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2004년 7월 일본 나고야에 있는 도요타 모토마치 공장의 노조원 스즈키(鈴木·46)씨를 만났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국의 勞使(노사)가 배워야 할 게 무엇인지 느꼈다.
입사 25년이 넘었다는 그는 하루 여덟 시간 작업 이외에 한 시간 정도 잔업을 한다. 그리고 週 3일 정도는 업무를 끝내고 생산성을 올리기 위한 「분임조」에 참가한다. 임금을 받지 않는 활동이다.
그가 받는 연봉은 보너스·잔업 수당 등을 포함, 900만 엔(9900만원) 정도다. 2004년에는 전년에 받았던 7만 엔(77만원)의 성과급을 받지 못했다. 보너스는 약 6% 줄었다.
「임금협상에 불만이 없느냐」는 물음에 그는 『업무 강도가 높아 집에 돌아가면 잠자기 바쁜데 무슨 노조활동을 하겠느냐』며 『노조원들은 임금협상에 관심이 거의 없다』고 했다.
『도요타 임금협상의 기준은 이익의 많고 적음보다는 생산성 향상입니다. 노조도 성과급 챙기기보다는 고용 안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노조는 회사 경영이 잘 될 수 있도록 돕고 조언하는 역할을 합니다』
도요타 노조에는 전체 직원(대리급 이하)의 80%가 가입해 있다. 임금협상의 기준은 생산성 향상이다. 「이윤이 났으니 나눠 달라」는 식의 요구는 설 자리가 없다.
도요타의 경영층은 노조의 이런 자세에 고통 분담으로 화답했다.
아이치(愛知)노동문제연구소 사루타(猿田) 소장은 『경영층이 종신 고용을 가장 중요한 경영 목표로 생각하는 데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고통 분담 차원에서 임원의 평균 임금을 근로자 평균 임금의 3배 이내로 줄였고 이 점이 勞使 신뢰에 큰 몫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54년째 無파업 경영
한국에서 도요타에 대한 관심은 렉서스의 명성보다는 54년째 이어져 오는 「無파업 경영」에서 출발했다. 매년 반복되는 한국 대기업의 격렬한 파업 속에 도요타의 勞使 간 신뢰가 조명을 받은 것이다.
도요타는 2004년 4월 일본 기업 사상 최고의 이익을 내고도 임금을 동결했다. 미래에 닥쳐올지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도요타는 파업에 대한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1950년 판매 부진에 따른 경영 악화로 부도 직전까지 몰려, 은행 융자를 받기 위해선 1500명을 해고해야 했다. 당시 일본을 휩쓸던 공산주의의 영향으로 노조는 파업으로 맞섰다.
도요타의 창업자인 도요다 기이치로(豊田喜一郞, 1894~1952) 사장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감원을 단행했다. 그리고 『경영자가 종업원을 해고한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며 스스로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도요타 노조는 이후 단 한 번도 파업을 하지 않았다. 1960년대에는 勞使 간 無파업 선언을 했고 1976년에는 노조가 파업권을 회사에 반납했다. 한국의 현실로서는 꿈같은 이야기다.
도요타 성공의 가장 큰 힘은 바로 勞使간의 신뢰다. 조화로운 勞使관계를 바탕으로 세계 최고의 품질로 평가받는 자동차를 생산한 것이다.
필자는 2004년 8월 국내의 한 자동차 공장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공장 곳곳에 「도요타를 이기자. 도요타 생산성을 따라잡자」라는 큼직한 표어가 붙어 있었다. 그러나 조립라인을 둘러보고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조립라인의 근로자들이 「쭈쭈바」를 입에 물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더위를 참을 수 없어서라고는 하지만 작업자의 정신 자세가 의심스러웠다. 쭈쭈바의 단물이 손에 묻을 수 있고, 그런 상태에서 부품을 조립한다면 어떻게 될까? 당분의 끈끈함 때문에 때가 묻을 수 있고, 전기 배선이라면 당분 성분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자동차 조립라인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신성한 장소」라는 도요타 작업자의 자세와는 너무 대비됐다. 도요타 공장에선 이런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쭈쭈바를 입에 물고 작업을 해도 되느냐」는 질문에 현장 관리자는 노조의 힘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아무리 노조가 무섭다고는 하지만 현장 관리자가 생산성과 품질 향상을 위해 작업자들에게 할 말은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조립라인을 둘러보면서 이런 상태에서 과연 한국의 자동차 기업들이 어떻게 도요타를 능가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나무 결재함과 낡은 탁자
도요타 나고야 빌딩 사무실에서 필자는 한국에서 1980년대나 볼 수 있던 직사각형 나무 결재함을 봤다. 부장 책상 위에는 결재함과 未결재함이 놓여 있었다. 1980년대 도요타는 몽당연필을 볼펜 껍데기에 끼워 쓰는 회사였다.
