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귀납법적성경공부

[스크랩] 성경의 눈으로 사회를 보다

가디우스 2010. 6. 23. 19:12

방선기/「목회와 신학」편집부장

 

어느 교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달동네에서 화재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졸지에 집과 세간을 잃게되어 그 교회로 도움을 청해왔었다. 당국의 요청인즉 이재민들을 잠시 동안이라도 교회에 머물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교회에서는 이 요청을 받고 설왕설래 끝에 본당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마지못해 이들을 받아들였다. 이재민들이 교회안에 들어와서 머무는 동안 교회는 총비상이 걸렸었다. 그들은 집을 잃고 어쩔 줄을 모르는 이들을 도와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부의 침입자로부터 교회의 건물과 기타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있었던 주일 오후 그들에게 따뜻한 라면을 대접한 사람들은 그 교회의 교인들이 아니라 적십자사에서 파송 되어 나온 봉사자들이었다. 이들이 이재민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순간에 교회의 각부 교실 안에서 항상 해오던 대로 성경공부가 한창이었다.

 

봉사적 차원에 머무른 사회 참여

이 장면은 한국의 어느 보수주의 교회에서 실제 일어났던 안타까운 모습으로서 전통적인 복음주의 교회에서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광경이라 생각된다. 사실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는 전통적으로 사회문제에 무관심해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물론 교회들이 나름대로 사회사업을 아주 안한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그들이 전도하는데 들이는 열정이나 교회를 양적으로 부흥시키는데 쏟는 정열에 비할때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나 열정은 없었다고 보는게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사회봉사적인 차원은 그래도 열매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나 정치참여적인 차원에서는 정말 소극적 내지는 방관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정권을 쥔 사람들이 불의를 자행할때 그것은 정경분리 운운하면서 방관만 하고 있었던 것이 뒤늦게 비판이 되고 있는데 사실 불의한 정부에 대해 아무런 반론을 제기하지 않은 것은 엄밀히 말하면 정치에 무관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정부에 동조한 것이 된다. 이러한 복음주의 교회와는 달리 많은 진보주의적인 교회나 신자들은 사회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참여도 하고 때로는 투쟁까지 하고 있다. 솔직히 이들의 관심과 열정에 대해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이 복음주의적인 교회를 떠나 천주교나 자유주의적인 교회로 향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이런 상황을 목격하는 복음주의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냥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옛날 하던대로 우길 수만은 없다.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책임있는 행동을 하기 위해서 복음주의 신앙을 포기하고 새로운 신학의 방향을 따라갈 수는 없다. 여기에서 오늘의 복음주의자들이 이루어 야할 최대의 과제중의 하나가 바로 복음주의 신앙에 입각해서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책임있는 크리스챤과 교회 상을 세우기 위한 신학을 정립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복음주의란 사실상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려운 기독교 신앙의 한 모습이다. 그러나 복음주의라고 자처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복음주의의 특징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이 성경의 권위를 최고의 위치에 두는 신앙이라고 생각된다.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가 현실에서 당하는 모든 문제에 해답이 된다고 믿는다. (딤후3:15-16) 그렇기 때문에 복음주의 교회에 서 일어나는 강해설교 운동이나 평신도를 사이에서 일어나는 개인적인 귀납법적 성경공부 운동이 다 이러한 복음주의 정신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복음주의적인 사회참여 원리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급진 신학에 대해 왈가왈부하기 전에 성경으로 돌아가서 복음주의의 허점을 발견하고 새로운 방향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제 사회참여의 원리를 찾아보도록 한다.

