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명의말씀

[스크랩] 교회안의 작은 교회

가디우스 2007. 9. 5. 10:32

목 차

. 서론

1.연구의 필요성과 목적

2.문제제기

. 본론

1.경건주의를 통한 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교회안의 작은 교회운동

1)경건주의란?

2)경건주의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

3)경건주의의 태동

4)경건주의의 사상

5)경건주의의 확산

6)경건주의의 영향

2.경건주의를 맥 잇는 교회안의 작은 교회운동으로서 가정교회

1)가정교회의 성경적 배경

2)가정교회의 기능

3)가정교회의 역사적 실례로서 웨슬리의 ‘교회안의 작은 교회’

4)현대 교회안의 작은 교회로서의 가정

5)미래교회를 위한 가정교회의 목표

6)교회 공동체가 건강한 가정교회로 나가야 하는 이유

. 결론

. 서론

1.연구의 필요성과 목적

21세 오늘날은 브랜드화 시대, 그리고 소비사회다. 현대 소비문화의 형태는 물건의 성능이나 품질을 보고 구매하지 않는다. 적어도 오늘날에는 얼마나 튼튼하고 얼마나 오래 쓸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소비의 조건이 되지 못한다. 어떤 물건을 소비함으로써 나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소비의 중요한 조건이 되어버린 것이다. 즉 물건이 제공하는 이미지가 중요한 것이지 물건 그 자체의 쓰임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소비하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벤츠나 비엠더블유(BMW)를 타는 사람은 그 자동차의 성능보다는 그 자동차가 풍기는 이미지를 타고 다닌다. 그럼으로써 그는 어떤 계급, 즉 남과 구별된 계급에 속해 있음을 과시한다. 따라서 이미지를 구매하는 소비사회에서는 브랜드(상표)가 중요하다.

오늘날의 교회 역시 소비사회를 닮았다. 다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이미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점에서는 그렇다. 내가 얼마나 진리를 추구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나, 내가 깨달은 진리를 얼마나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혹은 우리교회가 어떤 프로그램에 참석하였는가를 중요시한다.

한국교회는 또 하나의 거대한 소비집단이다. ‘교회성장’이라는 상표만 붙어 있으면 그것의 국적이나 신학적 배경이나 성경적 배경을 불문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소위 ‘~하는 교회’라는 식으로 말한다.

바라기는 브랜드 중심의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그것이 마치 좋은 신앙의 징표인양 자랑하기보다는 구도자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자기와의 싸움을 진지하게 해 나가도록 훈련하는 교회, 훈련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한다. 유명 상표(제자훈련, 셀, G12, 등등....)는 달지 않았지만 유명상품보다 질적으로 뒤지지 않는, 본질에 충실한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 만들어보았으면 한다.

일명 ‘노 브랜드 크리스천’이다.

과장된 이미지를 나타내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진실한 그리스도의 품격이 우러나도록 힘쓰는 참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만들어 참된 신앙공동체,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를 꿈꾸어 보고 싶다.

2.문제제기

오늘날 한국교회는 소그룹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전통적인 교회 소그룹운동인 구역이나 속회를 비롯하여 제자훈련, 셀, G12, 알파, 가정교회 등등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소그룹운동, 일명 소공동체 운동이 많이 일어나는 것은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는 하나의 반증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 할 때 소공동체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것이 사실이기에 하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그룹운동이 기독교 역사에서 발견하는 소그룹운동과는 그 의도나 목적이 다분히 다르다는 것이 문제다. 지난 2000년 기독교 역사속에서 일어났던 소그룹운동 교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는 영적인 경건 운동이었으나 오늘날의 소그룹운동은 교회성정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그룹운동이 교회안에서 또다른 엘리트주의를 양산하여 교회내에 계급화 내지는 서열화를 불러오는 것도 간과 할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알의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그룹운동에 문제가 있음을 제기한다.

. 본론

1.경건주의를 통한 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교회안의 작은 교회운동

1)경건주의란?