상급자는 서류에 문제가 있을 경우 未결재함에 넣어둔 후 부하 직원과 직접 만나서 문제를 풀어 간다.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통해 일을 풀어 내는 것이 이메일을 주고받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얘기였다.
도요타 도쿄 본사에서는 수십 년 된 철제 책상을 그대로 쓰고 있다. 낡은 회의 탁자와 여기 저기 쌓아 놓은 서류철이 첨단 사무실과는 거리가 멀다. 사무실에서 첨단 LCD 모니터를 찾아보기 어렵다. 부장 자리에 겨우 한 대 있을 정도다. 대부분 대형 모니터를 그대로 쓰고 있다.
사무실 한켠에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도트 프린터」가 돌아가고 있다. 낡았지만 그대로 쓰고 있다. 감가상각 연한이 안 돼서 그렇다고 한다. 『그걸 바꿔 봐야 품질 좋은 자동차를 생산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이야기도 곁들인다.
첨단 컴퓨터 장비와 고급 사무가구로 잘 정돈된 한국 대기업의 사무실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공장의 생산성을 높이는 설비 이외에는 돈을 쓰지 말라」는 도요타 그룹 창업자의 경영이념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일까?
도요타市
도요타市는 반경 50km에 12개의 공장과 2만 개의 관련 부품업체들이 모여 있는 세계 최대의 산업 클러스터 단지다. 2004년 봄,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에서는 『한국에도 도요타市를 본딴 기업도시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부의 이런저런 규제를 풀어야만 기업도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도요타市를 가보면 전경련의 주장이 얼마나 탁상의 발상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도요타 관계자는 『도요타市는 정부의 육성으로 생겨난 도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도요타는 왜 도쿄나 오사카가 아닌 나고야 부근에 공장과 본사를 뒀을까?
도요타 본사 및 주요 공장이 자리 잡은 도요타市 일대를 옛날에는 「미카와(三河)」라고 했다. 넓은 평야지대인 미카와는 조직이나 상사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지역 문화를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에는 『미카와의 개는 다른 동네 개보다 몇 배 충성스럽다』는 농담이 있다고 한다.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 지역 출신이다.
얼마나 충성심이 강했는지 막부 시절 농민군이 집결해 사무라이 군대를 물리치기도 했다.
도요타를 창업한 도요다(豊田) 집안은 이곳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시즈오카 縣(현) 출신이다. 미카와에 공장을 지은 것은 이런 지역성(충성심)을 이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자동차는 인간의 생명과 관계된 물건이다.
이를 만드는 데는 보통 작업자와 다른 충성심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도요다一家는 미카와 출신의 소수 정예부대를 공장 곳곳에 심었다.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미카와 종업원들은 他지역 출신 작업자들을 리드하며 앞장서 헌신적인 작업 의욕을 보여 줬다.
1990년대 초 일본의 빅3인 도요타, 닛산, 혼다의 도쿄大 출신 임원수를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도요타는 35%, 닛산 65%, 혼다는 10% 내외였다.
똑똑하기로 소문난 도쿄大 출신이 많은 닛산은 도쿄大 출신 임원들이 파벌을 쌓고 경영권 분쟁을 벌였다. 중요한 결재가 올라와도 다른 파벌이 중심이면 정반대의 결정을 하기도 했다. 이런 파벌은 임원 퇴직 후 子회사로 옮긴 「선배 봐주기」 풍토로 이어졌다.
이같은 파벌이 닛산 몰락의 한 원인이라는 지적이 많다. 도요타는 나고야에 본거지가 있어 상대적으로 도쿄大 출신이 덜 지원했다. 이들이 입사할 당시 도요타자동차는 나고야의 촌스러운 기업에 지나지 않아 우수한 人材들은 닛산으로 향했다.
