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고 부모들의 특별한 자녀교육법
1장 부모는 복잡한 춤을 추어야 한다
부모는 복잡한 춤을 추어야 한다
명지가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었던 11월의 어느 날, 종종걸음으로 귀가를 서두르던 나는 먼발치로, 우리 집 앞에서 어떤 아이가 추운 날씨임에도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 애가 바로 우리 아들이었다. “엄마, 저것 좀 보세요. 거미가 집을 짓고 있어요.” 거미 한 마리가 대문과 전깃줄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집을 짓고 있었다. 우리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거미가 집 짓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정말 신기해요.” “그래. 아무리 하찮은 곤충이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신비한 세계를 간직하고 있단다.” “엄마 올 시간이 다되어 정류장으로 마중을 나가려는데, 거미가 저기서 집을 짓고 있는 거예요. 거미가 집 짓는 걸 본 사람은 우리 반에서 나 혼자뿐일 걸요.” “네 덕분에 엄마도 귀한 구경을 했구나.” 그날 이후 명지는 대문을 지날 때마다 그 거미를 유심히 바라보곤 했는데, 훗날 명지가 생물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게 된 것도, 어쩌면 그날의 추억이 밑거름으로 작용했는지 모를 일이다.
흔히 사람이 삶에 쫓기고 시간에 쫓기다 보면 마음의 여유를 잃게 마련이고, 세상은 점점 빠른 속도로 변해가기 때문에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다간 낙오되기 십상인데, 이것은 어른들의 세계다. 그리고 학원 같은 곳에는 속성반이라고 해서 몇 년씩 학습하고 훈련해야 할 것을 3~4개월 안에 후다닥 끝마치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들의 성장과 발달에는 이 속성이 통하지 않는다. 성장이라는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밟아 올라가야지, 두세 개씩 건너뛸 경우 인생의 어느 한순간 훌쩍 건너뛴 그 계단이 반드시 아이의 발목을 잡게 된다. 그러므로 아이에게 빨리 먹어라, 빨리 끝내라, 하고 다그치지 말라. 왜냐하면 그건 어른들의 세계에서나 통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즉 아이와 이야기하거나, 아이의 일을 결정할 때는 잠시 속도를 늦추는 것이 좋다. 그래야 아이의 뜻이 보이고, 말이 들리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부모들은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의 핸들과 아이의 손을 양손에 쥐고서 복잡한 춤을 추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세상살이의 빠르고 숨 가쁜 박자에 맞추어 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느긋하고 편안한 아이의 박자에 맞추는 것, 이 상반된 두 가지를 실천하는 것이 부모 노릇의 어려움이다.
의리를 아는 인간으로 키워라
“동윤이 어머니, 동윤이 어드바이저입니다. 오늘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 올라가는 길에 아이들끼리 눈싸움을 하다가 동윤이가 좀 다쳤습니다. 눈가가 좀 찢어져서 병원에 데리고 가 꿰매고 왔어요.” 눈을 다쳤다는 말에 더럭 겁부터 났다. “눈이라면…… 시력에는 문제가 없을까요?” “다행히 눈 위쪽이라 시력에는 문제가 없답니다.” 그러고 나서 선생님은 동윤이를 바꿔주셨다. “엄마, 전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안경알이 깨지면서 다친 모양이구나.” “예, 그래서 안경 새로 해야 돼요.” 동윤이는 상황을 설명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일단 안경점에 전화를 걸어 아이 시력에 맞는 안경 두 개를 주문해 놓고, 다음 날 안경을 찾아 학교로 달려갔더니 동윤이는 한쪽 눈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날은 내가 직접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운전을 하면서 나는 아이에게 잔소리를 했다. “동윤아, 집을 떠나 있을 때는 네 몸을 더 소중하게 아껴야 돼.” “애들끼리 놀다 다칠 수도 있고 그런 거죠, 뭐.” “흉터가 생기지 말아야 할 텐데…….” 찢어진 상처 때문에 며칠 동안 통원치료를 해야 했으므로 나는 가정관에 머물면서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다녔는데, 그동안 아이와 나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한편으로는 누가 던진 눈에 동윤이가 맞았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녀석은 그 사실에 대해 끝까지 함구했고, 나 역시 묻지 않았다. 상처가 아물고 실밥만 뽑으면 된다기에 나는 서울로 돌아오기로 했다. 그래서 동윤이 어드바이저 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진모 녀석이 어찌나 걱정을 하던지…….” 선생님 말씀을 듣고서야 눈을 던진 아이가 누군지 알았다. 그제야 동윤이와 선생님, 그리고 동윤이에게 눈을 던진 아이 모두 적지 않게 긴장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동윤이는 친구를 위해 엄마에게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선생님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춘기 아이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배려하고 챙겨주시는 선생님과 친구를 감싸는 아들 녀석이 새삼 고맙고 대견스러웠다.
중학교 3학년 때, 동윤이는 운동을 하다가 다쳐서 다리에 깁스를 한 적이 있었다. 정형외과에 가서 치료 받고 오는 길에 퇴근하던 남편과 합류를 했는데, 무슨 얘기를 나누던 중에 동윤이가 남편에게 불손하게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집에 오자마자 아이를 안방으로 불렀다. “너 아까 차에서 아빠한테 말하는 태도가 그게 뭐야? 그렇게 오만하고 불손한 태도는 엄마가 용서 못해.” “엄마, 잘못했어요. 나는 그냥 별 생각 없이 말했는데…….” 나는 한쪽 발에 깁스를 해서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녀석의 다른 쪽 종아리를 독하게 때렸다. 생전 처음 아이에게 대본 매였다. 나는 아이를 자기 방으로 보내고서 소리 죽여 울었다. 자식을 때리면서 가슴 아프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이것이 아이에게 주는 ‘마지막 회초리’라는 사실이, 이제는 아들이 다 자라 내 손으로 매를 때려가며 가르치고 바로잡을 일이 없을 거라는 자각이 가슴을 때렸다.