(1)경건(Piety)의 어원

-신약의 ευσεβεια (유세베이아) ‘공경’, ‘경건함’

-라틴어 pietas ‘애정’

-독일어 fromm(프롬) ‘경건하고 독실한’, ‘온화하고 순진하고 소박한’

-영어 Piety ‘불쌍히 여김’, ‘동정(compassion)

(2)경건주의의 정의

James Bemesderfer는 “경건주의란 17,18세기 루터교회와 개혁교회(Calvinist Church)내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살아 있는 신앙을 갖게 하는 것을 목표로하는 신앙운동으로서, 개혁적이고 열정적이고 성결한 생활을 그 특징으로 한다”고 정의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며 회개와 생활의 개혁에 힘쓰며 경건하게 살자는 것이 경건주의다. 경건주의를 좁은 의미로 사용할 때는 스페너와 프랑케를 축으로 하여 1675년부터 50년 동안 독일 루터교 내에서 지속되었던 신앙운동으로 한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리고 넓은 의미로 사용할때는 영국의 청교도주의, 개혁파 경건주의, 모라비아 운동, 영국의 감리교 운동, 앵글로-아메리카 대각성 운동들을 포함한 모든 복음주의 운동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2)경건주의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

(1)30년 전쟁(1618-1648)

30년 전쟁은 독일을 무대로 해서 유럽의 카톨릭 국가와 개신교 국가사이에 일어난 종교전쟁이었다. 결국 프랑스를 중심으로한 개신교가 승리를 얻어 Westphalia 조약으로 카톨릭, 루터교, 개혁교회(Calvin 교회)가 동등한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전쟁터였던 독일이 입은 피해는 막대했습니다. 인구의 60%인 1800만명이 희생되었으며 팔츠지역의 캘빈파 목사는 350명이었으나 30명밖에 남지 않았다. 또한 가옥의 66%, 가축의 82%가 상실되었다. 그런데 더 심각한 피해는 정신적, 도덕적 피해였다. 무섭고 참혹한 전쟁을 겪으면서 사람들의 인간성은 파괴되었고, 술취함, 간음, 남색, 도적질, 토색 등, 디모데후서3장에 기록된 말세기적 범죄가 만연하였다. 거기에 오랫동안 계속된 페스트와 기근 등의 재앙이 겹쳐 독일은 황폐화 되었다.

(2)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지 100년이 지난 뒤 루터교 2세들은 카톨릭의 예수회로부터 도전을 받기 시작했으며, 열광적인 칼빈주의자들로부터도 맹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들로부터 루터교의 ‘순수한 교리’를 지키고자 일어난 운동이 바로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였습니다. 이 운동은 엄청나게 많은 신학적 논쟁을 그 특징으로 합니다. 당시 목회자들은 신학교에서 논쟁과 논증법만을 집중적으로 교육받았기 때문에 자연히 신학적, 논쟁적 설교를 했습니다. 자연히 그 설교가 어렵고, 일반 백성들은 알지도 못하는 라틴어로 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영적 갈증을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당시 많은 목회자들이 도처에서 추문에 연루되었고, 마술을 믿고 있었으며, 폭음과 폭식을 했습니다. 그들은 한 교구에서 다른 교구로 승진 발령받기 위해 온갖 종류의 권모술수에 몰두하였습니다. 목회자가 이러니 일반 대중들의 상태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당시 예배참석은 법적인 의무였기 때문에 다 참석하기는 하지만 성만찬만 하면 자동적으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여 그들의 개인신앙과 도덕생활은 형편없었습니다. 예배 중간에 잡담하고 걸어 다니는 것은 보통이었고 목회자가 예배의식 도중에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일이 빈번하게 있었으므로 유명한 신학자 게르하르드(John Gerhard)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가 교회에서 잠을 자지 않았다는 점을 찬양할 정도였습니다. 경건주의자들은 이러한 시대 분위기에 큰 문제의식을 가지고 진정한 회개와 거룩한 생활을 부르짖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루터교회 내의 경건주의 운동의 선구자라 할수 있는 요한 아른트(John Arndt, 1555-1621)가 등장하였다. 그는 원래 의사가 되려고 의학공부를 하던 중 중병이 걸려 사경을 헤메다가 중생의 체험을 했다. 중생의 체험이후 그는 신학 공부를 하고 루터교 목사가 되어 경건하고 신비적인 설교로 교구민들의 영성을 깨우면서 당시의 부패한 사회에서 진정한 기독교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테마별로 밝힌 「진정한 기독교」(True Christianity)란 책을 써서 유명해졌다. 그는 진정한 기독교는 순수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한 생활로 이루어 진다고 보았으며, 참된 크리스챤은 세상에 대한 관심보다 영적인 것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3)경건주의의 태동

