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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재벌 총수들 “화술도 경영이다”

가디우스 2007. 3. 8. 18:17
대기업 오너들의 말과 화술

침묵, 핵심, 유머… 그리고 어눌함

지금부터 7년 전 IMF쇼크가 터진 직후였다. 청와대, 재경부, 그리고 재벌기업의 오너 회장들이 수시로 만나 대책회의를 가졌다. 당시 회의를 마치고 나온 어느 고위관료는 “우리나라 기업들 정말 큰일이야. 재벌회장들이 바보 같아. 도대체 주어와 동사와 목적어가 따로 노는 말을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어떻게 큰 기업을 경영하나”라고 탄식했다. 일류대학을 나와 행정고시를 거쳐 20여년의 관료생활 끝에 고위직에 오른 그의 입장에서는 재벌 오너 회장들의 흐리멍텅한 말솜씨가 못내 못마땅했다.

하지만 당시 이건희(李健熙) 회장을 수행했던 삼성 비서실의 어느 간부는 이 얘기를 듣고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원래 관료들이란 치열하게 남을 설득하면서 출세한 달변가들로, 아마 말을 못했다면 금방 도태됐을 것”이라며 “하지만 총수들은 평생 남을 설득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로 직관을 중시하지 논리적인 발언에는 약하다”고 말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건희 회장의 말은 어눌하고 투박하게 들린다. 느릿한 말투에 경상도 사투리가 섞여 있고 문장은 길게 늘어진다. 종지형(終止形)이 불분명하고 때로 한참 뜸을 들이다가 말을 계속 이어가기도 해 말이 어디서 끝나는지 알 수 없다. 실제로 삼성 계열사 사장들은 이 회장이 갑자기 “그거 잘되고 있어”라고 말하면 뭘 묻는지 몰라 무척 당혹스러워 한다.

한창수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이 회장은 기상천외한 사례를 갑자기 언급하는가 하면 엄청난 속도감으로 비약을 거듭하기도 해, 만일 처음 이 회장의 말을 듣는 사람이라면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면서 “그러다가 말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되면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입을 다문 채 산다”고 말했다.

그는 “이 회장의 말이 어눌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까닭은 그가 침묵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며 “말이란 일정한 침묵이 배경이 되어야만 가치가 드러난다”고 덧붙였다. 가령 ‘사장보다 더 많은 월급을 주는 인재를 스카우트하라’ ‘아내와 자식 빼고는 모두 바꾸어라’ ‘아예 양(量)은 포기하고 질(質)만 따져라’ 등의 경구는 오랜 침묵 끝에 나왔다.

이 회장은 작년 말 삼성그룹 사장단 송년모임에서는 느닷없이 “다른 사장들은 삼성전자의 황창규 반도체담당 사장이 거래선을 관리하는 방법을 모두 배워라”고 언급, 참석자들을 긴장시켰다. 이 회장이 구체적으로 특정인을 거론한 적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적절한 침묵과 한마디를 통해 긴장감을 주면서 오늘날의 삼성그룹을 만들었다.

국내 재벌기업 오너들의 화술(話術)이나 화법(話法)을 보면 일반인과는 다른 대목이 많다. 우선 적지않은 오너들이 말이 어눌하거나 세련되지 못하다. 두산중공업 회장인 박용성(朴容晟)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같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상당수 재벌 오너들은 ‘말솜씨’란 평가항목에서 50점도 제대로 받기 어렵다.

지시·명령 내리는 데만 익숙해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지금까지 최고경영자로 성장하면서 다른 사람과 토론하거나 의논하는 방법을 별로 배우지 않았다. 따라서 천성적으로 자기 뜻에 반하는 얘기를 듣기 싫어하고, 지시와 명령을 내리는 데만 익숙하다.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설득을 통해 자기 의사를 관철시키고자 해야 말솜씨가 늘게 된다. 하지만 오너들의 경우 싫은 사람은 만나지 않으면 그만이다. 따라서 굳이 논리정연하게 말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어느 기자는 이를 두고 “싫어도 남과 어울리는 사회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셈”이라고 말했다.