그래서 도요타는 도쿄大 출신 파벌이 득세하지 못했다. 부근 나고야大나 고베 商大 출신들이 오히려 강세였다. 세계 최강으로 올라선 지금도 도요타에는 도쿄大 출신 비율이 30%를 밑돈다.
이에 따라 도요타는 상대적으로 열세인 人材를 육성하기 위해 닛산보다 먼저 해외로 사람을 내보내고 일본 전국에서 人材를 끌어 모았다.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전자 임원의 학벌 구조를 살펴보자.
2004년 8월 삼성전자가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상무보 이상 임원 530명 가운데 서울大 출신은 100명, 연세大 41명, 고려大 38명으로 세 학교 출신을 모두 합쳐도 3분의 1에 그쳤다. 반면 지방 국립대 등 지방대 출신이 102명에 달했다.
두 회사 모두 학벌보다는 실력으로 평가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 고구마를 심은 뜻
도요타는 2001년 인도네시아에 도요타 바이오인도네시아 법인을 설립하고 수십만 평의 초대형 농장을 샀다.
양질의 고구마를 생산하는 농장이다. 그 옆에는 고구마 가공 공장을 건설했다. 자동차에 들어가는 생분해성 플라스틱을 만들기 위해서다. 고구마를 재료로 해서 만든 생분해성 플라스틱은 폐차 때 따로 떼어내 가공 처리를 하면 자연스럽게 분해돼 환경오염 물질이 남지 않는다.
고구마 공장은 또 수소를 연료로 사용하는 「연료전지」 시대에 대비하기 위한 투자다.
현재 수소를 뽑아내는 가장 경제적인 자원은 석유다. 그러나 석유 자원이 고갈될 경우 상황은 다르다. 고구마는 어떤 자원보다도 순도 높은 천연 수소를 뽑아낼 수 있는 원료가 된다. 도요타는 20~30년 이후 연료전지가 대중화할 시대에 대비, 벌써부터 양질의 고구마 농장과 가공시설을 선점한 것이다.
도요타의 부채 비율은 「0%」다. 석유파동의 위기를 겪고 난 1977년 달성했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다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벌어들인 이익으로 투자를 한다. 남의 돈을 쓰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 도요타 창업 一家의 정신이다. 1950년 노동쟁의와 판매부진 등으로 파산 위기에 닥쳤을 때 은행돈을 빌리기 위해 고생했던 전철 때문이다.
이같은 전통은 당시 위기의 도요타를 구해낸 이시다 다이조 사장이 만들었다.
그는 『차입금은 언제라도 무서운 敵이 될 수 있다. 이익만큼 듬직한 것은 없다. 빌린 돈은 잘못하면 敵이 되기 쉽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돈, 자신이 일해서 모은 돈이 아니면 안 된다』라는 어록을 남겼고 지금도 도요타 재무부서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도요타는 현재 60조원의 잉여 자금을 보유하고 있다. 이 자금으로는 절대 주식이나 부동산에 투자하지 않는다. 주식 투자의 위험도 위험이지만 본업인 자동차 만들기를 게을리 할까 봐 그렇다. 운이 좋아 주식 투자로 이익을 많이 남길 경우 본업인 자동차 경쟁력 향상을 위한 투자를 게을리 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닛산은 버블경제가 깨진 후 여기저기 투자했던 부동산 가격이 폭락해 자금난이 가속화됐다. 1990년대 중반까지 한강의 기적 소리를 들으며 성장 신화를 이어가던 국내 대기업들이 본업 이외에 딴 곳으로 눈길을 돌려 송두리째 날린 자금이 얼마인가.
대기업들이 여기저기 사놓은 부동산과 잘 모르고 투자했던 해외 파생 금융상품은 IMF 관리체제를 맞으며 원금은커녕 수천억원의 빚으로 둔갑했다. 그리고 기업의 몰락을 재촉했다. 이런 경험에 비추어 보면 본업 충실이 얼마나 중요한 메시지인지 느낄 수 있다.
도요다 집안의 솔선수범
『순수 일본의 두뇌와 기술로 자동차를 만들겠다』
도요타 창업자인 도요다 기이치로의 창업 이념이다.
