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명의말씀

[스크랩] 시편 23편

가디우스 2011. 8. 3. 18:10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편 23편을 중심으로)
스펄전 목사는 시편 23편을 일컬어 ‘시편의 진주’라고 일컬었다고 한다.1 수많은 성도들 뿐 만 아니라 성경을 그리 많이 접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이 시편은 참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시편 23편은 병든 자와 고난당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주는 시편으로 많이 읽혀지고 묵상되어졌다. 시편 23편은 굳이 주석을 하지 않아도 어렵게 느껴지는 시편은 아니며, 더욱이 많은 이들이 암송하고 있을 정도로 고도의 은유법이 사용된 시이다. 그러나 설교자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시편 23편을 주제로 설교를 할 때에는 설교자만의 독특한 메시지를 이 시편에 담아 선포하기란 쉽지 않으며, 또한 그 내용의 풍부함은 오히려 부담감마저 줄 수 있는 본문이 될 수 있다. 시편 23편을 묵상하며 목가적인 감상과 함께 “여호와는 내게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2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1~2절)는 구절에서 끝없이 푸르게 펼쳐져 있는 곳을 연상하며 한가로이 햇볕을 쬐고 있는 양떼들을 상상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시편 23편은 여느 다른 시들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배경을 근거로 하여 작시되었는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정황은 없다. 시편 23편은 고도의 비유적 표현을 가진 ‘사상’(寫像, imagery)으로 되어 있다. 이는 최소한의 언어를 가지고 자신이 표현하려고 하는 목적을 최대한으로 이루고 있다는 말이다. 마치 화가가 색에 의존하여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려고 하듯이 시편의 신앙인은 사상(寫像, Imagery)에 최대한 호소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상상을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있다.
아름다운 전원시로 알려져 있으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의 평화롭고도 조용한 즐거움을 묘사하고 있는 마치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켜 주고 있는 듯한 이 시를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누구든지 한 번 쯤은 고민하였으리라 생각한다. 시편 23편을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대로 단순히 목가적인 측면과 함께 나타나는 서정적인 시의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또한 시편 23편에 언급되어 있는 지리적인 도움을 십분 활용하여 이해하여 이 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고자 한다. 우선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하셨는데 과연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하는 질의를 던짐으로써 이 시를 감상하도록 하자.