(1)경건주의의 아버지 스페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05)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창시자요, 경건주의 운동의 사도라고 불리우는 스페너는 1635년 라폴슈타인이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와 할머니로부터 신앙교육을 받았고 특히 루터교 목사인 요아힘 스톨(Joachim Stoll)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12살 때 한번 땐스 파티에 갔다가 죄의식을 느끼고 뛰쳐나온 후, 한번도 땐스를 하지 않을 정도로 수줍고 순진하고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는 16세때 스트라쓰버그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과 역사, 그리고 어학을 공부하면서 술잔치나 펜싱경기, 무도회 등에는 참석하지 않았고 이성과의 교제도 피했으며 소수의 친구들과만 사귀었습니다. 얼마동안 일주일에 한번씩은 저녁식사를 하지 않고 금식하였으며, 주일에는 신학연구를 하지 않고, 예배 후에는 경건서적을 읽고 토의하며 지냈다. 스트라쓰버그 대학 시절을 전후하여 스페너는 신학교수였던 단하우어(J. C. Dannhauer)를 통해 루터의 저서들을 읽게 되어 루터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아 평생 루터주의자로 활동했다. 스페너에게 보다 깊은 영적 감화를 끼친 사람은 루터주의 신비주의자인 요한 아른트(John Arndt)였다. 아른트는 그의 저서인 「진정한 기독교」에서 신학적 논쟁과 생명이 없는 이론보다 신앙과 경건의 실천이 중요함을 강조했고, 순수한 교리와 아울러 거룩한 생활의 열매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는데, 이는 스페너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스페너는 또한 영국 청교도들의 저술, 특히 베일리(Lewis Bayly)의 「경건의 연습」, 손탐(Emanuel Sontham)의 「하나님의 자녀들의 황금 보화」, 박스터(Richard Baxter)의 「자기 부인에 대한 가르침」등을 애독하여 읽고 헌신과 경건 생활의 필요성을 배우게 되었다. 그후 그는 제네바에서 칼빈주의자인 프랑스 개혁주의 설교자 라바디(Jean de Rabadie)는 중생한 참신자들로 구성된 새교회를 세워 초대교회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스페너는 라바디의 교회에 출석하면서 “참신자들로 구성된 작은 교회”의 개념을 배웠고. 1666년 부터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19년간 성공적인 목회를 하면서 경건주의 운동이 태동하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의 불신앙과 비종교성을 통감한 스페너는 사치와 불경건을 책망하며 설교와 교육을 통한 개혁을 단행했으며 강단에서 정해진 성경 본문을 봉독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원하는 본문을 선택하여 설교하였다. 그리고 금식일과 기도의 날도 정했으나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의 생활에는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670년 어느날 마태복음5:20-26본문으로 하여 철저한 회개와 산 믿음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놀라운 반응이 일어났다. 이때 회개하고 성령을 경험한 사람들이 주일과 수요일 마다 스페너의 집에 모여 베일리의 「경건의 연습」이라는 책과 신약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남자들과 여자들이 따로 앉아서 공부하였고, 남자들만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와같은 경건의 연습을 위한 모임은 경건주의 운동의 특징이 되었다.

1674년 스페너는 프랑크푸르트의 한 출판사로부터 새로 출판하는 아른트의 「진정한 기독교」란 책에 서문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 서문을 쓰면서 스페너는 자신이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경건주의 이념을 피력하였다. 이 서문이 바로 경건주의 운동의 헌장이 된 「경건한 소원」이다.

「경건한 소원」은 1675년에 출판 되었고, 출판된 그해를 경건주의 시대의 시작으로 정하게 되었다.「경건한 소원」은 매우 작은 책이지만 교회와 사회에 대한 솔직한 비판과 아울러 교회에 활력을 불어 넣을수 있는 개혁의 방법을 제시했다.

