 생겼어요 이 할머니와 처녀가 하나님께 물었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나는 전능자이거든’ 그렇게 대답하십니다”. 라고 했다.

2) 원경선 :

그렇다면 과연 류영모 목사는 원경선의 영향을 얼마나 받은 것이며, 그가 다닌 거창고등학교는 어떤 학교일까?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① 2004년 7월 31일 10시 57분 한 인터넷 카페에 올려진 한 자료에 의하면, 바로 이 거창고등학교가 구원파의 딕욕 선교사와 어울리며 부평소재 미군교회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맥카피 선교사가 걸립한 미션학교였다는 사실이었다.

형제교회 미국 모임에서 거창고등학교를 세워 주었는데, 1960년 맥카피 선교사가 건축관리자로 파송되어, 거창 장팔리에 동신회 모임을 세우고, 거창고등학교를 건축했으며, 돈의동(기독 동신회 소재지)에서 자주 교제를 했다.(류영모 목사가 혹 이 장팔리의 형제교회를 출석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확인된바 없다) 목장을 운영해 우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며 선교하던 맥카피 선교사는,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사후동으로 목장을 옮겨, 1965년 전국 최초의 여름 수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② 당시(1959. 3월경) 부평 소재 미군교회에는 미국에서 신약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모이는 모임에서 온 칵스웰(William Coxwell) 이라는 미군 중사가 있었는데, 그는 성경공부에 참여한 자들을 원경선의 소사농장(1955년 1만 여평에 설립한 풀무원 공동체)으로 데리고 가서 소개해 주고 있었다. 이것은 원경선이 고아들을 돌보고 있었기 때문 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후 이들의 영어 성경 공부는 서대문 순복음교회를 거쳐 돈의동 성서강당(기독동신회 모임처?)으로 옮겨 4-50여명씩 모였다고 한다.

원경선은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면 번동리에서 태어나 (父: 원낙범. 母: 김승수) 1935년 친구 찾아 서울로 올라온 1935년(당22세) 이후 줄곳 다니던 동신교회(공식명칭: 기독동신회 중앙교회)출석했고, 결국 원경선은 이교회 처녀와 결혼해서, 그 교회에 장로가 되었다.

③ 그는 이교회를 국민일보 칼럼에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즉 “20대 초반에 서울로 올라온 뒤 내가 줄곧 다닌 교회는 통상 ‘동신교회’ 로 불렸지만 정식 명칭은 ‘기독동신회 중앙교회’다. 목사나 장로 등의 교직제도가 없고, 평신도들이 교회의 직제를 담당하는 수평적인 형태의 교회로 모두가 형제라는 뜻에서 ‘형제단(브레드린-brethren)교회’ 로도 불린다.”고 한다.【미주1】

④ 그가 국민일보에 게재한 <나의 이력서>라는 칼럼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원경선은 22세 되던 1936년부터 무교회주의자로 널리 알려진 함석헌 선생과 만나 알게 되었고, 이후 긴밀한 교제가 있었던 것을 밝히고 있었다. 풀무원이라는 이름도 충남 홍성의 풀무골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무교회 운동을 펼치던 함석헌의 제자 이찬갑 주옥로 씨가 운영하던 풀무학원에서 얻은 것 이었다. 그후 원경선은 이학원의 이사를 맡기도 했다고 한다.

원경선의 입장 표명을 읽어 보자. “특별한 사상적 지향이 없던 내가 동신교회를 선택한 것은 청년시절 나에게도 권위를 부정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성향이 있었던 듯 하다. 한때 교리를 둘러싸고 선교사들과 충돌해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것도 이같은 성향 때문인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자유롭게 살다간 ‘씨알 사상가’ 함석헌(함석헌. 89년 작고) 선생을 만난 것은 어쩌면 필연이 아닌가 싶다.”【미주2】

여기서, 류영모는 윔버 처럼 어려서 아버지를 일찍 잃었다는 점과, 윔버가 퀘이커에서 신앙을 시작했듯이, 류영모 역시 형제교회 원경선에게 성경을 배웠다는 점이 유사한 점이고, 결국 이것이 류영모가 존 윔버를 좋아 할만한 이유, 신사도운동을 추구하는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유추해 볼수 있다.

2. 윔버와 퀘이커 그리고 알파코스.