일본의 경제학자들은 도요타 성공 요인 가운데 하나로 창업 이래 70여 년간 도요다 一家가 중심이 됐던 경영권 안정을 꼽는다. 도요다 一家가 代를 이어 경영을 해오면서 30만 도요타 직원의 구심점이 돼 단 한 번도 경영권을 놓고 싸움을 하거나 외부의 분란에 휘말린 적이 없었다.
경영이 어려울 때는 도요다 一家 이외에 최고경영자들이 사장을 맡아 불을 껐고 더 강하게 도요타의 토대를 다졌다.
경영권이 불안한 기업은 조금만 흠이 나면 사장이 바뀌고 그에 따라 경영진 전체가 물갈이 된다. 거대 함선의 선장이 흔들릴 경우 그 배가 산으로 갈 것은 뻔하다.
도요다 一家의 경영 안정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다. 도요다 一家의 뼈를 깎는 노력과 솔선수범, 그것이 뒷받침돼 오늘날의 도요타 유전자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뒷돈을 챙기는 식의 부도덕은 찾아볼 수 없다.
기이치로는 창업 때인 1930년대부터 고객만족을 도입했다. 『고객의 요구를 조사·연구해서 자동차에 반영하라』고 지시했다. 이 어록은 도요타의 첫 번째 경영 가치인 고객 만족의 전통으로 뿌리 내리고 있다.
납품업체 육성·지도
기이치로는 납품업체에 대한 철학이 남달랐다. 항상 일정하고 안정된 거래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부품업체를 전문화시킬 수 있는 「육성과 지도」를 강조했다.
『자동차 회사는 자동차를 잘 조립하는 것만으로 성공할 수 없다. 협력업체와 함께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순히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물건을 만드는 것이다』
나고야의 도요타 판매점에 갔더니 사무실 정면에 붙어 있는 액자에 「첫 번째 소비자, 두 번째 판매자, 세 번째 생산자」 라는 글귀가 보였다.
이 글은 「판매의 神」으로 불렸던 카미야 쇼타로 사장(도요타 판매 사장 역임)의 어구이다.
오늘날 도요타를 대표하는 고객만족과 판매(마케팅) 우선주의는 기이치로의 창업 이념에서 시작됐다.
도요다 一家가 사장을 맡다가 경영이 어려워지면 우수한 참모진 가운데 한 명이 최고경영자로 나섰다. 경영 위기라는 불을 끄면 다시 도요다 一家에 사장 자리를 내놓는다. 그게 도요타의 절묘한 오너 一家와 최고경영자의 콤비다.
도요다 一家의 주식 지분은 3% 정도다. 그러나 도요다 家門은 社內의 파벌 항쟁을 막고 사원의 구심력을 높이는 「천황가(일본의 왕)」와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도요다 家門이 있음으로 해서 쓸데없는 파벌 싸움을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도요다 一家의 자손들이 경영에 참가하는 것은 아니다. 도요타는 능력이 떨어지는 親族은 경영에서 배제한다. 이런 원칙이 창업 一家 내부에서 철저히 지켜지고 있다. 특이한 점은 도요다 一家의 경우 경영권을 놓고 싸우거나 내 몫을 떼어 달라며 그룹에서 분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親族들이 모두 결집해 그룹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 것은 눈여겨볼 부분이다.
1990년대 말 한국에서 IMF 관리체제를 불러온 원인 중 하나가 경쟁력 없는 2, 3세의 경영권 승계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한국에선 아직도 도요타 하면 「無재고 시스템(저스트인타임·Just in Time·JIT)」을 떠올린다. 그런데 JIT는 이미 1980년대 말에 끝난 얘기다. 도요타 생산시스템은 진화하고 있다.
도요타 생산시스템(TPS)
도요타 경영의 요체로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바로 도요타 생산시스템(TPS)이다. 도요타 생산시스템은 기능적이거나 기계적인 요소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자동화 장치나 새로운 혁신적인 시스템이 아니다. 그래서 배우기 어렵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현장 작업자를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있다.
시키는 일이나 완수하는 수동적·기능적 인간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업무의 개선점을 찾아내는 능동적 인간(도요타에서는 이를 「전원참가형 경영」이라고 칭함)으로 본다.