(2)교회안에 소그룹운동(ecclesiola in ecclesia)

스페너는 교회 안에서 신앙의 성장을 위하여 열심을 가진 사람들을 먼저 모아 모임을 함으로써 점점 전체 교회가 갱신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경건의 모임을 시작하여 경건주의의 대명사가 되었으나 여기에 대해서 찬성과 반대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비제도적인 작은 성경모임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전체(대중교회)를 갱신하는 것’을 목표로‘교회안의 소그룹 운동(ecclesiola in ecclesia)’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스페너의 교회 갱신을 위한 소그룹운동의 내용을 「경건한 소원」의 서문에 피력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신앙 성장에 필요한 것을 기꺼이하려는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들을(목회자들) 헌신합시다. 각 목회자들이 개혁교회에서 다른 사람보다도 이러한 사람들을 먼저 양육하여 이들의 구원의 분량이 점점 성장하여 나중에는 이들의 본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가 되도록 일합시다. 이렇게 해서, 지금은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은혜로서 가까이 끌수 있게 되며 결국에는 그들도 구원시킬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목회자가 자신의 신앙 성장에 관심이 있는 이런 사람들을 먼저 돕고 이들의 신앙 성장에 필요한 모든 일을 다한다는 것, 나의 모든 제안들은 거의 전적으로 이것을 목표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되어서 그래서 기초가 놓이면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위해 쏟는 노력이 더 많은 열매를 거둘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부분이 「경건한 소원」전체의 핵심이며 요약이라고 할수 있다. 경건주의의 교회 갱신의 방법이 드러나 있다. 정통주의가 법적인 치리를 통하여 전체 교회를 한꺼번에 개혁하려고 했다면, 경건주의는 경건한 사람들의 자발적인 신앙의 헌신을 통하여 누룩이 퍼지듯이 점진적으로 ‘교회안의 소그룹 운동’을 통하여 교회를 개혁하려고 했다.

4)경건주의의 사상

「경건한 소원」은 서문과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스페너는 본문 제 1부에서 교회의 비참한 영적 빈곤의 모습과 통치자들의 타락상, 그리고 성직자들의 부패와 불신앙을 여지없이 드러내어 지적하였습니다. 제 2부에서는 교회개혁의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제 3부에서는 개혁을 이룰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 여섯가지를 제시했습니다. ①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풍성해져야한다. ②만인 제사장직(스페너의 표현으로 “영적 제사장직 Das Geistliche Priestertum")을 부지런히 실천해야 한다. ③기독교의 본질이 지식에 있지 않고 실천(사랑)에 있음을 알아야한다. ④종파간의 논쟁과 변증에서도 사랑의 실천이 가장 중요하다. ⑤신학교육을 성서 주석과 성령을 통한 거룩한 삶 중심으로 개혁해야한다. ⑥신학과 목회 현장이 연결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특히 설교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영적 제사장직의 일거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서로 나누는 것이라고 하면서“설교 강단은 자신의 지식이나 학문을 뽐내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그러나 강력하게 설교하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더 풍성해지게 하려면 작은 모임, 즉 교회안에 소그룹운동(ecclesiola in ecclesia)을 통하여 말씀을 살아 움직이게 해야한다고 보았다.

5)경건주의의 확산

(1)경건주의 운동을 확산시킨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

스페너의 후계자로 독일 경건주의 운동을 이끌어간 프랑케는 1663년 뤼벡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누나 밑에서 신앙 훈련을 받았지만, 대학 졸업 후에는 심각한 신앙적 갈등을 느꼈 방황하다가 고린도후서 4: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요한복음 20:31(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으로 거듭남을 체험하였다.