동윤이가 민사고를 졸업하던 날, 우리는 이것저것 챙기느라 날이 어두워서야 학교를 나설 수 있었다. 교문을 지나 소사리 고갯길로 접어들자, 우리는 차를 세우고 차가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동윤아, 너 여기 입학하기 전에 다리에 깁스했던 생각나니? 그때 너 종아리 때리고 엄마가 얼마나 많이 울었는데…….” “네. 생각나요.” “앞으로 공부하느라 지쳤을 때, 어른이 되어가면서 힘들 때, 네가 자식 낳아 기르면서 어려울 때, 엄마가 왜 종아리를 때렸는지 생각날 때가 있을 거야.” 그 후 동윤이는 IT연수차 미국으로 떠났고, 나에게 보낸 크리스마스 엽서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엄마, 건강하세요. 그리고 엄마답게 사세요.”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 녀석이 엄마 마음을 다 알아버린 것일까? 나는 한동안 아들의 엽서를 자랑스럽게 책상 앞에 붙여두고 지냈다. 나는 아직도 내 아이들이 부모 마음을 다 안다고는 생각지는 않는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 어느덧 성장한 제 아이들을 바라볼 때,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처럼 부모 가슴으로 파고드는 날이 있으리라 믿는다.
아이에게는 도구가 필요하다
민재는 어릴 때부터 언제나 제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민재가 책을 들고 있지 않을 때는 몸이 아플 때뿐이었다. 민재는 일상적인 질문에는 건성으로 반응하면서 책에 대한 이야기만 꺼냈다 하면 막힌 둑이 터진 듯 술술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침대 머리맡에도, 화장실에도, 식탁에도, 텔레비전 앞에도 책이 있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민재는 학교 성적이나 생활태도, 교우관계 등에서는 모범생이었지만, 성격이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많이 타서 자기를 표현하는 데 있어 무척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아이들과 많이 어울리게 하려고 친구들을 불러 함께 야유회를 간다든지, 집으로 초대해 같이 놀도록 했다. 그러나 타고난 성격은 어쩔 수 없는지 사람들 앞에만 나서면 얼굴이 빨개지고, 수줍음은 날로 더 심해졌다.
민사고에 입학하고 난 뒤 우리는 민재에게 디지털 카메라를 선물하면서 사진 홈페이지를 만들어볼 것을 권유했는데, 2개월 뒤 민재는 사진 500장이 담긴 CD를 집으로 보내왔다. 거기에는 기숙사, 교정 친구들, 선생님들, 학내행사, 체육시간, 동아리 활동 등 학교생활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장면마다 재기발랄한 감성이 살아 숨 쉬는 그 사진들을 보면서 우리는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아이의 내면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카메라를 잡고 나서부터 민재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고,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생활하면서 말도 좀 많아지고 낯가림도 훨씬 줄어들었다. 카메라 3대를 망가뜨린 민재는 민사고에 사진 동아리를 만들고 교내 사진전을 열더니 거리사진전까지 기획하고 개최하는 열성을 보여 우리 부부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아이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한때 우리는 아이의 약점을 보완해줄 만한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탐색했다. 누군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웅변을 시켜보라고 권해서 학원에 보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민재에게는 맞지 않았다. 우리는 디지털 카메라를 선물했고, 민재는 렌즈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사진을 찍고 그것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아이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면서 그들과 친구가 되었다. 누구에게나 세상과 소통하는 도구가 있을 것이다. 망원경, 현미경, 그림, 글, 말, 노동, 학문, 연구……. 사람들은 이런 도구를 통해 이야기를 나누고, 친구를 만나고, 돈을 벌고, 자존심을 건다. 일과 여가의 구분이 날로 흐려지고 있는 요즘은 소통을 위해 선택한 도구가 직업이 되기도 한다. 어떤 아이에게나 도구는 필요하다. 친구를 사귀거나 사회성을 기르기 힘든 아이라면 더욱 그렇다. 아이는 그것을 통해 세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것이다.
2장 아이들은 부모가 보지 않는 사이에도 자란다
아이들은 믿는 만큼 보답한다
“여보, 지민이 중간고사가 다음 주 월요일부터니까 이번 주말에 가봅시다.” “그럼 우리 아들 맛있는 거 사 주고 응원이나 하고 올까?” 대구에 사는 우리 부부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아이를 보러 갔다. 민사고 아이들은 1학년까지 광범위한 내용의 교양을 공부하다, 2학년에 올라가면 본격적인 대학입시 준비를 시작한다. 2학년 유학반 아이들은 SAT(미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와 AP(대학과목 선이수제도) 준비에 들어가야 하므로 2학년 1학기 중간고사는 매우 중요하다. 조기졸업 제도가 있어서 빠른 아이들은 1학년 말부터 대학입학 준비를 하기도 한다. 우리가 학교에 도착하니 역시 모두들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지 학교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기숙사 지민이 방으로 올라가 보니, 뜻밖에 방에는 수십 장의 사진들이 펼쳐져 있었고, 지민이는 방바닥에 엎드려 뭔가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었다.
