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목회개념
평신도목회 운동은 목회자가 자신이 받은 목회적 사명을 이루기 위해 평신도들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고 평신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적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목회자들이 그들을 돕고 훈련하여 그들이 스스로 전임 목회자들과 함께 주님의 교회를 세워갈 수 있는 평신도목회자들을 양성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평신도들의 엄청난 자원과 자질들이 단지 교회에서 "봉사"한다는 일차원적 수준에 묶여 있음으로 사장되고 있다는 현실을 오래 전부터 보았다. 때로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목회자들의 고유영역인 목회적 사역에 참여하는 것을 위협으로 생각하기도 해왔다. 가능한한 성도들은 목회자가 시키는 심부름 정도를 "봉사"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는 것이 목회자에게는 편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성도들이 훈련을 받아 너무 많이 알거나 능력이 확대되면 될수록 목회자에게는 불편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가끔 아는 척하는 평신도들 때문에 목회자들이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는데 교인들이 목회자처럼 훈련받으면 목회하기에 더 힘이 든다고 생각한 때도 있었다. 일반 성도들은 그저 공식예배나 잘 참석하고 십일조 헌금이나 정확하게 드리고 가끔 제직회나 참석해 주고 주보나 나눠주고 헌금위원이나 하고 부엌에서 국수나 잘 끓이는 정도 외에 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당회의 장로들마저도 회의하고 안건이 있으면 토론해서 정책적 결정이나 하면 장로의 책임을 다 하고 있다고도 생각하는 경우들도 있었다.
그러나 평신도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은 달랐다. 교회에는 목회적 돌봄이 필요한 대상들이 너무도 많다. 많은 정도가 아니고 전부이다. 모두가 누군가의 돌봄을 기다리고 있다. 시편 저자도 "나에게 관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 (시 142:4)고 탄식한 적이 있지만 이런 성도들은 교회의 돌봄을 받지 못하고 소외되어 있거나 이 교회 저 교회로 전전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가? 주일 오전예배 정도 참석하고 영적인 생활의 명맥을 겨우 유지해가는 성도들도 소수가 아니다. 교회 안에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따뜻한 돌봄을 기다리다 지쳐 떠난 사람들의 수가 한 두 명인가? 예수님은 자기를 사랑하면 "내 양을 먹이라"(요한 21:16) 명령하셨고 사도 베드로도 "하나님의 양무리를 돌보라"(Tend the flock of God)(벧전 5:2)고 하셨다. 그러나 교회는 양무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다. 왜? 양무리를 돌보는 목회적 사역은 목회자들의 전유물로 생각해 소수의 목회자들이 다수의 양무리를 혼자서 감당하려다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손이 미쳐 닫지 못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평신도가 훈련받아 목회자화되어 그들이 목회적 사역을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엡 4:11-16). "...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구비하여 봉사의 일(the work of ministry)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함이니라" (11-12절). 단순한 봉사가 아니다. "목회의 사역"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일은 목사 선생과 훈련받은 평신도 목회자들이 사역한다는 것이다. 목사는 선생이고 훈련자요 성도는 훈련받아 성숙해지고 있는 평신도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요 사도 바울의 목회철학이다. 목사는 성도를 교실에서, 목회현장에서, 또 자신의 삶을 통해 개인적 신앙과 목회적 사역을 가르친다. 사도 바울 이후 이 목회관을 기독교는 거의 2천년 동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영적인 사역은 전임목회자들만의 고유한 몫이고 교인들은 목회자들의 연기를 일주일에 한번씩 성실하게 구경하고 칭찬이나 박수를 보내주는 정도면 된다는 식이었다.
평신도들의 보다 적극적인 사역은 20세기 중반 1960년대에 와서야 사도 바울의 목회관을 재발견하면서 평신도목회자화운동이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목회관은 미국을 중심으로 많은 발전을 보았고 체계화되었으며 오늘에 와서는 신학자들과 목회연구자들의 많은 저서들을 통해서 21세기의 목회철학이라 확언을 하고 있다.
