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양육/유태인자녀교육

창의력을 기르기 위한 유대인의 자녀 교육

가디우스 2007. 9. 6. 19:08
 

창의력을 기르기 위한 유대인의 자녀 교육

 

흔히들 '유대인은 머리가 좋다' 라고 말한다. 그것은 유대인이 인구수에 비하여 세계적인 인물을 많이 배출했기 때문이다. 과학자 아인슈타인, 심리학자 프로이트, 영화감독 스필버그 미국의 전 국방장관 키신저에 이르기까지 각계 각층의 세계적인 인물 중에 유대인이 유난히 많다. 그러면 그것은 유대인이 단순히 머리가 좋아서일까?

시각 장애를 극복한 입지적 인물인 교육학자. 강 영우 박사는 그의 저서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 에서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이 타민족과 지능을 비교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지능에서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이처럼 유대인들이 탁월한 능력을 나타내는 이유는 학업 성취도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강 박사는 계속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타고난 기본 능력이나 재능만큼 성취하는 사람은 성취자이고, 측정된 지적 능력 이상으로 성취하는 사람은 과성취자이며, 주어진 재능을 낭비하여 그에 미치지 못한 사람은 미성취자이다. 그런데 유대인은 성취자와 과성취자의 비율이 타민족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월등히 높다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유대인 중에는 창의력이 뛰어난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유대인들 중에 창의력이 뛰어난 사람이 많은 까닭이 무엇일까? 나는 그 해답을 유대인의 가정교육에서 찾았다. 여기에서 나는 최근 알려진 창의력을 기르기 위한 유대인의 가정 교육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어린이의 불량성(不良性)의 싹을 자르지 말아야 한다.
어린이가 불량성이 있다는 것은 어린이가 불량하다는 것과는 그 뉘앙스가 다르다. 그것을 판단하는 것이 부모의 몫이며 동시에 어린이를 이해하는 길이다.
어린이의 불량성 중에는 부모 자신을 표본으로 생각하는 획일성이 아니면 세속적인 도덕성이나 통속적인 것에 대한 반항이 들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부모가 미쳐 보지 못하는 강한 개성의 숨어 있는 것이다. 불량성의 싹이 자라서 불량하게 되는 것은 곤란하지만 그 불량성의 싹에는 커다란 가능성도 간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릴 때의 난폭성이 뛰어난 스포츠맨이나 무장(武將)으로 승화될 수도 있고, 어린이의 기존 도덕성에 대한 반역이 종래의 문명과 문화 요소를 뒤집어 장차 커다란 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바탕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의 문명은 어느 시대에서나 강한 개성에 의해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부모는 어린이의 거짓말을 지나치게 따져서 꾸짖지 말아야 한다.
어린이의 거짓말을 모두 나쁘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자기의 약점이나 실수를 숨기는 거짓말은 그 자리에서 지적하여 힐책하는 것도 좋지만, 어떻든 모든 거짓말에는 독창성이 있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거짓말은 남보다 뛰어나게 독자적인 자기를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야나기다(柳田國男)는 < 거짓말과 어린이 > 라는 수필에서 '어린이가 무심코 거짓말을 했을 때 자연스러운 감정 그대로 웃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린이는 남을 즐겁게 할수 있다는 쾌감을 느끼고 밝고 씩씩하게 자랄 수도 있다. 이것이 발전하면 창의력이 풍부한 문필가가 될지도 모른다.' 라고 썼다.