선배들 졸업 앨범 편집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지민이가 민사고 영자신문 편집장을 맡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사태가 벌어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었다. “너, 공부하기 싫어서 이런 일을 떠맡았니? 이럴려고 민사고 온 거야?” “엄마, 무조건 화만 내지 마시고 제 말 좀 들어보세요.” “다 필요 없어! 편집장이란 게 결국 지 공부는 팽개치고 졸업 앨범이니 영자신문이니 하는 것들 만드는 데 시간 다 쓰는 거였어?” “엄마, 졸업 앨범 편집 작업을 마쳐서 보내야 될 날짜는 이미 정해졌는데, 중간고사까지 겹치니까 제 힘으로는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어요. 저도 고민을 참 많이 했는데……. 제 성적보다 졸업 앨범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너무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엄마는. 상황이 이렇게 될 것 같았으면 되도록 많은 아이들에게 도움을 청해서 앨범 편집 일을 빨리 끝냈어야지.” “그게 제 마음대로 안 됐어요. 아무한테나 맡길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모든 애들이 다 내 일처럼 나서서 해주지도 않고……. 엄마, 중간고사를 망치면 내신은 당연히 타격을 받죠. 하지만 난 유학반이니까 내신 비중이 국내 대학처럼 절대적인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선배들이 앨범을 못 받은 채 졸업하는 장면을 상상하니까, 이건 영 아니더라구요. 난 형들이 졸업식 날 앨범을 들고 가게 해주고 싶었어요. 내가 아니면 누가 하냐구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 부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남편은 나를 위로했다. “여보, 너무 속 끓이지 마. 애를 저렇게 반듯하게 키운 건 우리야. 안 그래?” 하긴 그 말이 맞는 말이었다. 우리는 1등 하라고 아이를 다그친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한 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해낼 것을 주문했다. 실패는 인정할 수 있지만 포기는 용서할 수 없다. 아마 그런 훈련이 지민이를 앨범 편집에 끝까지 매달리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부모가 그렇게 키워놓고는 도리어 혼을 내다니……. 슬그머니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시험 결과가 나오고 영자신문도 발간되었으며, 졸업앨범 편집도 무사히 끝나 지민이 말대로 선배들이 앨범을 들고 졸업식을 마쳤다. 그 대신 지민이의 성적은 엉망이었다.
아이는 3학년이 되어서야 모든 동아리 활동을 그만두고 영자신문 편집장직을 후배에게 넘겨주더니 읍내에 나가 머리를 박박 밀었다. 아이는 나에게 휴대폰도 반납했다. 지민이는 내신 성적을 위한 공부와 유학준비를 동시에 해나가기 시작했고, 결국은 목표를 이루었다. 아마 남들이 3년 동안 공부한 것을 1년 만에 해치웠을 것이다. 부모의 눈에 아이의 행동이 불안해 보여도, 아이를 다그치고 잔소리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설령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해도 믿고 기다리는 게 최선이다. 나는 가끔 스스로에게 물어보곤 했다. 나는 우리 아이를 얼마나 믿고 있는가? 70%? 50%? 그렇다면 이 퍼센티지의 근거는 무엇인가? 우리 아이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보여준 행동? 성적? 혹시 거기에 나의 일방적인 평가라는 위험요소가 내포되어 있는 건 아닐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이들은 부모가 믿는 만큼 보답을 한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보지 않는 사이에도 자란다
준이는 타고나기를 흥이 많은 아이였다. 어릴 때부터 노래 소리만 들려오면 흥얼거리고 춤을 추어야 직성이 풀렸다. 이렇게 흥이 많고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를 공부만 하라고 가둬둔다면 아이도, 나도 못 견딜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웬만한 일이 아니면 일일이 간섭하거나 말리지 않았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준이는 제 방을 가수의 브로마이드로 도배를 하고, 음악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다는 듯 귀에서 이어폰을 떼지 않았다. 그런데 좋아하는 가수가 달라질 때마다 브로마이드가 바뀌었는데, 이적이라는 가수만은 예외였다. 다른 가수들과 달리 이적의 사진은 벽에서 내려진 적이 없었고, 악보를 사다 피아노를 치며 〈달팽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팬클럽에도 가입해 열심히 활동했다.
하루는 준이가 왜 그렇게 이적이란 가수를 좋아하는지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그의 어머니는 유명한 여성학자였다. 내 생각에는 아들보다 어머니가 더 대단한 사람인 듯했다. 그분 역시 아들이 검정 가죽바지에 번개 맞은 머리로 텔레비전에 나와 노래하는 걸 보고 기절할 뻔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분의 교육방법은 간단(첫째, 아이를 그냥 놔두기. 둘째, 아이의 특성을 이해하고 믿고 기다려주기)했다. 이는 과외 한 번 시키지 않고 아들 셋을 모두 서울대학교에 보낸 대선배의 충고였는데, 그분은 내게 ‘아이들은 부모가 보지 않는 사이에도 자란다’는 당연한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흔히 전문가들은 아이 스스로 생각하고 실천할 때까지 조바심 내지 말고 기다리라고 한다. 그럼 조용히 지켜보며 기다리는 것과 방치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오랫동안 그 차이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결국 어머니 자신이 스스로를 믿어야 아이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는 누구나 도인이 되어야 한다. 아이가 가진 힘을 믿고 아이 자체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려면, 부모가 먼저 자기 스스로를 믿고 인정해야 한다. 이지러지고 찌그러진 내 안의 미운 점들을 어루만지면서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아이를 편안하게 키울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는 자신의 상처와 허물을 고스란히 아이에게 덧씌우게 되어 있다. 부모와 자식이 맞물려 돌아가는 이 이치에는 한 치의 틈도 없다. 세상의 모든 아이는 부모를 닮는다. 아이의 말투, 행동, 성적, 기질……. 그것을 제공한 사람은 바로 엄마와 아빠이다.