 

성경을 빠짐없이, 있는 그대로

첫째로 무엇보다도 성경을 바로 읽어야 한다. 있는 그대로 빠뜨리지 말고 읽고 공부하고 또 가르쳐야 한다. 신명기 17:19에서 하나님은 장래에 자기 백성을 다스릴 왕에게 “평생에(율법책을)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고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고 명했다. 여기서 하나님은 모든 말씀을 빠뜨리지 않고 조심스럽게 순종하라고 했다.(Follow carefully all the words). 사도행전20:27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다”고 했는데 이 말에서 역시 하나님의 뜻 전체(the whole will of God)를 빠뜨리지 않고 가르치는 일이 중요함을 보여준다. 그런데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강조하고 있는 복음주의 교회에서의 설교나 성경공부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성경말씀에 빗나간 것을 가르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지만 성경만을 가르친다고 하는 경우도 사실상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다 가르치지 못하고 많은 부분이 생략이 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로날드 사이더가 성경가운데서 사회참여에 관계되는 성경구절만을 모아서 책을 만들었을 정도(Cry Justice)로 성경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지만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의 그런 부분들을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배우거나 가르치는데서 생략이 되고 있다. 결국 많은 복음주의 자들이 성경을 열심히 읽고 연구하면서도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성경의 권위는 인정하면서도 성경을 읽거나 가르칠때 성경을 있는대로 다 읽고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복음주의 단체에서 만든 성경공부 교재 하나를 조사해보면서 발견한 재미있는 사실은 이 책에서 편집자들은 성경 66권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칠백여 구절을 인용하는 가운데 출애굽기와 소선지서는 한 구절도 인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책을 편집한 사람들이 출애굽기와 소선지서가 하나님의 말씀 속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그 성경이 자기들의 가르치려는 내용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성경들이 생략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출애굽기는 현재 사회경제적인 변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해방신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성경이며 소선지서는 금세기 초에 있었던 사회복음주의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성경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들은 무의식적인지는 모르지만 성경을 선택해서 읽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간 성경을 읽고 가르치는 데에 있었던 우리들의 맹점을 인정하고 성경을 사회참여라는 관점으로 새롭게 본다면 우리가 그동안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진리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레위기19장을 펴보면 9~10절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제도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가난한 사람에게 인격적인 모멸감을 주지 않으면서 그들을 돕기 위해서 곡식을 추수할 때 일부러 남겨두라는 이 규례는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구제에 대한 새로운 원리를 제시해 준다. 또 13절에서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라는 말씀이나 품군의 삯을 늦추지 말라는 말씀은 현재 부동산 투기로 인한 빈부의 격차문제나 노사분규 문제 해결을 위한 말씀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경제 원리를 가르쳐 준다. 이어서 14절은 장애자 문제에 대한 관심이 단순히 휴머니즘적인 관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원하신 성경적인 관심사임을 보여준다. 레위기하면 으레 유대교의 제사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차 있어서 현재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책으로 여겨왔다. 그리고 그 모든 제사가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는 직접 적용이 안되는 것으로 느끼고 혹 적용하더라도 십일조나 안식일 성수같은 교회자체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말씀만을 강조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성경에 귀를 기울이면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사회의 문제들에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원리들을 명확히 들을 수가 있다. 특히 레위기 25:2에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고 하신 말씀은 요즈음 논란이 되는 토지의 공개념에 대한 원리를 보여주고 있는데 성경 가운데 담겨 있는 토지의 공개념이 성경을 모르는 불신자들에게서 먼저 나와서 논의된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에 무관심하게 된 것은 성경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 경제는 외면못할 현실