여호와는 나의 목자

이집트의 시내산을 거쳐 타박 국경을 거쳐 이스라엘을 입국하면 제일 먼저 도착하는 도시가 이스라엘 최남단에 있는 에일랏이라고 하는 곳이다. 이곳은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 유명하다. 아카바만을 사이에 두고 요르단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석양이 질 무렵 태양에 반사되어 <사진 1>에서 볼 수 있듯이 진한 적색으로 물 들어가는 요르단 영토는 이 지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장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역에서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광활한 광야가 펼쳐지는데, 얼마 후에 성경에서 언급하는 유대 산지에 이를 수 있다. 광야 생활에 지친 이스라엘 민족은 12종족을 대표하는 12정탐꾼을 이곳으로 보내기도 하였으며, 이스라엘 정탐꾼들은 이 지역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풍성한 포도 열매를 보기도 하였다(민 14:1~4).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원 지대에 올라가는 싸움에 임하여 대패했던 지역이기도 하다(신 1:41~46). 유대 산지는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비옥한 땅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은 돌이 있다.
유다 지역은 크게 두 지역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마치 등뼈 역할을 하듯이 남쪽과 북쪽으로 쭉 뻗어 있는 유다 고원 지대가 있다. 서쪽에 위치해 있는 지중해에서부터 동쪽으로 이동할 때에 쉐펠라가 있고, 유다 고원지대 그리고 유다 광야 지대가 이어진다. 쉐펠라는 <사진 2><사진 2?>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매우 비옥하다. 히브리어로 ‘낮은 땅’이라고 하는 의미인데, 유다 산지와 블레셋 평야 사이에 위치한 구릉 지대를 가리킬 때 쓰이고 있다. 이는 유다 고원지대에서 서쪽을 보며 이름이 지어졌다. 이 지역의 특성은 매우 비옥한 땅으로서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아얄론 골짜기, 소렉 골짜기<사진 3>, 엘라 골짜기<사진 4>, 구브른 골짜기, 라기스 골짜기, 아도라임 골짜기 등을 포함하고 있다.
반면에 동쪽으로 진행하며 고원 지대를 넘어서면 <사진 5>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매우 척박한 광야 지대가 이어지는데, 이 광야 지대를 일컬어 유다 광야라고 한다. 즉 고원 지대를 중심으로 해서 동쪽과 서쪽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는데, 비가 내리는 형태가 전혀 다르다. 구름이 지중해에서부터 동쪽으로 이동할 때, 이 구름은 유다 고원 지대 위로 올라가게 되며 높은 곳에서 응고 되어 조금 더 찬 기후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 습한 기운을 가지고 있는 구름 기운은 산 위 가장 높은 곳에 다다랐다가 다시 요르단 계곡을 향해서 내려와서 요르단을 넘어 솟아 있는 모압 산지를 향해 이동하기 때문에 이 지역은 강수량이 적은 이스라엘의 기후를 감안한다고 하여도 특히 강수량이 적은 지역이다. 따라서 여러 세기를 걸쳐 거친 기후로 말미암아 경작할 수 있는 땅은 유다의 서쪽 경사 지역인 반면, 사막 지역은 동쪽의 경사 지역에서부터 시작한다. 즉 등뼈 역할을 하고 있는 고원지대에 위치해 있는 헤브론克5冗므爪예루살렘 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동쪽 지역과 서쪽 지역의 강수량의 차이로 인해 서쪽 지역은 평야가 펼쳐져 있는 반면에, 동쪽 지역은 광야가 펼쳐져 있는 것이다. 유대 산지와 함께 이어지는 유대 광야는 신약에서 예수님꼐서 금식 기도를 하신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사실 유대 광야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작은 지역이다. 남북의 길이는 남쪽의 사막 지역에 있는 브엘세바라고 하는 도시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이르는데, 약 80 km 정도이다. 유대 광야의 동서 길이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동편에 위치한 사해까지 약 28km 정도이다.
이 지역의 특성은 <사진 6>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의 남쪽 지역과 함께 매우 척박하다. 서쪽 지역의 비옥한 땅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형태이다. 흔히들 생각하기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해서 많은 환상을 가지고 그 땅을 바라보는 경우가 혹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스라엘의 광야를 보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묘사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물론 비가 간혹 내리는 겨울철에는 광야가 푸르게 변하여 마치 잔디를 깔아 놓은 듯하다. 그러나 만약 영국에 펼쳐져 있는 푸르고 푸른 잔디를 한번 쯤 본 사람이라면, 이스라엘의 겨울철의 초장은 그리 실감 있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알려진 이 약속의 땅은 광야를 포함하여 이스라엘의 모든 세대에 걸쳐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시험(test)의 장소였다. 그들이 광야를 통과하는 동안 빵과 물이 부족하여 생존의 위협을 받는 순간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진실로 의지하느냐에 관한 문제를 배우는 기간이었다. 광야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모래와 타는 듯한 태양, 사막의 들짐승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타는 듯이 내리쬐는 태양과 목마름, 사막에서의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들짐승들에 대한 공포 등 상상하기 조차 힘든 어려움이 산적해 있는 곳이다. 