대신 재벌 오너들은 말솜씨보다는 직관력을, 남에 대한 설득보다는 자기에 대한 확신을 키우는 데 주력해왔다. 그러다보니 대외행사나 언론 접촉에 매우 어색하거나 수줍은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 생뚱맞은 직설화법으로 파문을 일으키기도 한다.


김영삼 정부 때 5조원 규모의 금융특혜를 받고 한보철강이라는 사상누각(砂上樓閣)을 세웠던 정태수(鄭泰守)씨는 한보 청문회 때 자기가 선임한 전문경영인에 대해 “머슴이 뭘 알겠느냐”고 발언,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시대착오적인 소리”라고 비판했지만, 재벌기업의 의사결정 생리를 잘 아는 사람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재벌에서 권력은 오너에게로 쏠리게 마련이다. 모든 권한은 그쪽으로 간다. 오너는 부하를 단기간 신임할지언정, 영속적으로 신뢰하지는 않는 속성이 있다. 최고권력자의 자질 중 하나는 바로 항상 부하를 의심하는 데 있다. 그래서 재벌 오너가 특정한 부하를 혼내려면 회의에서 그로 하여금 말을 시킨 뒤 “그래서?”를 몇 번 반복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 답변이 막히게 되고 바보가 된다. 그런 유의 제왕학 스킬만 익힌다면 재벌 오너들이 반드시 능숙한 달변가가 될 필요는 없다. 그냥 ‘침묵의 카리스마’나 ‘이심전심(以心傳心) 의사전달’만으로도 부하들을 벌벌 떨게 할 수 있다.

현대자동차 그룹의 핸들을 쥐고 있는 정몽구(鄭夢九) 회장도 대외적인 말솜씨는 어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령 지난해 6월 18일 서울대에서 열린 ‘차세대 자동차 연구관’ 개관식에서 정 회장은 축사를 하면서 이희범 산업자원부 장관을 “존경하는 이해범 산자부 장관”이라고 언급, 장내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었다. 그는 또 자동차 연구관 3층에 전시된 차 중에 기아자동차의 1000㏄ 소형차 ‘모닝’을 가리키며 “이 차 참 예쁘네, 여기(서울대)에서 만들었나”라고 직원들에게 질문, 동행한 임직원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기아자동차의 신차 발표회에서는 스포티지를 ‘스티포티’로, 오피러스를 ‘올림푸스’로 발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 회장은 부하직원에게나, 아니면 친숙한 사람 앞에서는 꽤 말을 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 회장은 최근 어느 가까운 출입기자에게 황제 다이어트에 대해 설명했는데, 그렇게 상세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다만 낯선 사람이 많은 공식행사가 문제될 따름이라는 것. 이 때문에 참모들은 대외행사나 청와대 총수모임 등이 있으면 시나리오에 따라 원고를 작성해주고 정 회장은 며칠 전부터 이 원고를 숙독한다고 한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정 회장의 말솜씨는 그리 능숙하지 않지만 상황을 파악하고 핵심을 뽑아내는 경영감각이 무섭다”면서 “대외적인 말솜씨는 경영 능력의 극히 사소한 부분일 따름”이라고 말했다.

“바람난 소니 이해할 수 없다”

구본무(具本茂) LG그룹 회장도 달변가로 분류하기에는 어색하다. 환갑을 바라보는 구 회장은 임직원과 잘 어울리며 각종 모임에서 ‘울고넘는 박달재’나 ‘번지없는 주막’ 같은 뽕짝을 매우 구성지게 부른다. 그는 외모에서 풍기는 소탈한 인상처럼 형식주의와 격식주의를 철저히 배격한다. 그러다보니 주요 회의에서 자기 생각을 말하는 데 3분을 넘기지 않는 편이다. 다른 사람에게 말할 기회를 주려는 의도도 있지만, 무엇보다 본인이 길게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구 회장은 사석에서는 농도 짙은 입담과 유머로 분위기를 일순간에 바꾸어 놓는다. 유머의 소재도 풍부해 다른 사람에게 한 번 들려준 내용은 상당기간 다시 반복하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LG그룹 주변 인사들은 “구 회장의 유머는 아마 장인인 김태동 전(前) 보사부 장관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며 “구 회장의 장인도 농담을 잘해 곧잘 좌중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곤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구 회장의 이미지가 ‘털털한 이웃집 아저씨’ 같고 ‘유머감각이 뛰어나다’고 하여 그를 쉽게 대하면 오산이다. 구 회장은 대단한 집념의 소유자이다. 성격이 급하고 화가 나면 불 같으며 한 번 틀어지면 쉽게 풀지 않는다.

