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귀납법적성경공부

평신도를 위한 성경공부 방법 연구

가디우스 2010. 6. 23. 20:21

평신도를 위한 성경공부 방법 연구


조 병욱목사

맛있게 먹을 때는, 이런 저런 방법이 필요하지 않다. 숫가락을 사용하든, 손가락으로 입에다 넣든지 별 문제가 안된다. 두 살난 아이가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한 생각이다. 이것을 성경연구에도 적용할 수 없는가?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할 때,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지 않을 때가 있다. 주어지는 말씀이 너무 좋아서, 영의 양식을 먹는데 너무 기뻐서, 체계적인 성경 연구 방법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적어도 이럴 때는 필요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도 한 때의 경우다. 잘못 먹다보면, 상한 음식을 먹게 돼, 배탈이 나거나 식중독에 걸릴 수가 있고, 생각없이 지나치게 먹다보면, 비만증에 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 때는 어머니가 먹을 것을 가려 먹이며, 나이가 들면 먹을 것을 스스로 선정해 먹기 마련이다. 아무리 맛있어도 잘못 먹어선 안되며, 평상시에는 적절하고 균형있는 식사를 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 연구에 방법이 필요한 이유는, 말씀을 잘 섭취하기 위해서다. 그릇된 방법은 오히려 성경 연구에 대한 열심을 막는다. 담당 교사가 잘 가르치는 과목은 학생들의 관심과 열심을 불러 일으키는 법이다. 교육 방법을 계발하지 않는 교사의 가르침은 학생들에게 전달이 안된다. 이럴 때 가르치는 자도 힘이 빠진다. 교육적 효과는 별로 없는 셈이다. 어쩌면, 단지 시간메꾸기에 불과할 수 있다.

이제까지, 한국 교회에 성경 공부에 대한 열기가 적지 않았음에도, 교회내에 스스로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말씀대로 실천하려는 평신도 지도층이 두텁지 않다고 평가받고 있음은 왠 일인가? 말씀을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지 않고, 말씀을 스스로 연구하고, 연구한 말씀을 자신있게 전할 수 있는 평신도들은 얼마나 되는가? 적어도 일,이십년의 신앙 교육을 받아야 될 수 있는 교회의 평신도 직분자들은, 다른 목사님 말씀이나, 공과 교재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신이 직접 성경을 통해 깨달은 체험적인 말씀을 어디서나 제대로 전할 수 있는가? 말을 얼마나 잘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성경을 올바로 깨닫고 살며, 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성경 연구 방법이 제대로 강조돼야 한다. 교회가 평신도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도 중요하지만, 평신도들이 스스로 말씀을 연구하며, 살며 나눌 수 있도록 성경 연구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교회는 알아야 한다.




여러가지 성경 연구 방법들

성경 연구 방법은 크게 두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귀납법적인 방법이고, 또 하나는 연역법적인 방법이다. 귀납법적인 방법을 쉽게 말하면, 본문에서 진리를 찾아내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요즘 많이 강조하고 있는 큐티, 강해설교, 본문 성경공부등이 이 방법을 따른 것이다. 반면에 연역법적 방법은 몇가지 전제를 두고, 이 전제에 해당하는 증거들을 찾는 작업이다. 예컨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겸손해야 한다."는 전제를 미리 두고, 겸손에 대한 여러 성경구절들을 찾아 연구하는 방법이다. 주제별 성경공부, 주제 설교, 교리 연구등이 이 방법에 속한다. 이 두가지와는 조금 별도로 인물 성경공부도 있다.

어떤 방법이 더 좋으냐를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각 방법이 장단점이 있고, 대상에 따라 필요가 다르기 때문이다. 초신자들에게는, 대체로 연역법적인 접근이 쉽고 도움이 되는 반면, 말씀을 깊이 연구해야 할 이들에게는 귀납법적인 방법이 효과적이다.