하루 종일 게임만 해라
성주 아빠와 나는 주말마다 민사고 생활관에서 묵으며, 아이가 조도 측정기로 가로등의 거리별 조도를 측정하는 실험을 도와주었다. 호기심이 많은 성주는 조립하고 구성하는 것을 좋아해 중학교 때는 발명 영재로 발탁되어 발명교육을 받았다. 그 무렵, 바람을 불어넣으면 돔 모양으로 부풀어 오르는 에어텐트를 발명해 발명대회에 출품하기도 했다. 에어텐트를 만들고 나서 성주가 그 다음으로 생각한 것이 ‘반사경 가로등’이었다. 우리 부부는 워낙 여행을 좋아해서 틈만 나면 차를 타고 돌아다녔는데, 어느 날 성주는 어둠이 내린 차창 밖을 한참동안 바라보더니 가로등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엄마, 내 생각대로만 하면 가로등을 저렇게 많이 설치하지 않아도 돼요. 가로등 하나에 그 빛을 반사시키는 반사경을 설치하면 같은 빛으로 두 배를 밝게 할 수 있다구요.” “그래.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전기를 훨씬 절약할 수 있으니까 좋지.” 나는 이렇게 대꾸했지만 같이 실험해 보자는 말을 선뜻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민사고에 입학해 아이가 이런 아이디어를 꺼내자 선생님께서 흔쾌히 실험을 허락해 주셨던 것이다. 성주는 밤마다 잠을 줄여가며 끝없는 실험과 시행착오, 연구를 거듭한 후에 드디어 발명대회에 참가했다. 성주는 심사위원들 앞에서 깔끔하게 프레젠테이션을 마쳤다고 알려왔다. 나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우리 아들이지만 정말 대단하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해내는 그 정신, 아주 마음에 든다. 그런데 혹시 네 반사경이 상을 받지 못하더라도 우리 너무 실망하지 말자. 그동안 고생하면서 실험하고 완성한 것만으로도 엄마 아빠는 네가 훌륭하다고 생각해.” 다행히 성주는 반사경으로 발명대회 대통령상을 받았다.
성주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아이가 게임중독이 된 게 분명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한참을 궁리했다. 그 나이 때는 부모가 아무리 잔소리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은 아이 스스로 깨닫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나는 아침을 먹으면서 슬쩍 그 이야기를 꺼냈다. “성주야, 너 요즘 게임 아주 재미있게 하더라.” “네, 무지 재미있어요. 너무 많이 안 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아냐, 그럴 필요 없어. 엄마 눈치 보지 말고 너 하고 싶은 대로 실컷 해. 오늘 하루 종일. 대신 다른 건 절대 하지 말고 게임만 해야 돼.” 성주는 그날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밤 9시쯤 되자 코피가 터졌다. 그걸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을 온종일 게임만 하도록 했더니, 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엄마, 이상하죠? 하루 종일 게임을 하는 날은 굉장히 피곤해요. 다른 날보다 잠도 많이 자게 되고 다음 날까지 어지럽기도 하고……. 아무래도 나한테는 게임이 잘 안 맞나봐요.” 그 뒤부터 성주는 스스로 게임 시간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생물학을 전공한 엄마의 영향을 받았는지 성주는 의대를 선택했다. 민사고에서 받은 다양한 교육 덕택에 아이는 오케스트라 바이올린 연주자로, 대학신문의 집필자로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음반 작업을 하느라 녹음실에서 살다시피 한다. 엄마 입장에서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데도 적극적인 성주가 대견하고 믿음직스럽다. 성주가 민사고에 입학하고 나서, 민사고 선배 어머니들을 만날 때마다 듣는 이야기가 있다. 민사고에 보내면 아이들이 하나같이 “잘 있으니 걱정 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대학에 가야 엄마 품을 떠나 독립적인 생활을 시작하지만, 민사고 아이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자기 생활을 스스로 컨트롤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가 너무 빨리 제 앞가림을 하는 것 같아서 섭섭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차피 감당해야 할 일이라면 빨리 받아들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3장 아이와 한편이 되어주어라
공부 잘한다고 떠받들지 마라
중학교에 입학한 명진이는 시교육청이 주관하는 전체 모의고사에서 1등을 차지해 장학금 십만 원을 받았다. 아이는 같은 반에 가정형편이 어려워 등록금을 못 내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를 도와주어도 되겠냐고 물었다. 나는 참 좋은 생각이라며 그 자리에서 승낙을 했다. 명진이가 담임선생님께 그 이야기를 하면서 상금을 건네자 선생님은 ‘우리 반에 등록금 못 내는 친구가 한둘이 아니라서 누구 한 사람만 도와주기는 힘들다. 그러니 이 상금으로 너에게 필요한 책을 사 보는 게 좋겠다’라고 말씀하셔서, 명진이는 아빠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아빠, 우리 반에 형편이 어려워 등록금을 못 내고 있는 아이들이 있는데 그 돈이 전부 합해 육십만 원이래요. 내가 받은 장학금 십만 원에 아빠가 오십만 원을 보태주시면 안 될까요?” 명진이 아빠는 두말없이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대신 그 아이들이 누가 돈을 냈는지 모르도록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중학교 2학년 때는 단짝친구가 집안 형편이 어려워 수학 여행비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담임선생님께, ‘직접 돈을 주면 친구의 자존심이 상할지도 모르니 선생님이 내주는 것으로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명진이는 유난히 인정이 많고 정의감이 강한 아이였다. 형편이 어려운 친구는 꼭 도와주어야 직성이 풀렸고, 길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가시는 할머니를 보면 들어드려야 마음이 편한 아이였다. 그리고 아이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전교 1~3등을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냈지만 자신이 우등생이라는 것을 자랑하거나 드러낼 줄 몰랐다. 집에서도 아이가 공부를 잘한다고 특별대우를 하거나 꼭 해야 할 일을 면제해준 적이 없었다. 올 백 성적표를 받아 와도 그 자리에서 칭찬하고 격려하면 그뿐, 그것을 다른 일과 연결시키지 않았다.