1) 존 윔버의 사상적 배경

① 예장(합동)신학부에서 발간한 『기독교 정통과 이단, 무엇이 다른가?』(심창섭 편저)에, 82회 총회에서 채택한 빈야드 관련 내용을 보면, 존 윔버는 “1934년 불신자의 가정에서 출생.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여 청소년 시절 재혼한 어머니와 의붓 아버지 슬하에서 보냈다. 195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음악을 좋아 함으로 음악전문대학에 진학하여 1954년 졸업후 1960년대 인기를 끌었던 록 음악 그룹인 Righteous Brothers 보컬 그룹을 만들어 라스베가스의 쇼에도 관여하였다.

② 1962년 말 아내와 이혼 직전에 아내와 함께 뜻하지 않은 계기를 통하여 퀘이커 교도들이 인도하던 성경공부에 참여하여 공부하면서 뜻 밖의 개인적인 회심, 체험을 통하여 부부가 함께 기독교 신앙에 열렬하게 헌신하게 되었다. 회심후 음악계를 떠났고 그동안 모은 재산을 모두 자선 단체에 기부하고 공장에서 일하면서 성경공부와 개인 전도 사역에 헌신됐다.

③ 1970년에 퀘이커 교단 소속인 오르바 린다 포랜드(형제교단)교회에서 수사 안수받은 후 1970년에서 1973년 사이에 아주사 퍼시픽 성경대학에 편입하여 신학공부를 하였다.

1974년 풀러신학대학원에 가서 신약학 교수 G. E. Ladd의 하나님의 나라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선교대학원에서 풀러 복음 전도 및 교회성장연구소 설립에 관계하게 되었고 이연구소의 분과 책임자 및(1982) 교회 성장학 조교수로 일하게 되었다.”【미주3】

④ 여기서 윔버는 퀘이커 교단에서 첫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데, 좋아하던 음악계를 떠날 정도의 결단을 내렸고, 모아둔 재산은 자선 단체에 기부할 정도의 열심이었으며, 퀘이커 교단의 수사 안수가지 받았고, 아주사 퍼시픽 성경대학에 편입하여 신학공부를 할정도 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정도라면 그에게는 퀘이커 사상이 철저히 각인되었다는 점을 주의해 봐야 한다. 말하자면 그의 교회 성장학 이란 퀘이커식 성장방법이라고 봐도 틀림이 없다고 볼수 있을 것이다.

⑤ 예장(합동)신학부에서 발간한 『기독교 정통과 이단, 무엇이 다른가?』(심창섭 편저)에, 82회 총회에서 채택한 빈야드 관련 내용, <존 윔버의 빈야드 운동의 배경과 신학 기초>에서, <퀘이커교의 신령주의적 배경>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즉 “윔버는 퀘이커교도를 통해 기독교에 입문했고 거기서 목사(? -수사) 안수를 받고(프렌스 교단-퀘이커교회) 퀘이커 교회는 기성교인들이 객관적인 신앙만을 강조하다가 내적인 빛의 사역을 제한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떠났다고 주장하여 영국 조지 폭스란 신령주의에 의해 세워졌다.” 고 밝히고 있고, “내적인 빛은 퀘이커의 가장 중요 주제이다.

… 내적인 빛만이 그리스도께 갈수 있는 길이며 성도를 순수하게 이끌어 갈것이라고 생각하여 제도와 형식에 매인 교회를 무시한다. … 성경계시의 객관성과 절대성을 부인하고 환상이나 직관을 통해서 하나님의 직접계시를 받는다는 주체적 체험, 신비적인 것을 신앙의 기초로 삼았다.” 요약했고,

⑥ 이어서 “윔버는 신령주의적 퀘이커교의 사상에 기초하여 ‘분별의 은사’ 들이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분별의 은사로 구성되었는데 모든 초자연적인 통찰력을 부여해 주는 은사들로 그것들을 통해서 마치 하나님께서 사물을 파악하시듯 이 사물을 파악하게 된다고 하였다. … 이와같이 윔버는 주체적인 직관을 신학의 원리로 삼았는데 이러한 내적인 빛을 체험할수 있는 방법으로 영감, 꿈, 환상, 성경구절이 있다고 했다.(능력치유 pp.322)

윔버에게는 내적인 인상이나 투시는 최고 판단 기준이 되고 있다. 퀘이커의 직관이나 윔버의 투시 현상은 기독교의 판단의(기준이) 될 수 없다.” 지적했고,