이렇게 말하면 좋을 것이다. 우리가 동대문을 찾아간다고 하자. 가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만들어진 지도를 보고, 아는 사람들에게 길을 자세히 듣고 동대문을 찾아 가는 것이다. 또 하나는, 직접 길에 나서서 세워있는 표시판을 일일이 보면서 찾아 가는 것이다. 앞의 방법을 연역법적인 방법이라 하면, 뒤의 것은 귀납법적인 방법이다. 어느 방법이 더 쉬운가? 말할 필요가 없다. 동대문을 가장 빨리 찾는 방법은 연역법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길을 잘못 가르쳐준 사람의 말을 따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이단들은 이 방법을 주로 사용해서 사람들을 미혹한다. 또 한가지는, 귀납법적으로 길을 찾으면, 가는 도중에 시간을 걸려도, 동대문으로 가는 길외의 길들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지만, 연역법적으로는 동대문으로 가는 길 그 자체만을 주로 알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 연구는 길을 찾아가는 것과는 또 다른 점이 있다. 흔히들, 성경은 하나님의 연애 편지라 한다. 내게 온 연애 편지를, 다른 사람이 대신 읽어 주면서, 이 편지는 첫째 이 말을, 둘째 이 말을 강조했으며, 결국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고 말해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한가?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내가 직접 읽고, 그 편지에 흐르는 사랑의 진국을 마셔야 한다. 다른 사람이 말해주는 것으론 충분하지 않다. 성경은 이처럼 내가 직접 읽고 했을 때, 의미가 더욱 새겨진다. 말씀이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단지 귀로 듣는 것으론, 말씀에 대한 철저한 경험을 하기 어렵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생시키고, 확실하여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하며, 정확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한다." 이 말씀을 내 것으로 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내가 직접 그 말씀을 깨닫고 경험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선, 귀납법적인 성경 연구(이하, 귀성연)가 가장 좋다. 귀성연은, 우리가 순수하게 본문에 접근하여 진리를 하나씩 깨닫도록 하는데 좋은 도움을 주는 성경 연구 방법론이다.




귀성연, 어떻게 할 것인가?

귀성연 방법이 너무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한다. 성경 연구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라 생각한다. 돈을 세는 은행원을 볼 때, 우리가 놀라는 것은 그 빠른 손가락 놀림과 셈의 정확성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셀 수 있는가? 그렇게 셀 수 있기까지, 많은 실습과 노력이 있어야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본문으로부터,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고, 정확히 해석하며, 삶에 적절히 적용할 수 있을려면, 역시 같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시간과 힘을 드릴수록 능력은 계발되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가진 축복일 것이다. 노력해 보라. 힘을 드려보라. 그렇게 어렵지만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방법론을 너무 어렵게 익힌 사람도 있다. 대학생 단체들이 귀성연 방법론을 훈련시킬 때, 상당히 강하게 시킨다. 최소한, 하루 네시간씩 일주일은 해야 초급 과정을 익히는 것이다. 이 때, 너무 어렵게 배우면, 다음에 할 염두가 생기지 않는다. 방법론을 너무 어렵게 가르치면,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겐 부담감만을 줄 뿐이다. 어쩌면, 귀성연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외심"(?)이 생겨서, 메시지를 더 잘 듣게되는 효과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적절한 방법론 연구를 항상 계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너무 안이한 방법을 배워도 문제가 있다. 본문을 제대로 볼 줄 모르게 된다. 본문이 말씀하고자 하는 중요한 것들을 빼놓고, 주변에서 멈추고 말 수 있기 때문이다.




국어를 공부하자.

귀성연을 잘하기 위해선, 어학 실력이 요구된다. 성경도 언어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성경원어인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잘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평신도 입장에선, 언어 연구에 투자할 시간이 별로 없다. 한글 성경을 가지고 귀성연을 하려면, 국어 실력이 필요하다.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는 노력이 귀성연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때 국어 공부를 시키는 이유는, 입시를 치루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닌줄 안다. 각국마다 자국어를 중요하게 공부시키는 이유는, 우선 생활속에서 의사소통의 문제가 없게 하고, 책등을 읽을 때 정확한 뜻을 파악하며 자기 것으로 정보화하여,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래서 문단의 뜻을 한 문장으로 나타내 보라, 각 문장의 중심 단어는 무엇인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중심 사상은 무엇인가등등을 공부하지 않았던가. 본문을 몇 번 읽고, 본문이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를 한,두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본문 연구의 반은 끝난 셈이다. 이런 능력은 국어 연습에서 나온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 성경 연구 방법론을 쉽게 익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귀성연의 관찰, 해석, 적용

귀성연하면, 반드시 말해야 할 것이 세가지 있다. 관찰(Observation), 해석(Interpretation), 적용(Application)이다. 귀성연은 대개 이 순서를 따른다. 관찰을 하고 해석을 한 후 적용을 한다. 관찰은 본문이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발견하는 작업이다. 해석은 말하고 있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작업이다. 반면에, 적용은 깨달은 것을 생활화하는 작업이다. 이 세가지 절차는, 귀성연에 무척 중요하다.

