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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직장은 강퍅한 지역

가디우스 2007. 9. 17. 02:28
2) 직장은 강퍅한 지역
        직장이 강퍅하다는 것은 단순히 외형으로는 알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직장이 물질을 매개로 되어 있기에 마귀의 수하에서 놀아나기 쉽다. 이처럼 직장이 물질 위주로 흘러가게 되면서 직장 안에는 강퍅함이 흘러나게 된다. 물질 위주로 흘러가면 결국은 돈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이처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하였다(딤전6:10). 여기서 물질을 매개로 해서 더 많이 얻거나 취하고자 하는 것이 그 심령을 강퍅하게 만들어 갔다. 왜냐하면 직장에서는 대부분 경제원칙이 적용되고 있고, 또 그렇게 해서 생겨난 곳이 직장이기 때문이다.
        “경제원칙”이 좋은 말같이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인간의 욕심의 극치를 반영하고 있다. 바로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효과를 본다는 것은 도둑놈 같은 심보라고 말함은 지나친 말일까? 물론 상대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는 기대하기 어려운 항목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챙기고 싶은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이다. 고용주는 물주인 만큼 투자에 대한 최대 효과를 위해 열심히 단물을 빼먹으려고 애를 쓴다. 또 사원들은 가능한 최소한의 힘을 들이고 더욱 많은 이득을 챙기려고 몸부림치지 않겠는가? 심지어는 양자간에 극심한 노사갈등과 투쟁이 자행되고 있는 것은 그것을 대변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직장이 강퍅한 지역으로 서로 물고 뜯는 현장임에 분명하다.
        어쩌면 직장이 강퍅하다는 것은 단순한 경제논리를 떠나 세상이 얼마나 강퍅한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세상 임금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고 몸부림치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오늘날의 직장인들이 영적인 면에서 볼모로 잡혀있는 곳이 바로 직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직장은 치열한 대립과 갈등과 경쟁이 난무하고 마침내 강퍅한 지역이 되고 말았다. 서로를 믿거나 신뢰하지 못하는 관계로 나아가고 있으며, 또 무례하고 무정하고 서로를 무시함으로 더욱 악화되어가고 있다. 이런 것들은 마지막 때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으로 영적인 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직장이나 세상이 왜 이렇게 강퍅한가? 이는 한 마디로 말해서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즉 무엇인가 자신만이 알고 믿을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힘만 믿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강퍅해지기 쉽다. 이는 거만한 것이요 교만한 것이다. 가령 애굽의 바로는 자신의 힘만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서 강퍅한 자세를 취하지 않았는가? 이처럼 자신의 능력만 의지할 터이면 강퍅하게 되고 마침내 망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망할 때까지 강퍅한 바로는 쫓아오듯이, 악한 자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끝까지 찾듯이, 직장에서 횡행하는 경제원칙은 무수한 영혼들을 끝까지 강퍅함으로 물들게 만들 것이다.
        직장은 현실이라는 미명 아래 경제원칙으로 철저히 무장되었기에 성경적인 원리들이 너무나 초라하게 보일 수도 있다. 마치 애굽의 바로왕 앞에서 서게 되었던 모세처럼 초라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당시 모세에게는 허름한 양치기가 입던 옷과 양 칠 때 사용하던 지팡이가 전부였다. 하나도 빛날 것이 없고 흠모할 만한 것도 없었다. 하지만 바로왕은 화려하고 멋지게 치장되어 있던 왕궁, 그 위에 위용 있게 서있는 바로왕이었다. 이와 같이 직장도 겉보기에는 화려함과 멋스러움으로 치장되어 있다. 이에 반해서 그 속에서 역사해야 할 성경적인 것들은 너무나 초라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왕과 같이 화려함 속에서 역사하지 않고, 모세와 같이 초라함 속에서 역사하고 있다. 외형으로 거만스런 직장인 속에서 역사함이 아니라 그 안에서 겸손히 성경적인 원리에 순종하는 직장인 속에서 역사하게 된다. 아무리 철저한 경제원칙으로 무장한 직장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 겸손히 순종하는 직장선교사(직장인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틈새가 벌어지게 되었다. 작은 나무뿌리 하나가 큰 바위를 쪼개듯이 무명의 직장선교사에 의해서 그 화려한 직장이 깨어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지혜와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함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
        어떤 면에서 보면 철저히 경제원칙으로 무장한 직장에 침투해 들어간다는 것이 불가능해보이기도 하다. 이 강퍅한 직장에서 직장선교를 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사실은 어렵다. 사람으로는 어렵다. 그것은 마치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처럼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겠는가?(마19:26) 즉 하나님께서 친히 주체가 되지 않으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직장선교사들과 함께하지 않는 한 어렵다. 즉 아무리 몸부림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지켜주지 않으시면 어렵다(시127:1).
        그러기에 강퍅한 지역인 직장에서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능력밖에는 없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 이미 강한 자를 결박해 놓았으며 그 능력으로 볼모로 잡혀있던 직장인들을 구출해 오기를 원하신다. 이 강퍅한 직장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동요하지 말고 늘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능력사역의 필요성은 갈수록 중요하게 느껴진다. 바로 능력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로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고, 작은 산들을 겨 같게 하듯이(사41:15) 강퍅한 직장을 깨뜨리는 하나님의 강력이다. 이 능력은 바로 철옹성 같은 직장이라도 능히 침투해 들어갈 수 있는 힘이 있다. 바로왕은 이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그 강퍅함이 완전히 깨어져버렸다.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은 경제원칙으로 무장된 직장(인)을 무장해제 시키는 강력이 된다. 그러므로 능력사역을 통해서 직장선교로 침투해 들어가야 한다. 이런 침투할 능력이 없이는 오히려 스스로 상처를 받고 물러서기 쉽다.
        강퍅한 바로왕을 깨뜨렸듯이 강퍅한 직장을 깨트릴 비결은 무엇보다 능력이다. 능력이 아니고 어떤 논리와 설득으로는 한계가 있다. 어쩌면 능력도 웬만하다면 끔쩍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바로는 여섯째 이적까지는 꼼짝하지 않더니 일곱째 우박 재앙부터 마음에 동요가 일어났다(출9:27-28).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다가 애굽 안에 있는 모든 초태생이 죽임을 당하자 마지 못해서 항복하게 되었다(출11:4-6). 그리고도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능력만 믿고 마지막까지 쫓아오다가 몰살 당하고 말았다(출14:26-28). 이상의 일련의 과정은 직장선교에서 나타날 수 있는 과정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세상 원리로 버티지만 마침내는 하나님의 능력 앞에 굴복하게 되고, 그것도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을 때는 마침내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강퍅하게 무장되어 있는 직장을 깨뜨려서 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은 더욱 중요하다. 강퍅한 직장에서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강퍅한 직장을 온전히 복음으로 정복하기 위해서는 말과 전도함의 지혜의 권하는 말로 아니하고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해야 한다. 이에 직장선교사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는 것이다(고전4:20). 그리하여 직장선교를 통해서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해야 한다(고전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