어려서 천재였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좋다.
어린이들은 나름대로의 허영심을 가지며, 어른이 놀랄 만큼의 경쟁심도 가지고 있다. 어린이가 가깝게 느끼는 사람은 자기와 비슷한 또래의 어린이거나 약간 연상의 선배다. 어른은 아무래도 약간은 이질적인 존재로 느낀다. 그러므로 어린이에게 경쟁심이나 허영심을 자극하여 스스로 분발하도록 하는 것은 자기와 비슷한 나이에 이미 천재가 된 사람의 이야기다. 어린이들은 대개 자신이 남과 다른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막연한 스스로의 개성적인 본능을 증명하지 못한 채 성장한다. 그것은 99%가 천재가 아님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천재가 아니더라도 어렸을 때부터의 노력으로 보통 사람 이상의 성과를 올릴 수 있다. 그러므로 소년 시절에 역사에 남을 만한 일을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여 줄 필요가 있다.
예컨대 천재적 업적을 남긴 수학자 가우스는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1에서 10까지 더해보라고 하니까, 그는 다른 아이들이 하나 하나 더해 가는 것과는 반대로 10에서 1까지를 옆으로 써 놓고, 그 아래에는 10에서 1까지의 숫자를 써서 상하의 어느 것을 합해도 11이 되도록 했다. 이런 것이 10개이므로 110이 나왔고, 같은 것이 2개씩 있으므로 2로 나누어 55라고 즉석에서 대답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아이들은 자기가 이런 천재적 선인들과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일에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어린이가 자라서 20살쯤 되었을 때 그러한 공통점이 하나의 환영(幻影)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도 그 때는 이미 성인으로 자랐기 때문에 약간의 환멸은 느낄 수 있지만 큰 상처는 입지 않는다. 어떻든 유년 시절의 천재였던 사람들의 독특한 이야기는 어린이에게 로맨틱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일이 될 것이다.


때로는 자녀에게 친구가 없는 것을 칭찬해 주는 것도 좋다.
어떠한 어린이든 그 나름대로의 친구를 찾게 된다. 동시에 어떤 경우에는 나름대로의 자존심이나 반항심 때문에 주위의 친구를 거부하거나 심지어는 고독을 즐기려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부모가 '왜 다른 아이들과 놀지 않느냐' 라고 재촉하거나 강요하면 어린이는 도리어 상처를 입게 된다. 친구를 많이 갖는 것이 반드시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어른이 억지로 시켜서 하는 협조가 어린이 나름대로의 개성을 잃게 하고 획일화된 착한 아이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
부모가 어린이의 교제 상대를 골라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부모가 아무리 자기 자식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교제의 상대로 적당한지 어떻게 정해줄 수 있겠는가? 어린이는 나름대로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가지고 친구나 장난감을 고른다. 노는 상대로서의 좋은 아이와 나쁜 아이를 부모가 세속적인 잣대로 어린이에게 골라 준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어린이는 자기 인생 속에서 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것이며, 결국 어린이의 인생은 부모나 다름없이 어린이 자신밖에 없다.


물건을 부수는 것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새로운 창조에는 반드시 분석이 앞선다. 분석은 어떤 의미에서 일종의 파괴다. 새로운 자동차를 만들려고 할 때 자동차 회사는 경쟁회사의 자동차를 사서 분해하여 이를 분석한다. 어린이가 새로운 장난감을 부수는 것은 창조 본능의 발로이다. 물론 아이들에게는 충동적 파괴 본능도 있다. 그러나 그 파괴 본능의 내면에는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창조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않된다.
어린이가 물건을 부수고 더럽히는 것을 지나치게 억제하는 것은 인간의 순수한 원형(原型)인 어린이를 어린이답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어린이가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을 때 잠자라고 강요하지 않는 것이 좋다.
칸트는 물건을 사러 가게에 가서도 생각에 열중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아무 물건이나 그대로 들고 가서 자기 집에 와서야 그것을 깨닫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 동네 사람들은 칸트가 중요한 사색(思索)을 하고 있다고 알아차리고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칸트에 대한 주변의 배려와 같이 가정에서도 부모는 그러한 배려를 해 주어야 한다. 어린이가 어떤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 취침 시간이 되었다고 해서 무리하게 잠자리에 들게 해서는 좋지 않다. 어린이 스스로가 자신의 호기심이나 집착을 조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좋다.