구 회장이 지금까지도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불참하는 것은 김대중 정부 초기에 진행된 ‘빅딜’ 당시 전경련이 현대그룹 편에 서서 LG반도체를 현대전자로 넘기도록 한 데 대한 앙금이 아직도 풀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회장 취임 이전에는 LG건설이 시공한 아파트 벽에 금이 갔다는 보고를 받고 “당장 헐고 다시 지으라”며 호통치기도 했다.


구본무 회장의 동생인 구본준(具本俊) LG필립스LCD 부회장은 재계에서 소문난 독설가로 통한다. 그는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를 여과없이 구사하면서 속내를 직설적으로 털어놓는다. 구 부회장은 2003년 4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디스플레이 전문 전시회 ‘EDEX 2003’에 참석한 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삼성전자가 LCD(액정소자) 부문에서 최근 LG에 1등을 내준 것은 2차 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한 것과 비슷하다”며 “5년 연속 세계 1위에 자만해 양산기술 습득을 게을리한 탓이며 전쟁을 이끈 임직원은 전범(戰犯)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경제전쟁의 패배자였고, 전쟁을 지휘한 임직원은 2차 대전에서 미국에 패한 일본의 전범과 같다는 논리여서 당장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또 지난해 11월 5일 연세대 강연에서는 LG로부터 LCD 패널을 공급받던 소니가 삼성전자와 손을 잡은 것에 대해 “하루 아침에 옆집 여자와 바람난 소니의 행동을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고 공격했다. 그는 또 삼성전자가 2년 전 4~5세대 LCD 규격 합의를 파기한 것과 관련, “삼성전자가 자기 혼자 똑똑한 척하고 배신했지만 지금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우리는 특허 수에서 삼성을 앞서고 인력 구성원의 개발 능력을 북돋우는 면에서도 우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구본준 부회장의 이같은 직격탄이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자, 삼성 측에서는 정면대응에 나서는 방안을 심각하게 검토했다. 하지만 그러다간 괜히 구 부회장의 발언을 추인해주는 것 같아 아예 무시해 버리는 전략으로 나가고 있다. 구 부회장의 이같은 발언이 계속되자 형인 구본무 회장으로부터 “자중하라”는 전화가 왔던 것으로 재계에는 알려져 있다.

구본준 부회장과 대조적인 오너는 바로 그의 5촌인 구자홍(具滋洪) LS그룹(옛 LG전선그룹) 회장이다. 그는 ‘재계 최고의 젠틀맨’이라는 별명처럼 재벌 오너 중에는 가장 품위 있는 말솜씨를 자랑한다. 표준 억양과 어휘를 골라 자기 의사를 세련되게 표현하고 상대의 말을 경청할 줄 안다. 영국에서 찰스 황태자를 만났을 때는 영국 사람조차 그의 발음과 표현에 경탄할 정도로 영어실력이 뛰어나다. 그는 이런 젠틀맨 리더십으로 LG전자를 이끌어왔으나, 2년 전 타의로 LS그룹으로 옮겨온 뒤 한동안 두문불출하다가 지난 1월 19일 LS그룹 CI(기업이미지통합) 발표회 행사 때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영국 사람들도 발음·표현에 경탄

그날 구 회장은 2003년 말 LG전자 회장직을 떠난 것에 대해 “우리 집안은 인화를 중시하고 장자·장손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세월이 지나도 바뀌지 않았다”며 “다만 LG그룹에서 그렇게 빨리 떨어져나올 줄은 몰랐다”는 말로 아쉬움을 내비쳤다.

