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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직장선교는 누가 해야 합니까? (Who)

가디우스 2007. 9. 17. 02:20
3. 직장선교는 누가 해야 합니까? (Who)

                1) 직장선교사의 위상

        직장선교는 누가 해야 할까? 여기에 대한 주인공을 직장선교사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즉 직장에서 직장선교를 하는 사람을 직장선교사라는 말 외에 적당한 표현이 부족하다. 이에 직장선교의 주체들을 ‘직장선교사’라는 개념으로 기술해 나가고자 한다. 이처럼 말함은 직장선교를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직장선교사의 위상이 제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직장선교사의 위치가 과거에는 가려져 있었으나 미래에는 이들이 확고한 위치로 부각되어야 한다. 직장에 몸담고 일평생 직장선교를 하는 직장선교사들의 신분을 공적으로 드러내고 그들의 수고에 대한 칭찬이 인색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자신의 생계만을 위해 일하지 않고 주의 사명을 위해 몸부림치는 현장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빛 아래서 바르게 표출시켜야 한다. 그래서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묵묵히 수고한 이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치하해 줄 때 직장선교는 아름답게 펼쳐지리라고 확신한다.
        직장선교사로 부각되고, 믿음으로 무장된 대부분 평신도사역자들의 위상이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직장선교는 무시당하고 소외되었던 평신도들이 힘있게 일어나도록 이끌어줄 때 가능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직자에 비해서 평신도는 지나치다시피 낮추어 대우하였었다. 즉 직장현장에서 말없이 일하던 그들의 위상을 너무 비하시켰던 것이 바로 지난 과거였다. 직장일과 세상일을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면서 직장인들을 세상의 종된 자들로 매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직장 일에서 조금만 어려우면 ‘그까짓 것 때려 치고 주님 일이나 하지’라고 서슴지 않고 권고하였던 시절이 지난 시절이었다.
        하지만 평신도들은 그들 스스로가 믿음으로 살기보다는 호구지책에 매인 바 되어 직장 일에 매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직장에 몸담고 있던 평신도들은 갈수록 주님을 볼 면목이 없어 쥐구멍을 찾아야 했고, 어디론가 낮은 포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직장에서는 직장 일을, 교회에서는 주님 일을 해야 한다’고 이원화된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직장의 일과 주님의 일을 이원화시켜 분리할수록 직장선교는 더욱 더 어려워질 뿐이다. 오히려 율법의 덫에 걸려서 평신도 자신의 입지만 좁아지게 되어 있다. 그러기에 직장의 일도 주님의 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경적인 노동관이 요청된다. 평신도들도 바로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을 성경적인 관점에서 바로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직장선교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직장에 있던 평신도의 위상이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바로 평범한 그리스도인(신도)으로서의 직장인이 아니라 바로 위풍당당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직장선교사로 위상이 달라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변화는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또 다른 권리회복과 같은 것이다. 이는 마치 권위주의 밑에서 말 못하던 민초들이 민주주의가 변화되면서 국민주권을 회복해나갔던 것과 매우 흡사하다. 직장에 있는 평신도들은 더 이상 나약한 민초들로 비하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당당히 일어나서 직장선교사로서 거듭나서 활약할 수 있도록 밀어주어야 한다.
        주님의 사역에는 앞으로도 과거처럼 카리스마를 가진 한두 사람들이 미래에도 필요함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미래에는 한 두 사람만이 아닌 직장에 있는 평신도들이 직장선교사로서 자신의 주권을 당당히 발휘해야 할 때이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 모두가 신령한 주권을 내세워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직장이라는 삶의 영역에서 영적인 궐기가 절실히 요청된다. 바로 직장선교사로서 평신도들이 동역과 연합으로 형성된 영적인 궐기를 한다면 주님의 역사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일 것이다. 민초들의 힘으로 혁명을 일으키듯이 직장선교사로서 그리스도인의 주권회복은 주님의 사역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리라 확신한다. 그리하여 마지막 때에 놀랍게 일어난 영적인 부흥을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직장선교를 통한 혁명적인 부흥을 기대한다면 직장선교사의 위상이 제고되어야 한다. 세상임금은 분명히 직장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묶어놓으려고 하겠지만 주님은 진리의 복음을 앞장세워서 당당히 나서는 직장선교사들로 파송하고 있음을 모든 직장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이에 앞서 직장선교사에게는 점검되어야 할 두 가지 사실이 있다. 바로 이것은 직장선교사의 소명과 사명이다.