성경은 비단 일반 사회문제뿐 아니라 정치문제에도 그리스도인들이 관심이 가져야할 것을 보여준다. 전통적으로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로마서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는 말씀을 기초로 해서 정부에 대해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성경적인 것으로 가르쳐 왔다. 정부가 불의를 행하고 정통성이 없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왔다 이에 대해서는 본문의 해석에 따라 의견이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과연 열왕기하 11장에 있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반역의 기록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알고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고 싶어진다. 이 기록은 정통성이 없는 아달랴라는 여자의 정권에 대항에서 요시야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반역을 도모한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이야기다. 여기서 그는 단순히 아달랴에게 반대한 정도가 아니라 여호와의 전에 있는 다윗왕의 창과 방패를 백부장에게 주면서 쿠테타를 주도한 것이다(10절). 하나님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세움을 받은 여호야다가 반역에 동조한 것을 꾸짖으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때 정권을 잡은 아달랴의 편이 아니라 반역을 일으킨 요시아와 여호야다의 편이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열왕기에 반복되어 나온다. 물론 유대 역사를 오늘 우리 현실에 문자 그대로 적용하는 데는 이론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그때 하나님이 불의한 권세를 대적하는 사람들의 편이었다면 오늘날도 하나님의 불의한 정권에 대적하는 사람들의 편이 될 수 있음을 한마디로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알고 로마서 13장을 다시 보면 사도 바울의 의도가 부패한 정권을 옹호하라는 말이 아니라 국가의 질서를 위한 법을 지켜한다는 준법정신을 강조하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뒷전에 밀어둔 성경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우리의 뒷통수를 치는 말씀을 발견하게 된다. 구약에서 사회의 불의를 향해 외치는 말씀이 가장 많이 있는 부분은 역시 예언서서 들이다. 전통적으로 복음주의들은 예언서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기록한 것으로만 생각해 왔는데 사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미래에 나타날 메시야를 예언하기에 앞서 그들이 살고있는 사회의 불의한 모습을 고발하고 그 불의의 근원이 되는 사람들을 향해 독설을 뿜기도 했다. 아모스서는 구구절절이 사회의 불의를 지적하고 있다. 미가서 2:2-2은 부동산을 전매함으로 직접 간접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외치고 있다. 그러나 예언서에 대해서 대체로 무식한 복음주의자들은 결국 선지자들이 외치는 사회정의에 대해서도 무식하게되고 만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구약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지상사역을 소개하면서 그가 말씀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병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사 고치셨다고 기록하고있다(마4:23, 11:5). 또한 배고픈 자신에게 돌로 떡을 만 들라고 유혹하는 사탄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 4:4)고 하신 예수님이 벳세다 들에서 말씀을 듣던 무리들을 빈 배로 돌아가게 하지 않고 배불러 먹이신 일은 러시아의 어느 철학자의 말대로 “우리 자신의 빵문제는 육신적인 문제이지만 우리의 이웃의 빵문제는 우리의 영적인 관심사가 되어야한다”는 진리를 실천해 보인 것이다. 이에 비해 그를 따른다는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히 거꾸로 된 듯한 느낌이다. 이것 역시 복음서를 제대로 공부하고 가르치지 못한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외에도 예수님이 그 당시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신 일은 오늘 교회가 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것인가에 대해 중요한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도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이 된다. 자기들의 소유를 서로 통용했던 초대교회의 모습이자(행2:44-45, 4:32)서로의 부족을 채워주어 평균하게 하려 했던(고후8:14)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경제생활에 기본적인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이 말씀들을 제대로 공부를 한다면 빈부의 차이가 심화되어 가는 우리 사회의 현실에 무관심하고만은 있지 않을 것이다.

종교 개혁이후 복음주의자들이 특별히 사랑해온 바울서신은 대체로 사회참여와 무관하며 주로 개인의 구원의 문제를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서신에서도 역시 사회 참여에 신학적인 기초가 되는 말씀을 찾을 수 있다. 바울은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설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개개인의 영혼을 구원하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만물을 통일되게 하며(엡1:10)만물이 하나님과 화목되게 하셨다(골1:20)고 말하고 있다. 이런 말씀들을 제대로 읽고 공부하기만 한다면 현재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신앙과 무관한 문제라고 무관심할 수만은 없다. 물론 문제를 보는 시각이나 해결방안에 대한 의견은 서로 많이 다를 수 있다. 그 문제는 피차가 더 연구하고 기도하면서 대화를 통해 찾아가야 할 것이나 우선적으로 그 문제들이 신앙의 문제로 다가오도록 해야할 것이다.