대신 명진이가 무언가를 제의하거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봤을 때 나는 아이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우리는 언제나 아이와 한편이었다. 아이가 말도 안 되거나 엉뚱한 얘기를 해도 나무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이나 진실은 보는 사람의 생각이나 입장에 따라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다. 결국 아이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우리가 너를 믿고 존중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끔은 딴짓을 하도록 내버려둬라
우리가 처음 홍콩에 갔을 때, 대기업에서 파견된 임직원과 그 가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당시 교포사회는 아빠들이 업무와 접대로 너무 바빠서 아이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평일에는 업무 때문에 바빠서 아이들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고, 주말에는 접대 겸 여가로 골프를 치러 가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었다. 나 역시 골프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주말마다 아이들을 아내에게 떠맡기고 골프장으로 가서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이들과 멀어질 게 분명했다. 아이들과 아빠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확실한 공통분모가 있어야 한다. 그 공통분모를 통해 서로를 알고, 신뢰를 쌓아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와 아빠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을 찾으려면 아빠가 아이 쪽으로 눈높이를 맞출 수밖에 없다. 선택은 간단했다. 골프냐, 아이들 교육이냐, 둘 중 하나를 포기하는 거였다. 그래, 좋다! 내 자식을 위해 골프를 버리자.
결국 나는 한국 아이들로 구성된 리틀야구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야구를 통해 아이들에게 규칙을 지키는 정신과 신사적인 태도를 가르쳐주고 싶었다. 나는 토요일마다 학교 운동장에 모여 연습을 하고 일요일에는 다른 팀과 시합을 하도록 일정을 짰다. 연습과 경기가 끝난 뒤에는 매번 우영이에게 800미터 운동장을 다섯 바퀴씩 뛰도록 했다. 체력과 지구력을 길러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한 가지 운동에 전념하도록 함으로써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정신력을 키워주고 싶었다. 우영이의 학습 문제를 고민할 때도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재미있게 받아들이게 할까?’ 그것부터 연구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나는 우영이가 학원에 의존하도록 하고 싶지 않아서 무엇이 우리 아이에게 맞는 학습법인지 계속 의논하고 연구했다. 그리고 시험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리 성적이 나쁘게 나와도 나무라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농사처럼 어려운 농사가 없는 법이다. 자식농사를 위해서라면 때로 부모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라고, 내놓으라고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인다. 내 인생과 자식의 인생을 종이 위에 올려놓고 곰곰이 바라보면 상당 부분 겹쳐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내 삶과 자식의 삶은 결코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 도리가 없다. 최선을 다해 농사를 지을 수밖에.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엄마, 안 돼요!” 이제 세 살이 된 혁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떼를 쓰고 울었다. 청소를 하고 나서 내가 베란다에 펼쳐둔 신문지에 쓰레기를 버리고 있는데, 아이가 다가와서 신문지에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고 떼를 쓰는 것이었다. 애가 도대체 왜 이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혁아, 엄마 지금 너무 힘드니까 청소 방해하지 마. 알았지?” 혁이는 그래도 막무가내였다. “그건 안 돼요…….” “너 정말 계속 이럴래?” 나는 녀석의 엉덩이를 몇 대 때려주었다. 아이는 더욱 서럽게 울어댔다. 한참이 지나 아이가 좀 안정되자 나는 혁이를 안고 엉덩이를 쓰다듬어 주면서 물었다. “혁아, 아까 엄마한테 왜 그랬어? 엄마가 아까 베란다 신문지에 쓰레기 버리는 거, 왜 못하게 했어?” “예쁜 누나 얼굴이 더러워져서 그랬어.” 세상에! 그 대답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쓰레기를 버린 그 신문지에 유명한 여자 배우 얼굴이 크게 실려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랬구나. 미안해, 혁아. 다음부터는 네가 싫다고 할 때 왜 그러는지 꼭 물어볼게.”
혁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태권도장에 보냈더니 일주일 정도 다니다가 그만두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태권도를 왜 꼭 해야 되는데요?” “혁아, 남자라면 자기 몸은 자기가 지킬 수 있어야지. 사람이 무엇이든 한 번 시작을 했으면 끝장을 봐야 하는 거야. 태권도도 일단 시작했으면 최소한 품띠까지는 따야지.” 나는 아이를 살살 달래서 태권도를 계속하도록 만들었고, 마침내 품띠 심사를 보는 날이 되었다. “엄마, 오늘 심사에서 붙으면 태권도 그만둬도 되죠?” “넌 태권도가 그렇게 싫으니?” “네, 싫어요.” “왜?” “나는 남한테 맞는 것도 싫지만 남을 때리는 것도 그것 못지않게 싫어요. 사람은 누구나 맞으면 아프잖아요.”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이가 싫어하면 왜 싫은지 반드시 물어보기로 약속하고서 미련한 이 엄마가 그걸 잊어버린 것이다. “그래, 그만둬. 당장 그만둬도 돼. 엄마는 네가 그렇게까지 싫어하는지 몰랐어. 미안하다.” 품띠 심사가 끝나자마자 혁이는 태권도를 그만두었다. 나는 그 일로 운동을 시켜도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시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에게 일방적으로 엄마의 생각을 말하고 강요하기 전에 아이의 말에 충분한 귀를 기울이는 것. 그것은 나도 알고 있었지만 내 아이의 말을 잘 들어주고 존중하는 건 쉽지 않았다. 아직은 어린아이이고, 나는 언제나 바쁜 엄마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의 조바심이 그것을 힘들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나는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겨우 혁이가 무슨 말을 할 때 아이의 눈을 마주 바라보고 찬찬히 들어주는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내 생각과 아이 생각의 틈을 좁히는 지름길이 되기를 바라면서.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부모가 언제 어떻게 적절한 도움을 주어야 하는지, 그 순간을 알아차리기가 어려웠다. 아니, 부모가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 만약 우리 아이가 민사고에 가지 않고 기숙사 생활을 하지도 않았다면,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끊임없이 걱정을 하고 잔소리를 했을 것이다. 집에서 데리고 있으면서 엄마가 일일이 잔소리하지 않아도 혁이가 자기 앞가림을 멋지게 하는 걸 보고, 나는 엄마의 잔소리가 아이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4장 커다란 질문
지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라
“엄마, 요즘은 사진을 찍고 있어요.” 지금도 공부를 계속하고 있는 둘째는 인문학에서 사회과학으로, 다시 예술로 관심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 부모 입장에서야 자식이 얼른 자리를 잡았으면 싶고, 그래서 조바심이 날 때도 있지만, 아이 앞에서만큼은 절대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아이는 지금 자신의 일생을 걸고 도전할 만한 일을 찾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평생 동안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그것을 찾는 데 시간이 몇 년쯤 더 걸리면 어떤가?