⑦ “그는 성경대로 병든자를 위하여 기도하다가 실패하고 오랄 로버츠의 오순절 모델, 성공회와 로마 천주교의 성례전 모델, 치유훈련을 강조하는 산 오순절 모델, 마귀 축출 방법, 상처와 원한의 치유에 관심을 두는 심령적 영적 모델, 내적치유 모델을 참고하여 치유신학을 발전 시켰다고 한다.(능력치유 pp.309-311) 이러한 모델로 배운 바를 빈야드 기독교회에 적용하였다.(능력치유 p.284)

⑧ 윔버의 치유신학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나온 것으로 성경을 교재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여러 참고서로 사용 발전시킨 인위적 사상이라 할 수 있다.”규정했다.【미주4】

2) 알파코스의 변천

①원래 현재의 알파코스는 1976년 영국의 성공회 교회인 홀리 트리니티 브롬푸톤 HTB(Holy Trinity Brom pton) 교회에서 찰스 만함(Charles Marnham) 신부에 의해서 시작된 성공회의 신앙훈련 과정으로서의 알파토크였었다.【미주5】

1976년 당시의 영국교회 상황은 주 5일 근무제가 도입되고 ‘놀이문화’ 가 확산되면서 가정이 급격히 파괴되었고, 성도들은 썰물처럼 교회를 떠나 야외로 빠져 나갔고, 교회에는 습관적으로 드나드는 노인들과 체험적 신앙의 젊은이 들만 남아 있었는데, 이때 젊은 이들의 욕구를 충족 시킬수는 없을까 고민 하면서 시작해, 점점 보완 발전시킨 것이 오늘의 알파코스가 되었다.

처음 시작한 찰스 만함 신부는 불신자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편안한 분위기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한 후 한 시간 동안 이야기(Talk-이하 토크)를 하고, 한 시간 동안은 토크에 대한 의문을 토론하는 시간으로 4주 동안 예수, 성경, 기도, 확신이라는 주제로 계속했다.

② 이후 이와같은 초대를 통한 복음전도를 5년동안 지속하다가, 1981년 존 어바인(John Irvine) 신부가 뒤를 이어 맡게 되었고, 존 어바인 신부는 기존의 4주 과정인 알파토크를 10주 과정으로 확대하고, 주말 수양회(Weekend Program)에 ‘성령의 날’을 정한 알파코스를 만들었다.(註, 이 논문에서는 알파토크와 알파코스를 구분하라.) 주말 수양회는 금요일 저녁에 출발하여 주일 오후 예배에 도착하도록 했는데, 수양회 기간 동안에는 4가지 주제의 토크를 한다.

현재의 알파코스는 1985년 니키 리(Nicky Lee)가 맡아 체계화 하였으나, 니키 리의 절친한 동료인 니키 검블(Nicky Gum bel)이 H.T.B(Holy Trinity Brom pton) 교회에 부임하자.【미주6】 그에게 알파토크를 맡겼고, 니키 검불은 인수받은 기존의 알파토크에 주말 수양회를 포함한 15개 토크주제로 체계화한 알파코스로 탈바꿈시켜, 제3의 물결을 타고 전 세계로 확산시켰다.【미주7】

③ 지금의 알파코스는 초기의 알파토크와 비교가 어렵겠지만 추적해 본다면, 존 어바인 신부때 기존의 4주 토크 코스가 10주 토크 코스로 전환되면서 은사 체험의 ‘주말수양회’ 가 생겼는데, 이것은 니키 검블이 <능력전도>를 주창하는 VCF(Vineyard Christian Fellow ship- 빈야드교회)의 존 윔버(Jonh Wimber)와 그 교회팀을 HTB(Holy Trinity Brom pton) 교회로 초청하면서 부터였던 것으로 본다.

결국 1976년 초기 찰스 만함(Charles Marnham) 신부에 의해서 시작된 알파토크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 지금의 알파코스로 변질되었던 것이다.【미주8】

우선 처음 4주코스 알파토크에서의 예수, 성경, 기도, 확신이라는 4가지 주제가 10주 코스로 전환되면서 15개 토크 주제로 늘어났고, 10주 코스 안에 있던 ‘성령의 날’ 은 15주로 늘어나면서 ‘주말 수양회’ 로 바뀌어진 것을 보면, 알파토크와 능력전도가 혼합된 주말 프로그렘으로서의 지금의 알파코스가 형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아무튼 현재의 알파코스는 초기 만함이 의도했던 그런 알파토크는 분명히 아니라고 봐야 한다. 말하자면 ‘유사 토크프로그램’ 이라고나 해야할 그런 것이다.