평신도목회 운동은 목회자가 자신이 받은 목회적 사명을 이루기 위해 평신도들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고 평신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적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목회자들이 그들을 돕고 훈련하여 그들이 스스로 전임 목회자들과 함께 주님의 교회를 세워갈 수 있는 평신도목회자들을 양성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평신도들의 엄청난 자원과 자질들이 단지 교회에서 "봉사"한다는 일차원적 수준에 묶여 있음으로 사장되고 있다는 현실을 오래 전부터 보았다. 때로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목회자들의 고유영역인 목회적 사역에 참여하는 것을 위협으로 생각하기도 해왔다. 가능한한 성도들은 목회자가 시키는 심부름 정도를 "봉사"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는 것이 목회자에게는 편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성도들이 훈련을 받아 너무 많이 알거나 능력이 확대되면 될수록 목회자에게는 불편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가끔 아는 척하는 평신도들 때문에 목회자들이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는데 교인들이 목회자처럼 훈련받으면 목회하기에 더 힘이 든다고 생각한 때도 있었다. 일반 성도들은 그저 공식예배나 잘 참석하고 십일조 헌금이나 정확하게 드리고 가끔 제직회나 참석해 주고 주보나 나눠주고 헌금위원이나 하고 부엌에서 국수나 잘 끓이는 정도 외에 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당회의 장로들마저도 회의하고 안건이 있으면 토론해서 정책적 결정이나 하면 장로의 책임을 다 하고 있다고도 생각하는 경우들도 있었다.
그러나 평신도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은 달랐다. 교회에는 목회적 돌봄이 필요한 대상들이 너무도 많다. 많은 정도가 아니고 전부이다. 모두가 누군가의 돌봄을 기다리고 있다. 시편 저자도 "나에게 관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 (시 142:4)고 탄식한 적이 있지만 이런 성도들은 교회의 돌봄을 받지 못하고 소외되어 있거나 이 교회 저 교회로 전전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가? 주일 오전예배 정도 참석하고 영적인 생활의 명맥을 겨우 유지해가는 성도들도 소수가 아니다. 교회 안에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따뜻한 돌봄을 기다리다 지쳐 떠난 사람들의 수가 한 두 명인가? 예수님은 자기를 사랑하면 "내 양을 먹이라"(요한 21:16) 명령하셨고 사도 베드로도 "하나님의 양무리를 돌보라"(Tend the flock of God)(벧전 5:2)고 하셨다. 그러나 교회는 양무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다. 왜? 양무리를 돌보는 목회적 사역은 목회자들의 전유물로 생각해 소수의 목회자들이 다수의 양무리를 혼자서 감당하려다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손이 미쳐 닫지 못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평신도가 훈련받아 목회자화되어 그들이 목회적 사역을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엡 4:11-16). "...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구비하여 봉사의 일(the work of ministry)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함이니라" (11-12절). 단순한 봉사가 아니다. "목회의 사역"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일은 목사 선생과 훈련받은 평신도 목회자들이 사역한다는 것이다. 목사는 선생이고 훈련자요 성도는 훈련받아 성숙해지고 있는 평신도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요 사도 바울의 목회철학이다. 목사는 성도를 교실에서, 목회현장에서, 또 자신의 삶을 통해 개인적 신앙과 목회적 사역을 가르친다. 사도 바울 이후 이 목회관을 기독교는 거의 2천년 동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영적인 사역은 전임목회자들만의 고유한 몫이고 교인들은 목회자들의 연기를 일주일에 한번씩 성실하게 구경하고 칭찬이나 박수를 보내주는 정도면 된다는 식이었다.
평신도들의 보다 적극적인 사역은 20세기 중반 1960년대에 와서야 사도 바울의 목회관을 재발견하면서 평신도목회자화운동이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목회관은 미국을 중심으로 많은 발전을 보았고 체계화되었으며 오늘에 와서는 신학자들과 목회연구자들의 많은 저서들을 통해서 21세기의 목회철학이라 확언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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