                (1) 직장선교사의 소명

        직장선교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소명의식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왜 직장선교사로 부르셨는 지에 대해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일반적으로 평신도와 성직자로서 크게 차이가 나는 것도 바로 소명의식이다. 성직자 곧 전임사역자들은 어떻게 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곧 소명의식에 대해 반드시 점검하는 절차를 가진다. 반면에 평신도는 어느 직장에 가든지 소명의식과 상관없이 누구나 가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필요에 따라서 움직인다. 하지만 하나님의 모든 사역에는 하나님의 소명을 통해서 일하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직장선교에 있어서도 직장선교사로서의 하나님의 소명의식을 점검해야 한다.
        흔히들 직업이라는 말을 영어로는 여러 가지로 사용하는데 work, occupation, job, vocation 등을 쓰고 있다. 이 가운데 vocation이라는 말은 라틴어 vocatio에서 유래되었는데 그 의미는 ‘부르다’ 혹은 ‘소집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직업도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맡겨주신 직분이라는 의미가 된다. 직장에 대한 소명의식은 특히 교회 개혁자인 마틴 루터나 칼빈이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들은 만인제사론(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에 근거하여 성직만이 소명 받은 것이 아니라 세상의 직업들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전7:20)는 말씀에서 ‘부르심’을 세상의 직업까지 확대해서 해석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이 ‘부르심’을 성직자에게만 국한했던 것에 대한 개혁이었다.
        만일 직장인이 직업을 가져 직장에 들어가면서 하나님의 소명을 확인하지 않고 임의로 행동했다면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직장선교사의 첫 번째 자격은 소명의식으로 직장선교사의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과연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서 그 일을 위임했는지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당신의 임의대로 직장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직장선교사로 부름 받아 들어갔음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 직장선교사로 부르지 않았다면 혹시 직장에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직장선교와 무관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이라면 ‘직장을 어떻게 얻었느냐?’에 대한 것보다 ‘직장을 왜 얻었느냐?’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바로 직장이 왜 중요한지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해서라도 직장으로 밀어 넣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직장에 왜 들어가야 하는지 그리스도 안에서 소명을 가질 때 직장선교사로서 대임을 다할 수 있다. 이에 하나님께서 왜 당신을 지명하셔서 그 일을 위임했는지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당신의 임의대로 직장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직장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직장에 들어갔음을 인정해야 한다. 주님께서 직장으로 부르지 않으셨다면 아무도 직장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직장선교사의 소명은 그리스도인 직장인에게 압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하게 하며(고전7:22), 평안함 가운데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도록 하는 데에 있다(골3:15). 원래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는 비록 세상의 억압과 눌림 속에 있을지라도 참 자유가 있다. 이 자유는 방종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기 위한 거룩한 수단인 것이다. 그러므로 직장선교사의 소명(부르심)에는 자유함과 하나됨이 기본 정신으로 바탕에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 자유함과 하나됨이 없는 부르심은 온전한 것이 아니다. 아무튼 직장선교사는 부르심을 통해서 먼저는 자신이 자유함을 누리고, 다음으로는 다른 영혼들을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가입시켜 나가야 한다.
        그런데 직장선교사는 자신의 개인적인 부르심과 함께 고려할 것이 바로 천직(天職)의식이다. 즉 자신의 직업이 우연히 자연발생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다스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고안해서 만드신 신성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더 나가서 그 직업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을 위한 하나의 거룩한 지체로 세워졌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직장선교사는 직장에 우연히 들어간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만물이라고 하는 전체에서 한 지체된 역할을 다해야 한다. 어떤 직업이든지 하나님께서 불러 세우신 한 지체이다. 지체는 귀천이 없다. 주님은 평등을 통한 소명으로 한 몸을 세우려 하신다. 그러기에 모든 직업은 귀천이 없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직장선교사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천직의식을 갖는 것과, 그 직업을 통해서 주님이 부르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하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천직의식이 없으면 자신의 직장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답게 일하기 어려울 것이고, 소명의식이 없으면 자신의 직장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매이며 부정적이며 수동적이 되고 말 것이다. 이에 직장선교사는 자신의 기호와 감정에 민감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소명(Calling)인 직업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민감해야 한다. 바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소명으로 세워진 직장에서 각 심령들이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요6:40), 곧 직장선교라고 말할 수 있다.