이처럼 사막에서의 삶이 불가능하였으나, 오직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실 때에 이러한 여행은 가능하였다. 배가 고파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하여 그들을 먹이셨다. 또한 목이 말라 고통 하고 있을 때에 반석에서 나오는 물로 그들을 살리셨다. 홍해가 갈라지는 체험을 하고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기는 하지만 다시 하나님의 존재마저 의심하고야 마는 이 백성들을 뜨거운 태양에서 보호 하시려고 거대한 구름 기둥을 준비하사 그들을 보호 하셨던 여호와 하나님, 사막의 밤에 생기는 차가운 기운을 막기 위하여 불 기둥을 준비하셨던 하나님. 사막에서의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그들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그 어느 신보다도 뛰어난 만왕의 왕이라고 하는 신앙이 그들 안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순간들이었다. 비록 육신적으로 눈에 보이는 젖과 꿀을 직접적으로 볼 수는 없었다고 하여도 인류의 정신사에 있어서 큰 획을 그을 수 있는 영적인 젖과 꿀을 얻을 수 있는 가장 값진 순간들이었다. 젖과 꿀은 고사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듯한 이 땅에서 그들은 진정 영적인 젖과 꿀을 맛보았던 것이다. 2,000년간 나라 없는 백성으로 지냈어도 이 백성을 오늘날까지 존속시켰던 기초를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광야에서의 경험은 훗날 다윗의 시편 23편에서 나타나는 신앙 고백의 근간이 되었다.
이 고원 지대에 위치해 있는 도시로서는 예루살렘과 헤브론이라고 하는 도시가 있다. 다윗이 처음으로 헤브론에 수도를 정한 것도 이러한 전략적, 지리적인 위치를 차지고 있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고원 지대에 위치해 있는 것이 전략적으로 얼마나 중요한가를 간파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또한 기후적인 면에 있어서 이 지역을 중심으로 비가 내리는 형태에 따라 서쪽과 동쪽 지역이 확연히 다르다. 따라서 이 유대 광야 지역 안에 속해 있는 도시들 가운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도시가 베들레헴이다. 여호수아는 땅을 분배하기 전 이스라엘을 위하여 약속된 통치자가 유다 족속에서 나올 것을 예견하였다(창 49:10). 결국 다윗은 유대 광야 안에 있는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도시에서 태어났는데 예루살렘에서 약 11km 떨어진 남쪽에 위치한다. 다윗은 자신의 첫 번째 왕좌를 그가 태어난 베들레헴에서 남쪽으로 16km 정도 떨어진 헤브론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이러한 지정학적인 위치에서 볼 때에 다윗은 사해 넘어 있는 모압산을, 그리고 반대편 서쪽으로는 지중해를 관망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젊은 다윗 왕은 모압산에서 아마도 훗날 그 백성을 향해 적대 행위를 하게 될 군사들이 훈련 하고 있는 장면을 보았으리라는 상상도 가능하다.
즉 이 지역에 거주하게 될 때에 양떼를 치는 목자가 어느 쪽을 택하였겠는가라고 묻는 다면 당연히 동쪽 보다는 서쪽을 선호하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다윗과 같은 목동 일을 하였던 사람은 이러한 기후의 특성을 잘 알고 있었으며, 서쪽으로 양떼를 몰고 이동한다면 그들은 동쪽과는 전혀 다른 지역을 체험할 수가 있었다는 사실과 동쪽으로 향한다면 또한 서쪽과는 전혀 다른 메마른 지역이기에 양떼를 치기에는 서쪽과 비교하여 볼 때에 상대적으로 회피할 수 밖에 없는 지역이었다. 이러한 유대 고원 지대에서 목동의 직업을 가졌던 다윗은 ‘좋은 목자’의 교훈을 배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가 통치자로서의 모습을 세워나가는데 큰 교훈이 되었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목자’라는 칭호는 본래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자들을 일컫는 용어였다. 이 칭호는 구체적으로 왕에게 적용되는 용어였다(렘 23:4; 겔 34:2을 참조). 더 나아가서 이 용어는 구약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쓰이기도 하였다. “…요셉을 양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시 80:1; 창 49:24; 겔 34:11ff 참조) 즉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하는 고백 속에는 단순히 감상적인 차원을 넘어선다고 할 수 있다. 목회적인 배경이 담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신학적이며 또한 정치적인 배경도 우리는 감안해야 할 것이다. 마치 유대 고원 지대를 중심으로 죽음과 삶이 갈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목동 생활에 뼈가 굳어져 있는 다윗이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그의 목동 시절 양의 생명이 달려 있었던 것과 같이 이제 다윗은 그가 어떠한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삶과 죽음의 길이 교차 하였던 중대한 사안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연상하고 있는 다윗에게 있어서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라고 하는 감상적인 고백의 차원에서 벗어나 여호와 그분 만이 곧 나의 생명이라고 하는 애끓는 고백이 ‘나의 목자’라고 하는 고백 안에 담겨져 있었다. 그 분만이 죽음의 길이 아닌 생명의 길로 인도하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신다는 고백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고 그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여호와에 대한 고백을 담아 나아 간다.