그리고 그의 나이 25세때인 1688년에 스페너를 찾아가 수개월 동안 머물면서 많은 감동과 감화, 지도를 받고 라이프 찌히 대학으로 돌아와 성경공부반(Collegium Philobiblicum, 성경공부를 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지도하며 경건주의 운동을 발전 시켜 나갔다. 그러나 그는 이를 반대하는 세력에 부딪혀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스페너가 당시 갓 시작한 Halle대학에 희랍어와 동양어 교수로 초빙하였습니다

1692년 그는 Halle대학으로부터 희랍어와 동양어 교수로 초빙받아 할레대학에서 스페너와 함께 정렬적으로 경건주의 운동을 펼쳐나갔다. 경건주의 운동에 있어서 스페너와 프랑케와의 관계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에 있어서 루터와 멜랑톤의 관계와 견줄만큼 끈끈한 관계다. 스페너가 경건주의 운동에 대해서 방향을 제시했다면 프랑케는 그것을 이론화하고 조직적으로 만들어 이 운동을 전 독일에 확산시킨 사람이었다. 할레 대학에서의 그의 업적은 경건주의 교육 이외에도 가난과 부도덕한 생활에 빠져 있던 소외된 대중들에게 교육과 자선의 손길을 보내기 위하여 1698년에 고아원을 설립히여 “누더기 학교”라는 빈민 아동 학원을 세워 교육을 실시하였으며과부들을 위한 “과부의 집”을 세워 그들을 돌보며 그들로 하여금 도시와 국가와 통치자와 전 교회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도록 가르쳤다. 그리고 1701년에는 병원을 세워 병자들을 돌보았고, 또한 미혼 여성을 위한 “여자의 방”도 마련하였다. 1704년에는 교사 양성 학원을 설립했고, 또한 1710년엔 성서 협회를 설립하여 성경을 각국어로 대량 인쇄하여 싼 값으로 보급하기에 앞장서기도 했다.

프랑케의 또 하나의 중요한 공헌은 윌리암 케리보다 100여년 전에 이미 세계선교에 대한 비젼을 심었다는 것이다. 1705년 프랑케의 제자 두 사람(Bartholomew Ziegenbalg와 Heinrich Plutschau)이 덴마크의 프레드릭 4세의 요청을 받아 인도의 트링퀘바(Tranquebar)에 가서 선교를 하였다.

이 후 할레 대학은 창설된지 3,40년 만에 약 6,000명 이상의 경건주의 목사를 배출하여 독일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일꾼을 보내는 일을 감당하였다.

6)경건주의의 영향

(1)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선교회

진젠도르프는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의 품에서 자랐는데, 외할머니는 스페너와 매우 친한 경건주의자였다. 그 집에 자주 방문한 스페너는 진젠도르프의 대부가 되었으며 또 10세 때부터는 프랑케에 의해 설립된 페다고기움(pedagogium, 지금의 중고등학교)에서 공부하며 프랑케로부터 강한 영적 감화를 받았다. 이후로 그는 친척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주님께 자신의 인생을 헌신하기로 작정하였으며, 신혼 여행을 마친 직후 훝(Herrn Hut)으로 피해 온 모라비안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 후 그는 모라비안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경건한 삶을 살도록 연단시키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어디든지 갈수 있는 세계선교의 정병들로 양성하여 세계 6대 대륙에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이 모라비안들의 선교활동은 개신교 선교역사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이에 자극을 받아 수많은 선교 단체들이 탄생하게 되었으며, 세계 선교의 불이 붙기 시작했다.

(2)영국의 부흥운동과 미국의 대 각성 운동

영국은 청교도 운동이후 18세기에는 영적 침체기에 빠져 있었다. 이때 경건주의자들에게 크게 영향을 받은 요한웨슬레가 등장하여 영적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웨슬레가 미국의 죠지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자 배를 타고가다가 험한 풍랑을 만났다.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있었으나 같이 배를 타고 있던 모라비안들은 전혀 요동치않고 찬송을 부르며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있는 것을 보고 웨슬리는 모라비안들에게 강한 영적 감화를 받았다. 그리고 나중에 모라비안의 지도자인 진젠도르프를 직접 찾아가 만나 많은 영적 교훈을 받게 되었다. 이후로 그는 죠지 휫필드 등과 합심하여 영국내에 큰 영적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한편 미국의 대 각성 운동은 18세기 미국 식민주에서 일어난 신앙 부흥 운동으로서, 이는 경건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죠나단 에드워드와 죠지 휫필드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종교개혁 100년을 전후한 17세기 중엽 독일에서 스페너와 프랑케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경건주의 운동은 당시의 독일 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등 수많은 나라에 영적 영향을 끼쳤고 세계선교 열정을 불러 일으켰다.