3. 퀘이커란 어떤 집단인가?.

1) 퀘이커의 발생

① 퀘이커교(Quakerism)는 1652년 영국에서 죠지 폭스(George Fox, 1624 - 1691)라는 한 구도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폭스를 중심으로 하는 친우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았을때 이따금 전율을 느껴 몸을 진동하였으므로 이 태도에 비난조로 ‘Quaker'(떠는자들)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그렇지만 본인들 스스로는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들‘(People of God) 빛의 자녀들 (Children of the Light)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친우회 (Society of Friends)라 부르게 되었다. 최근에는 이종교를 지칭해 ’퀘이커리즘‘(Quarkerism )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② 17세기 영국에는 일시적으로 발생한 종교운동 가운데 구정교도와 휜소파(Ranters)라는 것이 있었다. 엄밀히 말해서 그것들은 종파가 아니라, 다소 선동적인 종교운동 내지 사상의 풍조로서 영국의 여러 지역에 영향을 미쳤으나 어떤 조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따라서 이 운동에는 창시자도 기원도 추적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현대 퀘이커 학자 존스는 ‘구정교도’ 운동이 다름 아닌 신비운동이었다고 평가했고, 게라드 윈스탠리(Gerrard Winstanley)는 휜소파를 위험한 무리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장차 평화의 왕국을 산산이 조각낼 ‘게걸스런 짐승’ 이라고 까지 비난했다. 퀘이커 출현 배경에는 구정교도 및 휜소파를 비롯해서 기성교회를 거부하는 크고작은 종교운동들이 있다.

③ 폭스는 1624년 7월 영국에서 청교도들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교회 목사의 설교에 만족하지 못하고 혼자서 성경을 들고 과수원이나 들판으로 나아가곤했다. 그러다가 19세때 출가하여 구정교도 생활을 하다가 3년후(1647년) 그의 나이 23세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또 신비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후 그는 전국 순회전도, 각종 모임(meeting)을 창립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오늘의 퀘이커교라는 것이다.

2) 퀘이커의 사상

① 폭스는 17세기의 그리스도교가 내실이 결여된 형식의 상태에 빠져 있다고 믿었다. 즉 세례, 성찬, 설교, 신조 등 외적인 것에 매달리는 것을 허망한 것으로 보았다. 퀘이커들의 생각에는 하느님은 한분 이지만 나타나는 모양이 다양할 뿐이다.

구약성서에는 아버지로, 복음서에는 아들로, 그리고 복음서 후에는 성령으로 나타나 그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자의 가슴속에 그의 뜻을 드러내 주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느님은 내면의 빛으로서 자신을 때로는 아버지로, 아들로 혹은 성령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퀘이커교에서는 전통적 그리스도교가 사용하고 이해해온 삼위일체라는 용어라든지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표현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드물기는 하지만 퀘이커에도 전통적 그리스도교와 유사한 논리를 편 경우도 있다.【미주9】

② 무엇보다도 한국의 퀘이커 집단의 이해가 중요하다. 고려대 김정환 교수는 무교회의 특색을 네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 회당을 교회로 인정하지 않으며, 둘째, 성직 제도를 인정하지 않으며, 셋째, 교회가 갖는 성서해석권을 인정하지 않으며, 넷째, 신이 한국민족에게 주신 고유한 사명을 밝히지 않는 신학을 인정하지 않는 점이다.【미주10】

4. 원경선과 함석헌의 관계.

1) 원경선과 함석헌의 관계

원경선은 국민일보 연제 칼럼에서 밝힌바와 같이, 22세 되던 1936년부터 무교회주의자로 널리 알려진 함석헌 선생과 만나 알게 되었다.

1935년 22세의 나이로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소재 친구의 목장에서 젓소를 먹이고 선교사들 집으로 우유를 배달하는 일을 하면서, 밤이면 자전거로 YMCA를 찾아 야간영어 학교에서 영어 공부를 했고, 이곳에서 가끔 함석헌 선생의 목요강좌를 참석했다.