관찰을 못하면, 본문이 무얼 지금 말하고 있는지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엉뚱한 해석과 적용이 나온다. 또한 해석이 정확하지 않고 좋은 적용이 나올 수 없다. 세가지 중에서 관찰이 특히 중요하다. 관찰의 문을 통과해야만, 해석과 적용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관찰할 것인가?

관찰은 한마디로, 본문이 무엇을 어떻게 말하는지를 찾는 것이다. 어떻게 관찰을 시작할 것인가? 먼저 선정한 본문을 읽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보는 것으론 안된다. 본문을 여러번 읽으라. 그리고는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또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라.

요한복음3:16,17을 예로 들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먼저 여러번 읽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말해보자.

○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한다고 말씀한다.

○ 사랑해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한다.

○ 그래서 주님을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한다.

○ 하나님이 아들을 보낸 것은 심판때문이 아니라, 구원때문이라고 말씀한다.

이젠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독생자,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한다고 말씀한다.

○ 믿는 자는 누구나("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한다.


조금 더 정확하게 본문을 관찰하려면, 구문론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구문론적인 방법은 문장의 중심 요소(주어와 주동사)로부터 주변으로 관찰해 나가는 방법이다.

본문장을 최대로 요약하면, "하나님이 사랑하신다"이다. 이 기본문장에 다른 요소들을 첨가해 나가는 것이다. 가까운 것부터 해보자.


○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 하나님은 "무얼 하시는가"?

○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세상을. - 하나님은 "무엇을" 사랑하시는가?

○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세상을, 이처럼 - 하나님은 "어느정도" 세상을 사랑하시는가?

○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해서, 독생자를 주셨다. - 하나님은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셨는가?

○ 독생자를 주셔서,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도록 하셨다. - 독생자를 주셔서, "무엇을" 의도하셨나?

○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멸망이 아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지 않으신 것은?

○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 것은,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은?

○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지, 심판이 아니다. - 하나님이 의도하지 않으신 것은?

○ 영생과 구원은 아들로 말미암는다, 그를 믿어야 한다. -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것을 도표화 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사랑하사 ○세상을 ○이처럼

○주셨다 독생자를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것 그 아들을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구원받게 하려 함이다.

○저로 말미암아



관찰을 쉽게, 정확히 하려면, 이처럼 구문론적인 방법을 도입하는 것이다. 문장이 짧은 것을 할 때는, 어떻게 하든지 크게 문제될 것은 없지만, 혼합복문과 같은 복잡한 것을 구문론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면, 어렵지 않게 본문을 잘 관찰할 수 있다. 관찰을 제대로 했다면, 위의 짧은 두 구절에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좀더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해석과 적용 작업이 필요하다.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관찰한 것만으로는 본문의 의미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 여기에 해석 작업을 해야 한다. 본문에서 관찰한 내용이 의미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왜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는가? 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가? 이렇게 묻고 대답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어나 어구의 뜻을 물을 때, 문장과 문맥안에서 자연스런 뜻을 찾는 것이 기본적이다. 그런 다음에 범위를 넓혀 가는 것이 좋다. 때로는 한 단어의 뜻이 같은 성경의 다른 장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거나, 다른 곳에서 잘 드러나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필요하면, 다른 참고서적들을 펼쳐보자.

질문을 던져보라. 그것은 무슨 말(뜻)인가? 저자는 왜 그렇게 표현하는가? 요한복음3:16,17은 다음과 같은 해석을 덧붙일 수 있다.


○ 세상을 사랑한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세상을 향해 하나님이 무엇을 내보이시는지 알게한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은 바로 세상(사람)이다.

○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적이다.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고선, 아무 것도 안해주는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독생자(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세상에 주시고, 보내주시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을 그렇게 표현하셨다. 하나님의 선물은 시시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의 아들이었다. 얼마나 엄청난 사랑의 표현인가.