여호와는 나의 인도자 (3절)

3절에서 시편 신앙인의 목자상에 대한 고백은 그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분에서 벗어나 비록 이해 할 수 없는 고난에도 그는 감사할 수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안내하시는 분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편에서 우선 양이라고 하는 동물의 속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양이라고 하는 동물은 지구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동물이라고 한다. 양은 소나 말과 혹은 다른 짐승과는 달리 방향 감각이 거의 없다. 쉽게 멀리 가서 방황 할 때가 많이 있다. 그런데 다른 짐승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반드시 자기 집을 찾아 돌아오지만 양이라고 하는 동물은 조금만 집에서 멀리 떨어지면 집을 찾지 못하는 속성이 있다. 반면에 양은 둥글게 우리를 만들고 그 속에 몰아넣고 목자가 문에 누워 있으면 절대 밖으로 나오는 법이 없다. 아침에 목자가 일어나 나오면 양들이 따라 나오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양은 충분한 물과 꼴로 인도할 수 있는 좋은 목자를 필요로 한다.
둘째, 양은 습성의 동물이다. 우선, 광야 가운데 나 있는 줄을 볼 때에 이러한 사실은 금방 드러난다. 그 넓은 광야에 줄이 그어져 있는데, 이 줄은 양의 성격을 잘 대변해준다. 수십 마리나 되는 양을 놓고 목자가 앞서서 가면 양이 뒤따라가는데 그 양들은 멋대로 진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앞에 있는 양을 따라 가기 때문에 그곳은 줄이 생기게 되는데 이러한 이유로 그 드넓은 광야에는 줄이 마치 오목판처럼 그어져 있다. 더 나아가 양은 오직 목자가 인도해 준 곳에서 발견되는 풀만을 뜯는다. 스스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줄도 모르고 자신이 인도함을 받은 그 목초지의 풀이 초토화 되기까지 풀을 뜯는다. 그래서 모두 뜯어 먹어서 풀이 없으면 그들은 굶주리게 될 수 도 있는 습성이 있다. 따라서 목자는 이 양들을 이끌고 다른 목초지로 이동을 해야만 한다. 따라서 좋은 목자는 이들이 먹고 있는 목초지에 꼴과 물을 잘 살펴서 목초지에서 목초지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셋째, 양은 모여 있지 않고, 사방에 흩어져 풀을 뜯는 습성이 있다. 양들은 좋은 풀이 있을 때에 다른 양과 절대 싸우는 법이 없다. 좋은 풀이 있다고 해서 서로 차지하겠다고 싸우지 않는다. 풀은 어떤 곳은 좀 많이 나기도 하고 또 어떤 곳은 좋은 풀이 있어도 여러 군데에 퍼져서 풀을 뜯는 습성이 있다.
따라서 양들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광야가 아닌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목자가 존재함으로 가능한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목자가 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이는 1절에서 3절의 주어가 분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는 사실과도 일맥상통 한다. ‘그가’ 나를 누이시며(ynIx-eyBir?'), ‘그가’ 나를 인도하시는 도다(ynIleh}b'y]), ‘그가’ 나를 인도하시는 도다(ynIjen]y'). 양의 주인은 목자이듯이 우리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인생의 길에 진정한 주인인 하나님이 목자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로 인하여 다윗은 감사할 수 있었다. 때로는 고난 가운데 처한다고 하여도 그는 목자가 되시는 여호와께서 계심으로 만족할 수가 있었다. ‘그의 이름을 위하여’라고 하는 구절에 잘 나타나 있듯이 지금까지 시편 신앙인의 삶 가운데 자신의 뜻과 목적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어가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호와는 나의 보호자

시편 신앙인의 목자상에 대한 고백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4절에서 비록 그가 광야 가운데 있는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푸른 초장과 대비되는 말이다. 양들은 목초지를 따라 유대 광야에서 쉐펠라 즉 동쪽에서 서쪽을 왕래할 수 밖에 없다. 이 때에 유다 광야에는 참으로 험난한 골짜기들이 많이 있는데 이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골짜기는 히브리어로 가예(ay>G:)라고 하는데 이 용어는 우리로 하여금 유다 광야에 있는 깊고 좁은 ‘나할 프라트’라고 하는 곳을 떠 올리게 한다. 아랍어로는 와디 켈트라고 한다. 이 곳은 <사진 7>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매우 좁은 길일 뿐 아니라 깊은 골짜기로 되어 있는 위험천만한 지역이다. 자칫 잘못하여 발을 헛디디기라도 하면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목숨을 잃을 수 밖에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위태로운 골짜기이다.
이 뿐 만이 아니라 골짜기에는 맹수들이 거처로 삼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바람이 갑자기 불어와 골짜기에서 양들을 아래로 떨어뜨릴 뿐 만 아니라 때로는 갑자기 쏟아지는 비로 인해서 양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한다. 태양이 골짜기 아래에까지 비춰지지 않기 때문에 골짜기는 죽음의 골짜기라고 일컬어 질만큼 양떼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위험한 여행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4절에서 언급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운데에서도 그가 ‘내 잔이 넘친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보호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특히 목자가 위험한 가운데 있는 양떼를 보호한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용어가 있다.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는 구절이다. ‘막대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마쉬에나(hn;[ev]m')라고 하는데 이는 솨안(?v)에서 유래하였다. 그 의미는 목자가 피곤할 때 의지하기도 하며 양 떼를 인도하는 방향 제시용 지팡이를 가리킨다. 그리고 ‘지팡이’(fb,ve)의 일차적인 의미는 ‘강타하다’라고 하는 의미를 가졌는데, 이는 양 떼에게 달려드는 맹수들에게 사용되던 곤봉과 같은 것으로써 보호형으로 쓰여졌다.
결국 지팡이와 막대기는 음침한 골짜기에서 위안을 줌과 동시에 든든한 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1절에서 3절까지는 ‘그가’라고 하는 3인칭 단수를 쓰고 있는 반면, 4절에서는 이보다 더 친근감을 가질 수 있는 2인칭 대명사로 바뀌어져 나온다. 즉 “…내가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당신이(hT;a') 나와 함께 하심이라. 당신의 지팡이(?]vi)와 당신의 막대기(?,n][;v]mi)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호와께서 인간과 함께 하신다는 신뢰는 마태에 의하면 예수와 세상과의 관계에서 보다 더 확실해 진다. 마태에 의하면 예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였고, 이는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의미였다(마 1:23).
이는 복음서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마태복음의 끝에도 또한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역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마무리를 지었다. 즉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운데에서도 다윗이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가 있었다면 여호와께서 그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이었다.