나는 어릴 때부터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애썼다. 무엇을 배우라고 강요하기보다 본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귀담아 듣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예로 아이들이 고학년이 되자 용돈 교육을 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일단 식탁 한쪽에 돈 바구니를 놓고 각자 알아서 꺼내 쓰도록 했다. 처음에는 필요 이상의 돈을 가져다가 이것저것 사들이고, 친구들에게 인심도 쓰는 듯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나름대로 돈 쓰는 요령을 터득했는지 꼭 필요한 만큼만 알아서 가져갔다.
나는 평소 아이들에게 “~을 꼭 해라”, “~을 하면 안 된다”라는 말을 별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뭔가를 하나 제시한 다음 그 기준에 맞게 행동하기를 기다렸다. 충분히 기다리면 아이들은 그 나이에 어울리는 기준을 발견하게 마련이다. 한편 공부 못지않게 관심을 기울이고 중요시한 것은 신앙과 봉사였다. 나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자선과 자원봉사 활동을 의무적으로 시켰다. 이웃과 나누는 것을 연말이나 일 년에 몇 번 하는 정도로 끝낸다면 그것은 봉사가 아니라 행사다.
한편 철이 일찍 들어 결과를 빨리 보여주는 자식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천천히 꽃을 피우는 대기만성형 자식도 있기 때문에 부모는 모든 것을 감수하고 기다리면서 지켜보아야 한다. 부모는 조심스럽게 방향만 잡아주면 된다. 그리고 내 자식이 아무리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 군계일학처럼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해도 그것을 소리 내어 자랑하거나, 거만해지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이들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존재이므로 수없이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그것을 이겨내야 하는데, 아이가 남들보다 좀 뒤떨어질 경우, 그것을 야단쳐서 아이 기를 죽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참고로 아이가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분명 있기 마련이다. 부모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꼼꼼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을 모르고 있다면 아이와 부모 사이에 의사소통이 안 되고 있다는 뜻이다. 내 아이의 기질과 개성을 파악하려면 아이와 부단히 이야기하고 같이 뒹굴며 놀아야 한다. 부모가 지나친 기대감을 가지고 있거나, 왜곡된 신념을 가지고 있으면 아이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
아주 특별한 여름방학
동국이가 중학생이 되어 처음 맞이하는 여름방학이었다. 동국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우리 가족은 여름방학마다 물놀이를 즐겼다. 하지만 이제 아이가 중학생이 되었으니 방학도 달라져야 했다. 그래서 나는 한 달 전부터 여름방학을 어떻게 보낼지 이리저리 궁리했다. 방학을 이용해 봉사활동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번 기회에 아이들을 데리고 제대로 된 봉사활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방학이 다가오자 동국이는 어디로 캠핑을 갈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엄마, 이번 여름방학에는 어디로 갈 거야?” “어차피 네 봉사활동 시간을 채워야 하니까 이번 기회에 우리 봉사 한 번 제대로 해보자. 용인에 장애자 시설이 한 군데 있는데, 가서 그 사람들을 도와주는 거야.” “그렇구나. 근데 엄마, 난 아직 그런 데 한 번도 안 가봤는데 잘할 수 있을까?” “엄마도 처음이야. 가서 배우겠다면 거기에 계시는 분들이 도와주겠지.”
봉사를 하러 가기로 한 날, 동국이와 작은 아이 동민이를 데리고 새벽같이 집을 나섰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중증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사는 곳이었는데, 대부분이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았다고 한다. 동국이는 처음 보는 아이들의 모습에 겁을 먹고 얼른 내 뒤에 숨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아이들과 점점 친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각자 맡은 내용이 달라서 뿔뿔이 흩어져서 일을 했다. 나는 빨래를 맡았고 동국이는 아이들 목욕을, 동민이는 아이들과 놀아주는 일을 맡았다. 그날 봉사를 무사히 마친 후, 돌아오는 버스에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동민이는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이 힘들었는지 버스에서 곯아떨어졌다. 동국이는 낯선 눈으로 차창 밖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엄마, 나랑 동민이를 이렇게 건강하게 낳아줘서 고마워.” “어이구, 우리 아들이 오늘 많은 생각을 했구나!”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해. 가슴에 돌멩이 하나가 들어 있는 것 같아. 오늘 내가 목욕시켜준 아이가 전부 열다섯 명이거든. 그중에 인수라는 애가 있어. 세 살짜리 어린앤데. 목욕이 끝날 때까지 내 손을 꼭 잡고 놓아주지 않았어. 그래서 좀 힘들었는데, 꼭 내가 그 애 엄마가 된 기분이었어. 그 애 엄마도 어딘가에 있을 텐데. 아이가 보고 싶지 않을까?” “왜 안 보고 싶겠니? 매일매일 아이 생각을 하겠지. 하지만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야. 자식을 낳은 어미는 그 자식을 잠시도 가슴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거란다. 죽을 때까지.” 우리는 일주일 동안 그곳에 매일 가서 빨래를 해주고 청소를 하고 같이 놀아주었다. 마지막 날은 그동안 정든 아이들이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 애를 먹었다. 시설에서 나오는 동국이의 손에 막대사탕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인수가 줬어. 형아는 집에 많으니까 너 먹으라고 아무리 말해도 못 알아들어.” 동민이도 아쉬워했다. “엄마, 우리 내일부터 여기 안 오지?” “응, 이제 봉사 끝났어.” “그럼 내년 여름방학에 또 오자.” “그래.”