서신서중에 야고보서 같은 서신은 전체적으로 기독교인의 사회참여를 주장하고 있다. 한 민중신학자가 민중신학은 야고보서를 편애한다고 인정한 것은 의미 있는 말이다. 복음주의자들이 그들처럼 굳이 야고보서를 편애할 필요는 없지만 성경66권 중의 하나로서 철저히 공부하고 또 가르칠 필요가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2:24)는 선언은 사실상 오늘 복음주의 교회는 죽은 것이라는 선언과도 흡사하게 들린다.

이상과 같이 성경을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회속에서 여러가지 문제에서 책임있는 행동을 해야할 것을 가르침을 알 수 있다. 이제 복음주의자들이 사회참여를 해야하느냐는 문제는 사실상 복음주의자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해야 하느냐는 질문과도 같다. 결국 성경을 제대로 읽고 공부하고 가르치기만 하더라도 사회에 대한 자세가 분명히 달라질 것이다.

 

감추어진 성경의 다른 한쪽

둘째로는 읽은 성경을 바로 해석해야 한다. 성경말씀을 열심히 읽고 공부는 하지만 성경 전체에서 흘러나오는 메세지를 그대로 듣지 못하기 때문에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게 된다고 했는데 그렇게 되는 이유는 결국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안목이 있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성령의 조명을 받지만 자라온 환경이나 취향에 따른 편견을 피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어떤 말씀은 강조하고 어떤 말씀을 생략 내지는 무시하게 된다. 이런 선택적 오류는 성경을 해석하는데도 나타난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복음주의자들은 대부분이 창세기 1장부터 3장에 기록된 창조기록과 인간의 타락의 기록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 기록이 신화나 설화이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실 여부보다 창조와 타락의 의미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반발한다. 그러나 창세기의 역사성을 그렇게 강조하던 사람들이 출애굽기를 해석할 때는 갑자기 영적으로 변한다. 출애굽의 사건은 분명히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애굽의 압제하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에 항거하여 그 압제로부터 탈출한 사건임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홍해를 건너는 것은 구원을 의미하고 광야생활은 그리스도인의 성화과정을 의미한다고 설명해서 개개인의 영적인 면에 국한시켜 버린다.

그러니까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들으신 이스라엘 자손들의 부르짖는 소리를(출2:23) 애굽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압박당한 사람들의 소리로 듣지 않고 순전히 영적인 문제로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출애굽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해방신학을 그대로 다 수용하자는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출애굽기의 역사성을 인정하고 그 역사가 오늘 우리 사회에 주는 의미를 바로 이해한다면 현 사회의 불의한 체제아래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필요에 따라 어떤 때는 역사성을 강조하고 어떤 때는 영적으로 해석해버리는 바람에 현실에 해답을 줄 수 있는 성경이 힘을 잃게 되어버린 것이다.

신명기 28:1-14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어느 위치에 있는지는 잘 몰라도 아주 좋아하는 성경구절이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3절)”이나 “네 광주리나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5절)”라는 말씀은 들으면 들을수록 신이 나는 말씀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나님만 잘 섬기면 물질적으로 축복을 받게되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게 된다는 아주 듣기 좋은 말씀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좀 유치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이 말씀을 정말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그렇게 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마가복음10:17-31에서 예수님이 젊은 청년에게 한 말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21절)”이나 제자들에게 한 말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29절)”과 같은 말씀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꺼려한다. 그래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라는 말은 꼭 재산을 다 팔으라는 말이 아니라고 애써 변명을 한다. 또 “약대가바늘 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5 절)”는 말씀을 부자들이 듣고 거북할까봐 애써 바늘 귀는 크게 만들고 낙타는 작게 만들어 주려고 애쓰게 된다.

또 집이나 전토를 버리라는 권면이 제대로 가르쳐지기만 한다면 오늘날 우리사회가 당면한 부동산 투기문제에도 큰 도움이 될텐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나 교회가 부동산 투자로 인한 이익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감사하게되고 결국 사회문제를 가중시키고 말게된다.

