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비시키는 사역
설교자는 강단에..............,평신도는 좌석에..............., 이 둘은 1900년대까
지 주류를 이루던 그리스도인의 정서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이 가난하
게 태어난 자는 누구나 영원히 가난하게 살도록 계획하지 않은 것을 제대로 깨닫게 되
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는 누구나 영원히 수동적으로 살도
록 계획하지 않으셨음을 교회도 깨닫기 시작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사역에
로 부름받았다. 누구나 일종의 섬기는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나님이 구비시키셨다. 우
리는 이미 이천 년 전에 바울이 쓴 내용을 이제서야 깨닫기 시작한 셈이다. "혹은 목
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
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각각의 지체가 하나님의 은사
를 사용해서 사역을 감당한다는 바울의 비전은, 그의 시대 직후에 곧 실종되었다가 1
세기 반전에 그리스도 형제단(Christian Brethren)에 의해 재발견되었으며, 최근에 와
서야 평신도목회 운동(1950년대 부터)을 통해 기독교 공동체에 다시 떠오르게 되었
다.
모든 신자(평신도와 성직자)는 제도화된 기독교의 올무에서 서로를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은혜로운 협동 작전이 필요하다. 평신도(laity)에 해당하는 헬라어 '라오스
(laos)는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이류 계급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나 아
마추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찬사를 나타낸다(Jim
Garlow).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사도들이나 예수님의 머리속에서는 결코 존재하
지 않았다. 일반 성도들과 목회자는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다. '평신도'는 목회자의
보조자나 교회의 구경꾼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능한 사역자로 부름받았다. 마틴 부버
(Martin Buber)의 표현을 빌리면, 이 둘은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는 나-너 관계에서
모두 상대편의 '너'이다. 평신도와 성직자는 한 옷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잘 연결되
어 있어야 한다. 교회에서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으로만 만족하는 평신도에게 신약 성
경의 권위를 힘입어 우리는 이렇게 얘기 할 수 있다: "당신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잊어버렸군요. 당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이며, 거룩한 제사장이고, 그리스
도의 사신이며, 세상에 있는 화해의 대리인이고, 빛이며 소금이고 누룩입니다. 당신
은 목회자를 도와줄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당신이 사역할 수 있도록 당신을
돕는 것이 바로 목회자의 임무입니다(엡4:11-12/paradigm shift)"
다행스럽게도 이제는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구비시켜야(to equip
the saints) 한다는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있다. [구비시킨다(equip)]는 것은 성도들
이 사역의 일을 하도록 목회자가 그들을 훈련시키는 것이다(Paul Stevens). 그러나 이
것은 쉽게 충족될 수 있는 필요가 아니다. 다른 한편 평신도들은 그리스도인다운 정
중한 태도로 목회자의 목을 조이면서 자리를 지켜 달라고 요구하기 쉽다. 목회자가 자
리를 비우고 세미나에 참석하거나 전문 사역자를 위한 수련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죄
의식을 느끼게 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만일 그리스도인의 삶
에 대해 진지하다면, 그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권력, 명성, 지위 같은 것을 갈구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를 '유일한' 사역자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해도, 그는 매일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고, 항상 쉽게 만날 수 있어야 하며, 전지전능하고 유일한 목회
자가 되어 달라고 말하는 수백 가지의 기대와 요구, 불평으로 인해 이미 그런 위치로
떠밀려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런 구비신킨다(equipping)는 개념은 하나의 짐을 더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1인 교
회 악단의 리더가 되어 달라는 성도 대부분의 요구도 이루기 불가능한데, 여기에 더하
여 구비 사역자(equipping pastor)가 되라는 더 큰 과제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요구하기 때문에, 그리고 또 바울이 그런 개념
을 강조하기 때문에 이제 목회자는 모든 성도들의 은사를 촉진해 주어야 한다. 성실
한 목회자들에게 사역은 그저 일만은 아니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일반적으로 교인들
이 일에 투자하는 시간에다가 그들이 교회에서 봉사하는 시간을 합한 것만큼을 정서적
으로, 또 개인적으로 사역에 투자한다.