○ 세상은 다른 물질세계가 아니다. 여기서 세상은 사람들을 말한다. 작게는, 저를 믿는 자들이고, 크게는 모든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셨다(사랑하신다).

○ 믿는 자는 누구나 영생(영원한 삶)을 얻는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는다.

○ 멸망당하고, 심판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영생과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뜻은 구원과 영생이지, 멸망과 심판이 아니다.


해석은 꼭 모르는 것을 푸는 것이 아니다. 해석은 때로 알고 있었던 것을 다시 정리하고 깨닫는 것까지 포함한다. 다만, 조심해야 할 것은, 영해나 억측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맥의 의도에서 벗어난 해석은 곤란하다. 해석 작업을 통해, 우린 더 깊은 진리로 나아간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한 것은 또 아니다. 관찰과 해석다음에 적용일 필요하다. 적용을 통해 말씀의 생활화가 되기 때문이다. 적용을 통한 삶의 변화없이는 말씀은 내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적용은 말 그대로 말씀을 통해 깨달은 사실들을 내 삶과 연결시키는 작업이다. 이 말씀은 오늘날 내게 무엇하라 말씀하시는가? 내가 이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며 답해보자. 물론, 적용은 개인적인 삶에만 할 것은 아니다. 가정, 교회, 사회, 민족, 세계에다가도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에 대한 적용이 없다면, 말씀에 따른 삶의 변화가 우리 생활에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주의할 것이 있다. 적용은 관찰과 해석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관찰, 해석한 것만을 적용할 수 있다.


○ 하나님은 나와 형제들을 사랑하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님을 통해서 주셨다. 감사한다.

○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은 사람들에 대한 내 시선을 바꾸어 놓는다. 그렇다. 하나님은 이 사회에 있는 죽어있는 이들도 사랑하고 계신 것이다. 이들에게도 주님을 주셨다. 그들이 돌이켜 살아계신 주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매일 15분씩 이를 위해 기도하면서, 수,금요일에 내 주위에 있는 이들(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이 기쁜 복음을 전하자.

○ 하나님은 사랑을 독생자를 주심으로 표현하셨다. 그 분은 사랑의 최선을 내게 주셨다. 나는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는가? 나도 그 분을 사랑한다. 내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은 현재의 삶과 미래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이다. 주님께 무릎을 꿇는다. 주님 내 생애를 받으소서.

○ 내가 형제,자매들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말과 혀로만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이 뒷따르는 사랑을 하고 있는가? 이번 주일, R형제의 부족함을 메꾸어 주어야 겠다.

○ 하나님은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을 원하지 않으신다. 어떻해서든지, 그들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영생과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이 얼마나 강력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인가? 내가 이 마음을 품을 수 있는가? K곳에 있는 사람들이, 주님없이 멸망하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으신다. 그들이 주님을 통해 생명을 얻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 그들이 생명의 주님을 만나기를 역시 기도하면 전하자.


적용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행함과 기도가 뒷따라야 한다. 기도없이는 우리의 각오가 무산되기 마련이다. 기도하고 행하자. 말씀의 역사가 어떤 것인지 우린 깨닫게 될 것이다.




방법론을 완전히 내 것으로 하려면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관찰을 잘해야 한다. 지면상, 자세한 귀성연 방법론을 다루긴 어렵다는 점이 아쉽다. 관찰을 아주 쉽게 하는 방법은, 한 절씩, 내용을 풀어 기록하는 것이다. "16절-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다. 그래서 하나뿐인 아들을 주셨다. 주를 믿는 자는 멸망당하지 않을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밑에 한 문장씩 줄을 긋고 필요한 설명을 해 보는 것이다(해석작업).

이제, 믿음을 가지라.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는 지혜를 주실 것이라는,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말씀을 대하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과 열망을 가지고 말씀을 연구하자. 그리고 말씀을 통해, 묻자. "하나님, 제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저로 무엇을 행하길 원하십니까?" 그리고는 행하자. 그러면 말씀의 힘이 우릴 사로 잡을 것이다. 말씀대로 살고자 하면서 한 가지 더 해야 할 것은, 사람들에게 깨달은 말씀을 나누고 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말씀 연구의 기쁨과 보람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열린 말씀을 깨닫는 기쁨을 소유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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