하지만 그곳을 다녀간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우리 역시 다시는 그곳을 찾지 못했다. 이후 동국이는 민사고에 입학해 재활원으로 봉사활동을 나갔다. 그곳에 다녀온 뒤 아이가 전화를 했다. “엄마, 우리 옛날에 봉사하러 갔던 용인 있지? 거기서 나한테 막대사탕 주었던 인수 있잖아.” “그래, 기억난다.” “그 애를 만났어.” “뭐? 그 애라는 걸 어떻게 알아봤니?” “내가 계속 목욕시켜줬잖아. 팔에 커다란 지도 모양의 점이 있었거든.” “인수도 널 기억하든?” “아니, 기억 못해. 그때는 걸어 다녔는데, 이제 걷지도 못하던걸.” “저런, 딱하기도 하지! 너희들은 거기서 무슨 봉사를 하니?” “기저귀도 갈아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다 해.” “대소변까지 치운단 말이야? 아유, 그건 엄마도 아직 안 해봤는데…….” “다른 아이들도 다 하는데, 뭐.” 동국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아, 아들이 나보다 훨씬 더 큰 사람으로 느껴졌다.
5장 넓은 세상으로 보내라
때로는 회초리 교육도 중요하다
민사고에는 입학식을 하기 전 며칠 동안 단체생활을 하면서 신입생들에게 예비교육을 시키는 전통이 있다. 예비교육이 끝나는 날, 새로 맞춘 교복인 한복을 입고 한껏 들뜬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정우는 너무 피곤했는지 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똑바로 누워 자라고 몸을 뒤집어주다가, 회초리 자국이 선명하게 난 아이의 종아리를 발견했다. ‘한 번도 매를 들지 않고 키운 아인데……’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고 일어난 정우에게 내가 물었다. “정우야, 너 학교에서 회초리 맞았니?” “네, 보셨어요?” “제가 잘못해서 맞았어요. 학교 교칙에 그런 게 있거든요.” “대체 뭘 잘못했는데?” “강당에 모일 때마다 지각을 했거든요.” “뭐 하느라 계속 지각했니?” “늦잠 잤죠, 뭐. 멋있는 녀석들을 만나니까 잠자기가 싫었어요. 이야기하고 팔씨름도 하고 그러다 보니 금방 두세 시가 되더라구요.” “엄마는 너 매 맞은 거 보니까 속상해 죽겠어.”
“전 괜찮아요. 제가 잘못해서 맞은 거니까요. 엄마, 회초리 맞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세요?” “무슨 생각이 들어?” “다섯 살 땐가, 외갓집에서 할아버지가 키우는 오리를 제가 하도 못살게 굴어서 그 오리가 죽었잖아요. 그때 외할아버지께서 회초리를 드셨는데, 아파서 울긴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어요. 제가 잘못한 게 분명하니까요. 그런데 이번에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회초리를 맞으니까 갑자기 그 생각이 나는 거예요. 아, 할아버지 보고 싶어 혼났어요.” 선생님한테 회초리를 맞으면서 외할아버지가 떠올랐다니……. 정우가 민사고에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민사고에는 학생자치와 명예위원회가 운영하는 학생법정이 있었다. 학생법정에서는 교칙을 위반한 학생이 자신의 입장을 진술할 수 있는 기회가 있고 변호인을 신청할 수도 있었다. 매주 토요일 오후에 열리는 학생법정에서 학생들이 징계를 결정하면 선생님이 회초리로 체벌을 하는데, 이것이 민사고에서 허용하는 유일한 체벌이었다. 체벌을 받는 학생들의 죄목은 대개 영어상용 위반이나 자율학습 위반, 지각, 청소 불량같이 사소한 것들이다. 그리고 거짓말이나 시험 부정행위, 음주 및 흡연 등은 정도에 따라 교내외 봉사, 근신, 정학, 퇴학 등의 징계가 내려진다. 지금은 이 회초리 체벌이 명심보감 베껴쓰기로 바뀌었다.
아직은 미숙한 청소년들에게 때로 회초리가 약이 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체벌까지의 과정을 매 맞는 아이를 비롯해 교사와 학부모 모두가 납득해야 한다. 이것이 제도화되어 있다면 아이들은 선생님을 믿을 수 있고, 선생님 역시 당당하게 사랑의 매를 들 수 있다.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회초리를 받아들인다면, 아이들 역시 매를 든 선생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민사고에서 회초리를 맞으며 외할아버지를 떠올린 정우는 학교생활에 적응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있다. 체벌로 인한 시비가 불거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일반 학교에서도 이제는 추억이 된 민사고의 체벌 시스템을 도입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스스로 통제하는 힘을 길러라
우리는 예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경기도에서 서울로 이사를 했고, 아이들을 집 근처의 학교에 보냈다. 하지만 나는 내심 불안하기까지 했다. 전에 살던 곳에서는 그래도 공부 잘하고 총명한 아이라고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인정받던 아이였지만, 서울에 와서 사정이 달라졌던 것이다. 난생 처음 예진이를 데리고 수학학원에 가서 레벨 테스트를 받아보니 평균점수를 받았던 것이다. 그렇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한 학기를 보내고 나서 다음 학기가 시작되었다. 예진이는 반장에 선출되었고 성적은 정상궤도에 올라 민사고에 입학하게 되었다. 예진이는 민사고를 조기 졸업하여 현재 서울대 법대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있다.
예진이는 어렸을 때부터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모든 책과 신문, 잡지를 재미있게 읽고, 받아들였다. 초등학교 때 우연한 기회에 어린이 백과사전을 사 주었는데, 아이는 이 책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중학교 때는 매일 한 시간 넘게 신문을 읽었다. 시험기간 중에도 학교에 다녀오면 식탁에 앉아 신문의 모든 페이지를 읽었고, 아빠가 정기 구독하는 월간지도 빠짐없이 읽었다. 그때는 아이가 시험기간에도 책만 읽는 것이 속상해 야단도 쳤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럴 일이 아니었던 듯하다. 한창 성장하는 그 나이에 읽은 책들이 예진이에게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아이는 언어영역에서 우수한 실력을 발휘해 국어 공부는 따로 하지 않아도 항상 최고성적을 유지했으며 논술 역시 월등한 수준이었다.