여호와는 나의 공급자 (5절)

고대 근동에서는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관례가 있을 뿐 아니라 주인은 객을 보호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오는 이들을 피하여 사람의 장막에 들어가게 되면 생명을 보존 할 수가 있었다. 급한 나머지 장막에 들어갈 시간이 되지 않을 경우,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장막을 잡기만 하여도 그 주인은 객을 보호해주어야 했다. 이는 창세기 19장에서 롯이 천사들을 보호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천사들을 내 놓으라고 하는 소돔 백성들의 요구에 대해서 자신의 친딸을 내 놓아서라도 천사들을 보호하고자 하였던 롯의 이해하지 못할 행위도 이러한 관습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이 때에 원수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러한 관계를 다윗은 상상하였던 것이다. 그가 비록 원수에게서 쫓기고 있다 할지라도 그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단순히 보호하시는 의미에 한정되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놀라운 공급자의 모습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근동 지방에는 지친 나그네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대접하고 원기를 소생시켜 주는 관습이 있다. 고대의 목자들은 감람유와 황 그리고 향료등을 잘 혼합하여 양을 곤충으로부터 보호하고, 양의 피부에 생기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썼다. 감람 열매와 포도가 자라는데 있어서 시간이 걸리고 또한 기름과 포도주를 숙성시키는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므로 내전이나 혹은 다른 나라와의 전쟁이 있을 때에는 이러한 것들을 준비할 만한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음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기름과 포도주는 건조한 근동 지역에서는 매우 값있는 품목으로 분류되었다. 온도가 상당히 높고 건조하기 때문에, 피부와 목이 상하기 십상이다. 이때에 기름은 얼굴과 몸의 피부를 부드럽게 하는 역할을 하며, 포도주는 목을 깨끗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손님을 맞이하는 경우 기름과 포도주를 대접함으로써 그들은 새 힘을 얻고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기름과 포도주는 성경에서 기쁨과 번영을 상징하였다. 그래서 시편 104편 15절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라고 하고 있다.
시편 23편에서 사용되는 용어가 직접적으로 인용되어 있지는 않다 하여도 시편 23편은 복음서의 핵심인 구속 사건에 대한 예수님의 목자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생각해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시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 나는 ‘선한 목자’(요 10:11)라고 하였을 때에 단순히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지식을 가지고 청중에게 익숙한 비유를 쓰기 위하여 ‘선한 목자’라는 표현을 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구약에서 여호와가 나의 목자되심에 대한 개념은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을 일컬을 때에 하신 말씀이었으며, 더 나아가서는 이 개념은 초대 교회의 개념으로 확장된다(벧전 2:25과 5:4 참조). 이러한 사실은 구약을 읽는 이로 하여금 ?물론 비판 입장에 서 있는 이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구속의 복음의 관점에서 시편 23편을 읽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출애굽기 사건의 메아리가 시편에 나타나고 있는 애굽으로부터의 여호와의 구속 사건에 대한 메아리로 울려나고 있으며, 이는 신약에서는 자신의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하는 선한 목자상에 대한 예수의 메아리로 바뀌어져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주(註)

1) J. J. Stewart Perowne, Commentary on the Psalms, 2 vols. in 1 (Grand Rapids: Kregel, 1989), 1:245. (초판 1878-1879)
2) 70인역은 ‘신선한 물’이라고 읽고 있다.
이성훈/성결대학교 구약학 교수 | 2004. 3.

출처 : deogilkim의 블로그
글쓴이 : 더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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