4대 그룹 오너 중에서 가장 젊은 최태원(崔泰源) SK㈜ 회장을 처음 대하는 사람은 무뚝뚝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커다란 체구에 별로 말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입을 열면 매우 논리적이고 현학적으로 얘기하기를 좋아한다. 지난해 최 회장은 신입사원을 비롯, 여러 직급의 직원과 총 22회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대개 30분 정도 발언할 예정이었다가 실제론 이보다 훨씬 길어지곤 했다. 최 회장의 말을 들은 SK 직원은 “다양한 지식을 동원하여 학자풍으로 논리를 세워 얘기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기자는 2002년 5월 22일 당시 서울대 공대 산업기술정책 대학원에서 ‘지식기반 사회의 기업 경영전략’이란 주제로 열린 최태원 회장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당시 매주 수요일 대학원에 CEO 강사로 출강하고 있었다. 그는 두 시간 가까이 독특한 논리전개와 선명한 목소리, 다양한 예화제시로 방청객의 눈길을 모았다. 다만 최 회장이 언급하는 추상적이고 아카데믹한 용어가 현실세계에서 좀더 구체화된 표현으로 나타났으면 하는 게 그와 얘기를 나누어본 사람들의 평이다.

재계의 ‘미스터 쓴소리’라는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더이상 소개할 필요가 없는 달변가다. 그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면 어느 자리에서나, 누구를 만날 때나 한 개씩의 핵심 키워드를 미리 준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간단명료한 말과 비유법을 많이 사용한다. 그러다보니 엉뚱한 곳으로 말이 새나가지 않는다. 어느 자리에서는 정부를, 또다른 장소에서는 재계를 신랄하게 비판, 양측을 절묘하게 오가며 자신의 발언 가치를 극대화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다.

박 회장은 최근에도 “싱가포르는 깨끗하기 위해 껌 씹으려면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 한다. 그런 나라도 성매매방지법은 없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 국가가 국민의 성행위를 관리해주고 있는가”라고 정부를 비판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기업들이) 미래 불안 때문에 투자를 못한다는 것은 빤한 거짓말로, 돈을 벌 곳이 있다면 사채를 끌어들여서라도 한다. 재계도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할 것은 하면서 요구해야 한다”면서 재계를 겨냥한 쓴소리를 내뱉었다.

경제단체장들은 비교적 말에 능숙

아무래도 여러 회원업체들을 리드해야 할 경제단체장들은 비교적 말에 능숙하다. 동아제약 회장인 강신호(姜信浩) 전경련 회장은 조곤조곤 유머를 섞어가며 좌중을 사로잡는 말솜씨를 가지고 있다.

재계에서는 원로인 박영주(朴英珠) 이건산업 회장이 와인 등 다양한 소재를 가지고 구자홍 LS그룹 회장과 비슷하게 가장 품위있는 언변을 구사하는 오너로 꼽힌다. 또 부시 미국 대통령과 친분이 깊은 류진(柳津) 풍산 회장은 미국 현지에서 ‘품위 있는 영어 연설을 하는 한국 기업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항공업계 라이벌인 조양호(趙亮鎬) 한진그룹 회장과 박삼구(朴三求)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은 화술이 대조적이다. 조 회장은 말이 적은 데다 핵심만 찌르고 과감한 생략을 하는 스타일인 반면, 박 회장은 마치 여러 명의 동생을 거느린 큰 형님처럼 시원시원하면서도 친화력있게 말하는 스타일이다.

마찬가지로 조석래(趙錫來) 효성그룹 회장도 일단 마이크를 잡으면 놓치 않을 정도로 달변가에 속하는 반면, CJ그룹 이재현(李在賢) 회장은 외부 노출을 꺼리고 말도 그리 많지 않은 편이라고 한다.

외동아들로 자라나 구김살 없고 호탕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이웅열(李雄烈) 코오롱그룹 회장은 말하기를 즐기는 편이다. 그는 때로 청바지 차림으로 임직원에게 경영 강의를 한다. 친화력 있는 성격 때문에 재벌 2~3세 모임의 수장 역할도 오랫동안 해오고 있다.

출처 : 산사(山寺)의 꽃
글쓴이 : 팡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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