일본의 발명가였던 도요다 사키치의 아들 도요다 기이치로는 1937년 도요타 자동차를 설립했다. 中日전쟁 때 군수물자로 납품된 도요타 트럭은 고장이 잘 나기로 악명이 높았다.
트럭이 멈춰서면 당시 군인들은 『이거 도요타 트럭 아냐』라고 투덜댔다고 한다. 1940년대 도요타의 생산성은 미국의 GM이나 포드에 비해 10분의 1 수준이었다.
패전 직후인 1945년 8월16일 도요타 사장이었던 도요다 기이치로는 『3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으리라』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이 슬로건에 호응한 인물이 「TPS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오노 다이치(大野耐一: 훗날 부사장까지 올랐음)였다.
당시 도요타 본사 공장의 조립라인을 담당하고 있던 오노氏는 이렇게 회고한다. 『미국과 똑같은 기계를 사용하고 있는데 생산성에 큰 차이가 났다. 기계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작업자를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산의 균일화, 표준 작업화, 조립라인(레이아웃)의 변경 등 생산시스템의 개선에 주력했다』
1980년대 초반 어느 정도 골격을 잡은 TPS는 저스트인타임과 「自化(자동화)」라는 두 가지 기둥으로 유지하고 있다. 도요타市에 위치한 도요타 본사 바로 옆에 있는 모토마치 공장은 TPS의 기본을 볼 수 있는 공장이다.
JIT는 필요한 것을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생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필요한 재고와 반제품을 방지하는 방식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게 「칸반」 시스템이다. 뒷공정이 앞공정에 필요한 부품의 종류와 양 그리고 필요 시간을 전달하는 수단이다.
원래는 작은 종이조각 형태였지만 지금은 정보기술의 발달로 모두 컴퓨터 시스템화돼 있다. 기존 포드 컨베이어 시스템이 앞공정과 뒷공정이 분리돼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문제 생기면 全생산라인 정지
自化란 한마디로 말해서 조립라인에서 이상이 발생하면 라인 전체를 세우고 그 자리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사람 인(人)」 변이 붙은 자동화(自化)부터 살펴보자.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자동화는 「움직일 동(動)」 자를 쓴다. 움직일 동 자에 사람 인 변이 붙은 「」은 우리나라에는 없는 한자다. 일본어에서 뜻은 「일하다」는 의미다.
오노 다이치는 『일하는 것()과 움직이는 것(動)은 다르다』고 했다. 일하는 것은 실제로 물건을 가공하거나 조립하는 생산활동이지만, 움직이는 것은 물건의 운반이나 순서를 바꾸는 등의 부가가치를 만들지 않는 단순히 움직이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단순한 움직임을 공정에서 배제하라』고 한 것이 그의 지론 중 하나다.
즉, 단순히 자동으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라 스스로 일하는 자동화 기계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동으로 움직이는 기계와 스스로 일하는 기계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이를 이해하려면 「도요타 자동차」의 모체인 「도요타 자동직기」의 창업자이자 발명가였던 도요다 사키치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문제가 생겼을 때에 자동으로 정지하는 자동직기를 발명했다.
당시 그는 『불량품을 만들어 내고 있는 동안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불량품을 만들어 내고 있는 동안은 단순히 움직이고 있는 것뿐이며 그런 상태를 『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요다 사키치의 발상은 자동차 공장에 가이젠(改善·개선) 사상으로 계승됐다. 작업자가 임의로 라인을 세울 수 있게 하는 장치로 이어졌다.
미국 등 구미 지역의 전통적인 자동차공장에서는 일개 작업자가 라인을 세운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도요타 공장에는 생산라인 곁에 늘어져 있는 하얀 끈을 볼 수 있다.
작업자가 조립 도중에 무언가 이상을 발견했을 때 이 끈을 잡아 당기면 생산라인에 설치한 램프의 색깔이 푸른색에서 황색으로 바뀌고 음악이 울리면서 라인이 멈춘다. 이후 작업반장이나 베테랑 작업자들이 라인을 세운 작업자 곁으로 모여 이상을 해결한 뒤에야 다시 라인을 가동시킨다.