2.경건주의를 맥 잇는 교회안의 작은 교회운동으로서 가정교회

1)가정교회의 성경적 배경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가정에서 모이기도 한고 회당에서 모이기도 했다. 즉, 교회가 시작되어진 시기는 한 개인의 가정이 하나의 지역교회였으며 그리스도인의 회당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금지된 이후에는 가정이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는 장소였으며 성도의 교제를 이루는 장소였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이전에는 교회는 지하교회였으며 가정이 곧 교회였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교회는 대부분 가정들이었다는 것은 다아는 사실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마가의 다락방이었고 빌립보 교회는 루디아의 집이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눔바의 집이었으며 골로새 교회는 빌레몬의 집에서 시작된 교회였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는 가이오의 집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가정과 교회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는 가장 가정적인 종교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 예수님을 신랑, 교회를 하나님의 집, 성도를 하나님의 아들딸, 우리는 서로 형제 자매라고 부른다. 실제로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 미국의 부흥운동 등이 가정적 기도회에서 시작된 교회의 부흥운동들이다. 우리 가정이 교회가 되고 교회가 가정 같은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일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때이다.

2)가정교회의 기능

처음교회인 초대교회에 나타난 가정교회의 핵심적인 기능은 다음과 같이 예배, 양육과 제자화, 구제와 봉사, 성도의 교제, 그리고 선교적 기능이다.

(1)예배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매일 모여서 형식에 매이지 않은 자발적인 예배를 드렸다. 이런 자발적인 예배는 가정교회에서 모였을 때에는 매우 자연스러운 방법이었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러한 자발적인 예배에서는 누구나 참여할 자유가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은 이상적인 여건에서는 이것이 기독교인들의 완벽한 자유의 표현이었다. 초기 기독교 가정 예배는, ① 두려워하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예배하였다. ② 찬양과 기도를 드렸다. ③ 성찬을 나누었다. ④ 성도의 교제가 있었다. ⑤그리고 그들은 함께 모이는 데 대한 의식이 있었다.

(2)양육과 제자화

대 교회의 양육의 특징을 살펴보면, ① 기도하는 일에 힘썼다. ② 성찬을 통하여서 주님의 몸으로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풍성하신 생명과 주님의 실재를 경험하였다. ③ 서로 사귀는 일에 힘썼다. 서로의 신앙을 나누므로 서로의 신앙 성숙을 가져왔다. 이것은 중요한 양육의 수단이 되었다. ④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사도들의 양육은 ㉠성경 ㉡예수의 가르침 ㉢당시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던 요리 문답 등이 있었다.

(3)구제와 봉사

초대 가정교회는 구제와 봉사에 힘썼는데,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지내면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이러한 구제와 봉사를 기쁜 마음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로 기꺼이 주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였다. 그들은 구제와 봉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성도의 교제를 이루어 갔다.

(4)성도의 교제

성도의 교제는 가정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그들은 예배 공동체를 통해서 적인 교제를 하였고, 사도들의 가르침 속에서 양육되면서 서로 교제하였고 구제와 봉사를 통해서, 서로 섬기며 대접하는 일들을 통해서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실한 교제는 선교와 연결이 되었다. 또한 이러한 가정교회의 교제는 성서적이고도 기독교적인 접대를 실질적으로 보여주었다.

(5)전도와 선교

가정교회는 그 당시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핍박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이 담대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교회였다. 이러한 가정교회의 특징을 살펴보면, ①초기 선교전략 핵심이다. ②초기 가정교회는 개종에 있어서 통합된 결속의 개념을 강화시켰다. ③가정교회는 문화적 다양성 안에서 복음을 창조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 놓았다. 그래서 전도와 선교의 장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3)가정교회의 역사적 실례로서 웨슬리의 ‘교회안의 작은 교회’

웨슬레는 교회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 함께 연합된 사람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나, 혹은 하나의 그리스도인 가정도 교회라 할 수 있다. 또한 교회의 표적을 산 믿음, 설교, 성례전의 정당한 집행이라 했다. 그리고 교회의 특성을 일치성, 보편성, 사도성, 거룩성으로 보았다. 또한 사도성의 계승을 ‘사도적 교훈의 계승’으로 본다. 교회는 서로 모여야 하며 이를 통하여 신자가 훈육을 받고 성장해 나가는 것이 신자의 생활에 대단히 중요하다.