어린이 방이 어질러져 있어도 정돈하지 말아야 한다.
어른은 언제나 자녀들에게 정돈을 원하지만 아이들은 곧잘 자기 방을 어질러 놓는다. 어떤 면에서는 잘 정돈된 어린이 방은 매력이 없다. 가끔 형편없이 어지럽혀진 방을 보면 어린이의 끝없는 파괴와 창조적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어린이는 자기 방이 어질러 있을 때 친구가 오면 자기 나름대로 방을 정돈하는데 이는 친구와 놀기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성인이 되어 필요하게 되면 부모가 시키지 않아도 방을 잘 정돈한다. 예를 들어 애인이 생긴 자녀는 그 상대가 올 때 시키지 않아도 자기 방을 잘 정돈해 놓는다. 어린이는 자기가 바라는 대로 자기 방을 관리함으로써 자기의 세계관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린이가 자기 방을 어떻게 치우던 자기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부모에게 찾아달라고 하거나 없어진 장난감을 부모의 탓으로 돌리게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자기 방을 어떻게 가꾸던 그 습성을 남의 방에까지 가져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부모에게 효도할 것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요즘 하나의 나쁜 풍조로 효도를 인간 관계의 낡은 사상쯤으로 여기는 젊은이들이 있는데 이는 한심스러운 일이다. 시대가 아무리 변했다고 해도 어릴 때 부모가 지식을 보호하고 자라서는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자녀가 성장해서는 몰라도 초등학교를 들어갈까 말까 하는 때부터 효도를 강조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이다. 어릴 때는 부모에게 귀찮게 구는 것이 자식이 부모에 대한 최대의 효도라고 생각한다. 아무 걱정도 끼치지 않는 자식을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여러 가지 트러블을 일으키는 어린이한테서 오히려 개성이 있음을 발견한다. 효도란 누구나 어른이 되어서 자연적으로 하고파 하는 덕(德저)이 되어야지 그것을 너무 일찍부터 기대하면 오히려 어린이의 특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


어린이에게 색칠한 그림을 주지 말자.
그림에 한정된 것은 아니지만 어떤 레슨을 받을 때 어떤 규범을 요구하는 것은 좋지 않다. 사실주의나 리얼리즘 위에 그 위치를 굳혔던 근대 예술이 근대에 와서 그 힘을 잃은 것은 하나의 규범이 창조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소년시절에 전갈, 지네, 귀뚜라미 등 징그러운 벌레들을 많아 그렸고 다음에는 그 몸뚱이를 하나 하나 따서 크기가 다르게 여러 가지로 부쳐서 놀랄만한 괴물을 그려내어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일종의 몽타주인데 그 기초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몽타주 하는데 규범을 벗어난 데 이 어린이의 창조력이 있는 것이다.


자식의 솜씨를 서투르더라도 격려해 주어야 한다.
어린이는 어른 이상으로 냉정하게 자기와 남을 비교한다. 특히 집단 생활 속에서는 유치원이건 초등학교건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남과 자기의 비교를 공평하고 냉정하게 한다. 그 결과 학업 성적의 차이뿐만 아니라 어떤 일에 대한 솜씨를 민감하게 깨닫는다.
어린이가 자신의 무재주를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약점으로 생각한다면 부모는 그 무재주를 계속 격려해 주어야 한다. 예를 들면 손재주가 없는 것을 그대로 두라는 것이 아니리 부모와 함께 그 무재주를 극복해 나가도록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더 큰 것을 이룩할 수 있는 새로운 자신감과 자부심을 길러줄 수 있다.

 

이상으로 유대인이 주로 하고 있다는 자녀의 창의력을 기르기 위한 가정 교육 지침을 나열해 보았다. 이 중에는 납득이 가는 것도 있지만 우리 상식으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고 느끼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의 육아법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면 그 핵심은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하나는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일어서도록 자율성을 기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성을 존중해서 자신의 특성을 살리라는 것이다.

이런 방법이 우리 나라 자녀 교육에도 꼭 맞는 방법이라고는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녀의 창의력을 길러주기 위한 가정 교육의 좋은 참고 자료는 되리라고 믿는다. 사람의 모습이 제각기 다르듯이 교육도 아이에 따라 맞는 방법이 다를 수 있다. 좋은 부모가 되려면 여러 가지 경우를 고려하여 자기 자녀에게 가장 잘 맞는 독창적인 가정교육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부모의 창의력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