물론 그렇다고 이 구절들을 문자 그대로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성경을 보면서 자기 취향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어떤 말씀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려하고 어떤 것은 의미적으로 해석하려는 그 선택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주의적으로 변하고 주변 사회에 대해서 점점 더 무관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요즘 교회내에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똑같은 말을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의 의미하는 바는 서로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초대교회가 성령충만함을 받은 것같이 성령충만 받고 방언을 하고 병 고치는 은사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이 말을 한다. 어떤 사람은 초대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고 복음이 강하게 전파된 모습을 회복하자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오늘 우리에게 가장 강하게 보여줄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은 바로 성령충만함을 받고 말씀을 전하면서 각자가 자기들의 소유를 서로 통용한데 있다. 그러나 그러한 초대교회에서의 실제적인 면보다 종교적인 면만을 보았기 때문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가 현실 사회와는 무관한 외침이 되고 만 것이다.

결국 사회참여에 근거가 될 수 있는 성경을 보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보고도 바로 해석을 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으로만 해석하는 바람에 성경이 현실 사회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이다.

 

넘어서야할 사고의 틀

세째로는 성경을 폭넓게 적용해야 한다. 선택적인 해석과 관련해서 복음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성경말씀을 적용하는데도 선택적인 면이 나타나는 것이다. 사실 성경의 많은 부분이 공동체에게 하신 말씀이고 내용중 많은 부분이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비해 오늘 복음주의자들은 개인주의적인 사고의 틀에 매어서 성경말씀을 개인주의적으로 적용하는 경향이 있다. 성경의 일반적인 진리가 개인적으로(Personal)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은 개인주의적(Individualistic)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말과는 다르다. 예를 들어서 누가복음10장에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개인적으로 적용이 되어 이웃에 대한 개개인의 자세가 변하게 되도록 적용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가르침의 적용이 개인주의적으로 제한되어서는 안된다. 즉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난 유대인을 돌보듯이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을 돌보는 것이 중요하지만 강도 만난 유대인의 숫자가 늘어나고 강도들이 상습적으로 유대인들을 해친다면 단순히 한 유대인을 돌보아주는 차원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강도들이 날뛰지 못하도록 사회적인 차원에서 해결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한다면 강도 만나 얻어맞고 난 다음에 도와주기보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할 것이다. 결국 적용이 개인주의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적이며 구조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질 때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또 로마서12:2의 유명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라는 말씀을 적용하는 데도 이런 면이 나타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을 적용해서 세상에 물들지 않기 위해 술좌석을 피하거나 요란한 의상이나 화장을 피하는 것으로 적용을 한다. 그런 적용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한 개인적인 적용으로 제한이 되어서는 안된다. 정작 우리가 본받지 말아야할 이 세대의 불의한 모습은 모순이 되는 법과 인간성을 말살하는 교육제도들과 정치인들의 부정이나 재벌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불법적인 경제활동들이며 또 부동산 투기나 자유로운 표방하는 퇴폐문화와 같은 사회문제를 말한다. 이런 것들을 본받지 말라는 말씀은 개인 차원에서 조심하는것 이상의 사회전반에 관한 의사표현으로 적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이 세대를 본 받지 않으려면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서 의사를 발표하고 직접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자기자녀가 인신매매단에 끌려가지 않도록 보호만 할 것이 아니라 인신매매가 근절되기 위한 노력을 해야할 것이고, 포르노성 영화관에 가지말라고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그런 영화가 상영되지 못하도록 하거나 적어도 지금과 같이 무분별하게 광고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노력이 있어야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사회참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현 사회에서 생기는 문제와 성경을 연결시키면 직접적으로 사회문제에 대한 언급이 없는 성경말씀에서도 오늘 그리스도들을 향해서 사회에서 책임을 다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을 것이다. 즉 신문에 나타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성경에서 찾게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노력이 없다면 자기도 모르게 성경을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수천년전에 쓰여진 고전 작품의 하나로 취급해 버리는 셈이 될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이 진정으로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여러가지 노력을 하기에 앞서 그렇게도 귀중하게 생각해온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것만이 진정한 사회참여를 위한 씨앗이 될 것이다.

 

출처 : 등불 든 이의 삶!
글쓴이 : 순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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