엄마인 내가 보기에 예진이는 결코 천재나 수재가 아니다. 그런데도 줄곧 높은 성적을 유지한 비결은 어릴 때부터 꾸준히 해온 자기관리 덕택인 것 같다. 나는 아이들에게 기본적인 학습능력을 길러주기 위해 어릴 때부터 매일 꾸준하게 일정 분량의 학습지나 문제집을 풀도록 했다. 예진이 아래로 동생이 둘 있는데 그 아이들도 내 방식으로 공부시키고 있다. 내 방식은 아주 간단하다. 어릴 때부터 아이와 함께 하루에 해야 할 공부, 하루에 해야 할 일이라는 목표를 정한다. 그리고 엄마가 그 목표를 이루도록 도와준다. 이때 정한 원칙과 목표는 아이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했다. 나는 한 번 정한 원칙은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지켜야 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기숙사에 가면 예진이 책상 위에는 항상 ‘오늘 할 일’ 리스트가 적혀 있었다. 아이는 아침마다 매일 오늘 해야 할 일을 적어 두고 그것을 끝내야 그날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예진이가 거둔 성적보다도 스스로를 통제하는 그 성실하고 강인한 정신력이 더 믿음직스럽다. 이러한 능력은 예진이의 인생에 커다란 힘이 되어줄 것이다.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
채린이는 영국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영국은 우리 부부가 유학을 간 곳이다. 14년의 삶 중에서 채린이가 한국에서 생활한 것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채린이는 한국을 몰랐다. 우리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몰랐다. 아이에게 한국 생활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영국에서는 무엇이든 즐겁게 하는 아이였고 그래서 하루 종일 밝은 얼굴로 떠들고 다녀 별명이 수다쟁이였다. 아이는 초등학교 시절 영국 아이들로부터 가장 좋은 친구로 뽑히기도 하고, 어린이 회장에 당선되기도 했다. 채린이가 중학교 다니고 있을 때 남편의 공부가 끝나 우리는 귀국을 해야 했지만 아이를 반드시 한국에 데리고 와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이를 그곳에서 학교에 다니도록 하고, 나머지 가족만 귀국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말이 서툰데도 채린이는 자기 스스로 한국을 선택했다. 아이는 자기가 무엇보다 한국의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으로 가는 것이 마땅하며, 더욱이 가족과 떨어져 있기 싫어했다. 그래서 채린이는 한국을 선택했으나, 한국은 우리가 유학을 떠나기 전에 살았던 그 옛날의 한국이 아니었다. 좋은 친구는 영국 친구들보다 훨씬 좋았다. 문제는 채린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친구들이었다. 영국에서는 좋아하지 않는 친구라도 겉으로나마 친한 척하고 웬만큼은 잘 해주었다. 영국은 적어도 학교에서는 친구들을 이기려는 경쟁보다는 친구들이 잘한 것을 흔쾌히 칭찬해주는 사회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채린이가 한국에 와서 마음고생을 한 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공부도 공부지만 무엇보다 사춘기 소녀들의 시기심과 경쟁심, 그리고 해코지가 도를 넘는 경우가 많았다. 채린이는 많은 눈물을 흘리며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보냈다. 채린이가 한국어에 서툰 점을 마구 놀리거나 심지어 이용하는 아이도 있었다. 나와 채린이 아빠는 항상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같이 울고 같이 웃었다. 학교생활이 너무 힘들지만 가족이 언제나 너와 함께 한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싶었다. 학교생활이 힘든 만큼, 우리는 학습에 더 많은 신경을 썼다. 채린이는 학교생활의 어려움을 공부로 극복하고자 했다. 채린이는 처음 치른 중간고사에서 아주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이것은 채린이 자신보다는 우리 가족이 더 놀랐고, 우리 가족보다 영국에서 귀국한 다른 부모들이 더 한층 놀란 사건이었다.
채린이가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은 모든 교과목을 영어로 번역해주고 공부시킨 채린이 아빠 덕분이었다. 채린이는 한국어가 서툴러 교과서에 나오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아빠가 모든 교과서를 영어로 요약한 뒤 아이에게 가르쳐주면, 나는 그 부분을 아이와 이야기하면서 말로 익히도록 도와주었다. 어떻게 보면 공부를 도와준 게 아니라 우리가 같이 공부했는지도 모른다. 시험 때가 되면 우리 가족 모두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우리는 시험을 최대한 열심히 준비하되 그 결과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 덕분인지 채린이는 많이 울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한국 학교에 잘 적응했다. 아이는 자신을 힘들게 하는 친구들에 대해 작은 비난도 하지 않았고, 자신을 과대포장하지도 않았다.
채린이는 지금 대학에서 국제학을 공부하면서 영국에서처럼 밝은 얼굴로 살아간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내용과 교수님들이 모두 아이에게 잘 맞아 어린 시절처럼 행복해 한다. 아이는 민사고에서 몸으로 체득한 리더십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다. 아이는 공부하는 틈틈이 학내외의 여러 가지 활동에 참여하고, 한편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힙합 댄스도 즐기면서 삶을 적극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영국에서 나는 꽤 오랜 세월 동안 남편의 뒷바라지를 해왔다. 남편의 박사학위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아이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채린이가 무사히 중학교를 졸업하고 민사고에 입학하자 이번에는 둘째 아이 순서였다. 산 너머 산이라는 것이 딱 맞는 말이었다. 산 너머 산이지만 그 산 넘기를 포기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아마도 아이들이 언제나 노력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으리라 생각한다. 가끔은 나 혼자 산을 넘는 것처럼 힘들고 지칠 때도 있었지만,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주며 다 같이 산을 넘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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