교회안의 작은 교회의 기능

첫째 = 영적 갱신의 세력 : 작은 교회의 운동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권능을 깨닫게 하고 일상생활에서 참 기독교 공동체의 힘을 알게 하는 대중운동인 것이다. 웨슬레의 교회 안의 작은 교회운동은 전체 교회의 영적 정체에서 출발되었는데, 이것은 바로 전체 교회의 영적 갱신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 성결의 누룩 : 웨슬레의 중심 사상은 한마디로 ‘성결’, ‘기독자의 완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웨슬레는 이신득의 신앙을 바탕으로 성화의 교리를 강조한다. 웨슬레는 생이라는 일회적 사건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며 성결을 향한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웨슬레는 교회는 거룩해야 하며, 또한 교회의 거룩성을 유지하여야 한다. 즉 교회를 통해서 개인과 사회가 모든 불의에서 변화하는 성결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 교회 안의 작은 모임(가정교회)이 중요한 기능을 가지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성결의 누룩으로서의 기능인 것이다.

셋째 = 성도의 교제 : 웨슬레의 작은 교회의 기능으로서 ‘작은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중요시한다. 즉 웨슬레의 작은 모임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상호간의 따듯한 교제를 누리게 되고, 초대 교회 기독교의 기본이었던 코이노니아(성령의 교제)를 회복하게 되며, 이런 작은 모임에서 회심이나 회심을 통한 신앙 성장을 크게 기대할 수 있고, 신앙의 공동 목표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강력한 힘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넷째 = 선교의 작은 기지 : 웨슬레는 선교 활동을 통하여 평신도를 동원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계속적으로 조직적이고 체계있게 훈련하였다. 웨슬레의 성결론은 선교의 동기를 제공해 준다. 웨슬레의 선교 운동은 작은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선교활동이었고 특히 작은 교회의 원활한 운영과 회원의 영지도를 위하여 평신도를 최대한 활용하였다고 보아진다.

4)현대 교회안의 작은 교회로서의 가정

요즈음 현대 교회가 큰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다. 최근 한국 교회 성장 곡선이 정체내지는 감소하는 추세로 나타나고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성장에 대한 열망을 갖고 많은 세미나에 참석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다양한 목회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목회에 적용도 해 보지만 효과를 이루지 못하여 전전긍긍하고 있다. 특히 현대는 산업과 정보, 과학 문명의 발달로 인해 현대인들의 삶이 더 한층 풍요롭고 편리하게 된 반면에 계속적으로 증가하는 이혼율과 가정불화, 가정교육의 부재, 결손가정의 증가, 청소년의 비행과 가정범죄, 노인문제, 성적 타락과 낙태율의 증가, 약물 중독 등의 모습은 오늘날 현대 가정들이 엄청난 혼란과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실감있게 보여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부부간의 갈등과 이혼율의 증가는 인간 행복의 보금자리인 우리의 가정들을 더욱 위기 상황으로 치닫게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0년 이후 이혼율은 계속 증가 추세에 있으며, 89년도에는 연간 이혼 건수가 4만 1천 건이던 것이 2000년도에는 12만 3천 건으로 10년 사이에 3배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2002년도에는 모두 30만 6천 6백 쌍이 결혼했고 이혼은 14만 5천 3백 쌍으로 하루에 840쌍이 결혼하고 398쌍이 이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사유로는 우 ‘부부 불화’가 전체 이혼 건수의 78.2%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이처럼 부부간의 갈등은 현대가정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 자리잡아가고 있고 이혼률 50%의 시대를 바라보는 이 시대를 ‘가정의 위기시대’ 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안의 사정은 어떠한가? 과연 교회안에 있는 가정은 안전지대에 있는 가정인가? 그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교인들이 심각한 상황에 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오랫동안가정문제에 대하여 침묵해 왔다. 고작 일년에 한 ,두 번(어린이주일, 어버이주일) 설교하는 정도로 가정문제를 다루어 왔다. 오늘날 강단에서 가장 소외된 설교주제는 가정일 것이다. 결국 많은 성도들이 가정문제에 대한 복음적인 해석과 성경에 의해 조명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가정은 더욱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고 세상 문화에 그대로 방치됨으로 더 이상 치유 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가정들이 많다. 가정문제에 가장 큰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교회의 침묵은 실로 심각한 자기모순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가정과 교회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가정의 위기가 곧 교회의 위기임을 목회자들은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은 교회가 가정에 더욱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가정 위기시대'에 걸맞는 적절한 목회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한국교회를 연대별 주제 및 이슈를 보자면 70년대가 “전도”였다면, 80년대는 “제자훈련”이었으며, 90년대는 “영성훈련”, 2000년대는 “가정사역, 가정회복”이 가장 큰 한국교회의 주제가 되고 있다.