그의 표현을 보면 “ 나보다 10살 정도 위인 함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교회에서 였다. 무교회운동을 벌이던 선생의 주장에 나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아 YMCA에서 있었던 선생의 목요강좌에도 자주 들렸다. … 나는 공동체를 출범시킨 뒤 땅에서 바른 생활을 일구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선생의 사상을 그대로 따라갈 처지는 아니였지만 자유로운 신앙생활에는 크게 공감했다. 또 선생과 나는 농사라는 공통점이 있어 더욱 가까이 지낼수 있었다.

선생은 1957년 천안에 ‘씨알 농장’을 세우고 직접 농사를 지으며 사상의 깊이를 더했다. 그런 선생은 농사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내가 운영하던 공동체를 찾아 부천과 양주를 자주 들렸고,(註: 풀무원이 부천에서 양주로 옮겼기 때문에 옮긴 풀무원을 찾았다는 이야기이다.) 나도 천안으로 찾아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미주13】

전쟁이 끝난 1955년 부평 소사에 남은 1만여평의 땅에 풀무원 공동체를 시작했는데 이 풀무원이라는 이름도 충남 홍성의 풀무골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무교회 운동을 펼치던 함석헌의 제자 이찬갑 주옥로 씨가 운영하던 풀무학원에서 얻은 것 이었다. 그 후 원경선은 이학원의 이사를 맡기도 했다.【미주14】

원경선의 입장 표명을 들어 보자. “특별한 사상적 지향이 없던 내가 동신교회를 선택한 것은 청년시절 나에게도 권위를 부정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성향이 있었던 듯하다. 한때 교리를 둘러싸고 선교사들과 충돌해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것도 이같은 성향 때문인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자유롭게 살다간 ‘씨알 사상가’ 함석헌(함석헌. 89년 작고) 선생을 만난 것은 어쩌면 필연이 아닌가 싶다.” 라는 것이다.【미주15】

2) 퀘이커교도 함석헌

① 함석헌은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의 바닷가 마을 사점에서 한의사였던 함형택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민족주의 정신과 기독교 정신으로 충만 되어 있던 집안 친척 어른들의 영향을 받아 자랐다.

1916년 평양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장차 의사의 꿈을 가지고 공부 하던중 3.1 운동이 일어나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인생의 지표를 바꾸어 평양고보를 중퇴했고, 21세되던 해에 정주에 있는 오산 고등보통학교(남강 이승훈 건립. 당시 조만식 장로가 교장)에 편입하여 졸업했다.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으로는 유영모, 우찌무라 간조, 간디, 퀘이커, 장준하 라고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미주11】

② 무엇보다도 이글에서 중요한 것은 함석헌의 무교회주의 사상이다.

김남식은 『일제하 한국교회 소종파운동연구』에서, <함석헌의 무교회주의 사상>에 대해서, “1930년 12월 「성서조선」(제23호)에 발표한 ‘참 구세주’ 란 그의 글은 2면에 불과한 짧은 논단 이지만 여기에는 아주 명백한 무교회주의 사상이 직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면서, “그(註: 함석헌)에 따르면 진정한 예수, 참된 구세주에 대한 신앙이나 헌신은 어떤 형태의 형식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하고,

<함석헌의 무교회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신학지식의 깊이나 넓이, 혹은 그의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전문적 이해 지평에 관하여 계속 논증 하는 것 자체가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그의 기독교 이해가 옳으냐 그릇된 것이냐에 관하여 논할 필요가 없다.

다만 그가 기독교의 본질에 대하여 이해하고 있는 것은 매우 위험 스러운 것일 뿐 만 아니라, 이단적인 것 이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함석헌의 교회 이해는 너무 부정적이며, 마치 유물론자 루드비히 포이에르 바하 보다도 더욱 맹렬하게 기독교를 비판하고 있으며,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종교발생론과 유사한 설명을 하고 있음에 경악을 금할수 없다.”하고, 함석헌의 <교회론>에 대해서도 8가지로 나누어 분석 비판하고 있었다.【미주12】

나가는 말.

이상에서 류영모 목사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보았다.그렇다면 류영모 목사에게서 찾아볼수 있는 퀘이커 사상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 필자는<알파코스(셀-G12)와 류영모 목사에 대한 공개장>에서 밝힌바 있는 내용이지만, 빙산의 일각같은 그의 발언을 다시 간추려 본다.