이런 개념정립과 사역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지는 않는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
들이 우리를 지금의 위치로 몰고 왔다. 따라서 목회자에게 "목사님, 조금 비켜서셔서
제 자리를 좀 만들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혹은 목회자가 평신도에게 "이
봐요, 좀더 올라오시구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구비 사역의 장애물을 제거하지 못
한다. [목회에서 동역자-한국 LPM 연구소 번역중]라는 책을 쓴 짐 갈로우박사는 평신
도목회사역을 하려면 목회자는 MOVE OVER, 평신도는 MOVE UP, 그리고 그들이 속해있
는 교회는 그들과 함께 MOVE OUT되어야 한다는 표현을 즐겨 쓰기도 했다
설교자는 강단에..............,평신도는 좌석에..............., 이 둘은 1900년대까
지 주류를 이루던 그리스도인의 정서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이 가난하
게 태어난 자는 누구나 영원히 가난하게 살도록 계획하지 않은 것을 제대로 깨닫게 되
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는 누구나 영원히 수동적으로 살도
록 계획하지 않으셨음을 교회도 깨닫기 시작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사역에
로 부름받았다. 누구나 일종의 섬기는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나님이 구비시키셨다. 우
리는 이미 이천 년 전에 바울이 쓴 내용을 이제서야 깨닫기 시작한 셈이다. "혹은 목
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
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각각의 지체가 하나님의 은사
를 사용해서 사역을 감당한다는 바울의 비전은, 그의 시대 직후에 곧 실종되었다가 1
세기 반전에 그리스도 형제단(Christian Brethren)에 의해 재발견되었으며, 최근에 와
서야 평신도목회 운동(1950년대 부터)을 통해 기독교 공동체에 다시 떠오르게 되었
다.
모든 신자(평신도와 성직자)는 제도화된 기독교의 올무에서 서로를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은혜로운 협동 작전이 필요하다. 평신도(laity)에 해당하는 헬라어 '라오스
(laos)는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이류 계급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나 아
마추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찬사를 나타낸다(Jim
Garlow).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사도들이나 예수님의 머리속에서는 결코 존재하
지 않았다. 일반 성도들과 목회자는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다. '평신도'는 목회자의
보조자나 교회의 구경꾼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능한 사역자로 부름받았다. 마틴 부버
(Martin Buber)의 표현을 빌리면, 이 둘은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는 나-너 관계에서
모두 상대편의 '너'이다. 평신도와 성직자는 한 옷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잘 연결되
어 있어야 한다. 교회에서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으로만 만족하는 평신도에게 신약 성
경의 권위를 힘입어 우리는 이렇게 얘기 할 수 있다: "당신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잊어버렸군요. 당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이며, 거룩한 제사장이고, 그리스
도의 사신이며, 세상에 있는 화해의 대리인이고, 빛이며 소금이고 누룩입니다. 당신
은 목회자를 도와줄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당신이 사역할 수 있도록 당신을
돕는 것이 바로 목회자의 임무입니다(엡4:11-12/paradigm shift)"
다행스럽게도 이제는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구비시켜야(to equip
the saints) 한다는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있다. [구비시킨다(equip)]는 것은 성도들
이 사역의 일을 하도록 목회자가 그들을 훈련시키는 것이다(Paul Stevens). 그러나 이
것은 쉽게 충족될 수 있는 필요가 아니다. 다른 한편 평신도들은 그리스도인다운 정
중한 태도로 목회자의 목을 조이면서 자리를 지켜 달라고 요구하기 쉽다. 목회자가 자
리를 비우고 세미나에 참석하거나 전문 사역자를 위한 수련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죄
의식을 느끼게 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만일 그리스도인의 삶
에 대해 진지하다면, 그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권력, 명성, 지위 같은 것을 갈구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를 '유일한' 사역자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해도, 그는 매일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고, 항상 쉽게 만날 수 있어야 하며, 전지전능하고 유일한 목회
자가 되어 달라고 말하는 수백 가지의 기대와 요구, 불평으로 인해 이미 그런 위치로
떠밀려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런 구비신킨다(equipping)는 개념은 하나의 짐을 더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1인 교
회 악단의 리더가 되어 달라는 성도 대부분의 요구도 이루기 불가능한데, 여기에 더하
여 구비 사역자(equipping pastor)가 되라는 더 큰 과제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요구하기 때문에, 그리고 또 바울이 그런 개념
을 강조하기 때문에 이제 목회자는 모든 성도들의 은사를 촉진해 주어야 한다. 성실
한 목회자들에게 사역은 그저 일만은 아니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일반적으로 교인들
이 일에 투자하는 시간에다가 그들이 교회에서 봉사하는 시간을 합한 것만큼을 정서적
으로, 또 개인적으로 사역에 투자한다.
이런 개념정립과 사역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지는 않는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
들이 우리를 지금의 위치로 몰고 왔다. 따라서 목회자에게 "목사님, 조금 비켜서셔서
제 자리를 좀 만들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혹은 목회자가 평신도에게 "이
봐요, 좀더 올라오시구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구비 사역의 장애물을 제거하지 못
한다. [목회에서 동역자-한국 LPM 연구소 번역중]라는 책을 쓴 짐 갈로우박사는 평신
도목회사역을 하려면 목회자는 MOVE OVER, 평신도는 MOVE UP, 그리고 그들이 속해있
는 교회는 그들과 함께 MOVE OUT되어야 한다는 표현을 즐겨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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