5)미래교회를 위한 가정교회의 목표

교회 성정이 정체되고 퇴보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교회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교회의 위기는 가정의 위기에서 찾아 볼 수도 있다. 그러기에 가정의 위기시대에 가정을 바로 세우기 위한 새로운 목회적 접근이 필요하다.

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는 이제 가정교회를 회복해야 할 때다. 가족 간에 깊은 신뢰와 이해, 사랑의 교제를 회복하여 본래 가정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더 나아가 지역교회를 힘 있게 하며 이러한 행복한 가정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이 세상에 넓게 증거 되게 하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와는 관계없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 속한 모든 가정의 존재목적 역시 작은 교회로서 교회에 대한 목적과 다를 바가 없다.

한 가정이 지역사회에서 산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려면, 아내는 주께 하듯이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셨듯이 아내를 사랑하며,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할 뿐 아니라 주안에서 순종하고, 아버지는 자녀를 괴롭게 하거나 실망시키지 않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 이런 가정이 되어 질 때 그리스도인 가족 모두는 하나 되는 일체감을 맛보며 나아가 이웃에게 사랑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복음의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건강한 가정이 있어야 건강한 교회를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도들의 가정을 바로 세우도록 목회적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각 가정의 부부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가정이 되고,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도록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6)교회 공동체가 건강한 가정교회로 나가야 하는 이유

교회가 가정교회로 나아가야 할 이유는 많을 것이다

첫째 = 교회의 미래를 준기하기 위해서이다. 가정이 없는 미래교회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신앙은 가정이란 울타리 안에서 자연스런 신앙분위기 속에서 터득되고 학습된 경우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그래서 미래교회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체계화된 가정중심의 신앙운동이 회복되어야 한다.

둘째 = 다양성과 통일성을 이루기 위해서다. 교회는 다양한 개개인이 모여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집단이다. 그리고 현대 사회는 개인의 영역(사생활)을 존중해 주기를 바라는 사회적 특징이 있는 시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은 통일된 그 어느 집단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통일성과 질서를 지키고 있는 집단이다. 물론 다는 아니겠지만...... 이런 개인주의, 익명성을 요구하는 시대에 교회안에서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가정교회회복은 필요한 것이다.

셋째 = 환란의 때에 복음적 생활을 준비키 위함이다. 초대교회는 많은 고난과 외부적인 핍박이 있었으나 믿음을 지키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가정중심의 가정교회였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도 미래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가정교회운동을 회복해야 한다. 한국의 현실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그 위험한 상황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면 교회공동체의 신앙생활은 불가능해 질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일이다. 그래서 환란의 시대에 복음적 생활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 가정교회 회복은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다.

. 결론

가정교회 뿐만 아니라 모든 공동체와 소그룹 안에서의 생명은 하나님의 임재이다. 하나님께 절대 의지하며 그 뜻에 순종하는 교회라면 그 모임이 어떠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 현 교회 안에서는 예배의 회복과 진정한 나눔인 청지기적인 그리스도인의 삶, 또 개개인의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서로 사역할 때,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이요, 하나님의 절대 명령인 선교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데 부름 받은 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섬기는 아침빛교회는 경건주의를 맥 잇는 교회안의 작은 교회운동으로서 가정교회를 이루어 가는데 집중하려고 준비하여 2007년도부터 현 구역제도를 가정교회 체제로 전환하여 가정을 회복하는 운동과 공동체의 본질을 이루는 신앙운동을 이루어 가고자한다.

출처 : 가난한 부자
글쓴이 : 김경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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