"신약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그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 다만 각 가정(집)에 모이는 작은 공동체 - 셀이 있었다." "모든 성도는 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사역자" "모든 성도는 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사역자라는 성경적 확신위에 모든 성도들을 사역자로 만드는 확실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 마지막 때에 12승법의 폭발적인 부흥의 비전으로 이땅에 사도적 사역을 펼쳐갈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군대이다." 이런 주장들은 앞서 언급한 퀘이커 사상에 기초한 주장들이다.
이와같은 사실은 알파코스(셀 - G12)가 지향하는 목표가 신사도운동이라는 점에서 심히 우려스러운 것이다.

앞으로 이운동은 교회성장이라는 미명하에 - 1단계 알파코스로 토양 작업 - 2단계 신사도운동으로 수평화 - 3단계 가정교회로 전환 - 4단계 퀘이커화(신비주의 공동체) 수순으로 옮겨갈 것으로 예견된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이운동이 장로 교단의 입장과도 상충되는 사상임에도 불구하고, 장로교 교단의 목사들이 무분별하게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독자들의 올바른 분별과 판단이 있기를 바란다. 끝.

【참고도서목록】.

1. 심창섭 편저 『기독교 정통과 이단, 무엇이 다른가?』예장(합동)신학부 간. 2006.
2. 마이클 그린 저. 유용국 역. 『Alpha 코스』서로사랑 刊. 2004.
3. 니키 검블 저 이인수 역. 『인생의 의문점들?』서로사랑 간. 1997
4. 하워드. H. 브린톤 저. 함석헌 역 『퀘이커 三百年史』종교친우회 서울 모임 간. 1970.
5. 김영태 저. 『신비주의와 퀘이커 공동체』인간사랑 간. 2002.
6. 함석헌 엮음. 『현대의 禪과 퀘이커 신앙』삼민사 간. 1985.
7. 한숭웅 저. 『무교회주의』두란노 간. 1991.
8. 김남식 저. 『일제하 한국교회 소종파운동연구』새순출판사 간. 1987.
9. 《국민일보》나의 이력서 / 원경선.
10. 백진석.「선교적 교회 관점에서 본-알파코스에 관한 비평적 연구」장신대 세계선교대학원 논문 2006.

【 미 주】.

1) 국민일보-나의 이력서/원경선. №15 글.
2) 국민일보-나의 이력서/원경선. №15 글.
3) 심창섭 편저 『기독교 정통과 이단, 무엇이 다른가?』예장(합동)신학부 간. 2006. pp.232-233.
4) 심창섭 편저 『기독교 정통과 이단, 무엇이 다른가?』예장(합동)신학부 간. 2006. pp. 237 -239.
5) 마이클 그린 저. 유용국 역. 『Alpha 코스』서로사랑 刊. 2004. p.3.
마이클 그린 저. 유용국 역. 『Alpha 코스』서로사랑 刊. 2004. p.307.
6) 니키 검블은 캠브리지에서 법률공부를 할 때 니키 리의 룸메이트였고, 니키 리의 전도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 었으며 대학 졸업 후 니키 검블은 변호사로 5년간 일한 뒤 옥스포드에서 신학을 하고 H.T.B 교회 부임
7) 백진석.「선교적교회 관점에서 본-알파코스에 관한 비평적 연구」장신대 세계선교대학원 논문 2006. pp.78-79.
8) 니키 검블 저 이인수 역. 『인생의 의문점들?』서로사랑 간. 1997.p.225.
9) 김영태 저. 『신비주의와 퀘이커 공동체』인간사랑 간. 2002. 참고.
10) 김남식 저. 『일제하 한국교회 소종파운동연구』새순출판사 간. 1987. p.79.
11) 김남식 저. 『일제하 한국교회 소종파운동연구』새순출판사 간. 1987. pp.29-34.
12) 김남식 저. 『일제하 한국교회 소종파운동연구』새순출판사 간. 1987. pp.38-56.
13) 국민일보-나의 이력서/원경선. №15글 중
14) 국민일보-나의 이력서/원경선. №10글 중
15) 국민일보-나의 이력서/원경선. №10글 중.

기독교이단사이비연구대책협회 연구소장 이영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