물론 그 사이에 다른 작업자들은 일손을 놓을 수밖에 없다. 언뜻 보기에는 손실이 대단할 것 같지만, 그런 식으로 한 가지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그 문제를 매몰시키는 것보다 장기적인 시점에서는 득이 된다는 생각이다. 포드의 컨베이어 시스템이 단순히 기능적인 자동화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려는 것에 비교하면 도요타는 인간적인 요소를 더욱 중시하고 있다.
어떤 전문가들은 『JIT는 도요타의 부품 재고부담을 납품업체에게 떠넘긴 것에 불과하다』고 혹평하기도 한다.
납품업체들은 도요타市 주변 공장에 보통 오전, 오후에 한 번 정도 트럭으로 부품을 싣고 온다.
도쿄-나고야 간 도메이 고속도로의 도요타市 인터체인지는 매일 대형 트럭이 장사진을 이룬다. 공장 작업시간에 맞추어 부품을 대기 위해서다. 마치 컨베이어 벨트처럼 부품을 실어 나르고 있는 셈이다.
혹시나 부품 조달이 늦어 공장 라인이 멈추거나 하면 난리가 난다. 라인 가동 중단에 따른 손해액은 부품업체가 안아야 한다. 그러니 부품 업체 입장에선 적기 공급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또 자연히 납품하는 부품의 품질은 향상될 수밖에 없다.
『도요타, 문제해결 중독자들의 집단』
그렇다고 도요타가 뒷짐만 지고 부품업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가 있는 부품업체에 대해서는 도요타의 종업원이 직접 그 회사를 찾아가 함께 그 문제의 해결점을 찾는다.
도요타 생산시스템을 연구한 도쿄大경제학부의 후지모토 교수는 『도요타는 한마디로 문제해결 중독자들의 집단』이라고 정의한다. TPS의 본질은 바로 「문제해결 중독자들을 키워 내는 사고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2003년 일본 도요타의 가이젠(改善)은 57만건에 달한다. 종업원 6만5000여 명이 연간 평균 11건 정도 가이젠을 했고, 이 중 90% 정도가 채택돼 생산성 향상과 비용감소로 이어졌다. 이와 같이 TPS의 본질은 문제를 해결할 줄 아는 근로자를 만들어 내는 데 있다.
도요타 본사에서 만난 한 간부의 이야기다.
『사람을 자르면 비용이 줄고 당장은 근로자들에게 분발할 수 있는 동기를 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 동기는 길게 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또 잘라야 하고 결국 근로자는 이런 점에서 무감각해집니다. 그럴 경우 회사에 대한 충성심과 생산성은 이전보다 더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종업원은 비용이 아니라 資産
필자가 인터뷰했던 도요타의 계열사인 「덴소」의 후카야 사장은 「덴소가 이익을 내지 못할 경우 종업원을 어떻게 하겠냐」는 필자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종업원은 비용이 아니라 투자의 개념입니다. 그럴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바로 최고경영자의 의무이고 능력이어야 합니다. 사업을 구조조정하더라도 사람을 잘라내선 안 됩니다. 당장 어려움을 넘기려다 회사가 통째로 망할 수 있습니다』
2000년대 도요타를 세계 최강으로 이끈 오쿠다 히로시 회장은 닛산을 3년 만에 정상궤도에 올려놓은 카를로스 곤 사장에 대해 비판적이다. 오쿠다 사장은 곤 사장을 「사람을 자르는 서양 귀신」으로 여겼다. 닛산이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 2만 명의 직원을 해고한 것을 문제 삼는 것이다.
종신 고용이 주는 근로자의 안정감, 이게 바로 가이젠(改善)을 통한 도요타 생산시스템을 완성시키고, 그것이 다시 생산성으로 연결된다는 게 오쿠다 경영철학의 큰 줄기다.
도요타는 2004년 3월 결산에서 13조원의 당기 순이익을 기록했다. 그중 2조원이 가이젠을 통한 원가절감 효과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도요타의 세계 최강의 생산성과 품질은 바로 조립라인 근로자의 성실한 자세와 가이젠 활동에서 나온다. 그 뒷받침은 평생 고용과 선배·가족 같은 현장 관리자, 그리고 그들의 제안을 믿고 서슴없이 받아들이는 경영층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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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종학이의 세상
글쓴이 : 쫑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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